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11-22 15:02:17

소비 부여씨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min-height: 33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혁거세 후 남해 후 유리 후
알영부인 운제부인 이리생부인 사요왕의 딸 김씨
탈해 후 파사 비 지마 후 일성 후
아효부인 사성부인 애례부인 지소례왕의 딸 박씨
아달라 후 벌휴 후 내해 후 조분 후
내례부인 석골정의 모후 아루부인 아이혜부인
조분 후 미추 후 흘해 후 내물 후
운소부인 광명부인 석공한의 모후 보반부인
실성 후 눌지 후 자비 후 소지 후
아류부인 차로부인
1
복호의 딸 김씨
2
미사흔의 딸 김씨
1
습보의 딸 김씨
2
선혜부인
3
벽화부인
지증왕 후 법흥왕 후 진흥왕 후 진지왕 후
연제부인 보도부인
1
사도부인
2
소비 부여씨
지도부인
진평왕 후 무열왕 후 문무왕 후 신문왕 후
1
마야부인
2
승만부인
문명왕후 자의왕후
폐비 김씨
2
신목왕후
성덕왕 후 효성왕 후 경덕왕 후
성정왕후
2
소덕왕후
1
왕비 박씨
2
혜명부인
3
정종의 딸 김씨
사량부인
경수태후
혜공왕 후 선덕왕 후 원성왕 후 소성왕 후
1
신보왕후
2
창창부인
구족부인 숙정부인 계화부인
애장왕 후 헌덕왕 비 흥덕왕 후 희강왕 후
왕후 박씨 귀승부인 정목왕후 문목왕후
민애왕 후 신무왕 후 문성왕 후 헌안왕 후
윤용왕후 정계부인
1
소명왕후
2
장보고의 딸
문의왕후의 모후
경문왕 후 헌강왕 비 효공왕 후 신덕왕 후
1
문의왕후
2
차비 김씨
의명부인 왕비 박씨 의성왕후
경명왕 후 경애왕 후 경순왕 후
왕비 김씨 왕비 죽방부인
}}}}}}}}}


<colbgcolor=#25B4B4><colcolor=#fbe673>
신라 진흥왕의 제2비
소비 부여씨 | 小妃 扶餘氏
백제 성왕의 왕녀
출생 미상
백제
사망 미상
재위기간 신라 소비
553 10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25B4B4><colcolor=#fbe673> 성씨 부여
부모 성왕
부군 진흥왕
봉작 소비(小妃) }}}}}}}}}
1. 개요2. 행적3. 여담

[clearfix]

1. 개요

백제의 공주이자 신라의 왕비. 성왕의 딸, 진흥왕소비(小妃, 작은 왕비).

2. 행적

백제가 신라에게 한강 하류를 빼앗긴 직후, 553년 10월, 백제 성왕은 딸(소비 부여씨)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냈고 진흥왕은 그녀를 소비(小妃)로 삼았다.[1] 이는 성왕이 한강 하류 영유권 문제를 문제삼지 않고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는 표현이었지만, 백제의 군사 동맹이자 지원군을 파병한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왕은 이미 553년부터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할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소비 부여씨는 전쟁을 준비할 약 1년간의 시간을 벌고 신라를 방심시키기 위한 희생양으로 비정하게 이용된 것이다.

결국 소비 부여씨가 신라로 시집간지 약 1년이 지난 554년, 관산성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아버지 성왕이 남편 진흥왕과의 전투 중 사망했고, 한때는 동맹이었던 두 나라의 관계는 이 때부터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소비 부여씨의 행적은 기록이 없다.

3. 여담



[1] 이미 진흥왕에게는 사도부인이 있었지만, 조선 태종 이전에는 왕비가 동시에 여러 명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후궁이 아니다.[2] 왕건의 주장도 아주 허무맹랑한 건 아니었다. 왕건 정권이 후당에 찔러준 정보를 바탕으로 후당의 2대 황제인 이사원이 왕건을 고려왕으로 책봉했을 때, 왕건을 장회무족(長淮茂族)이라 하여 회이(淮夷)의 번성한 일족 출신이라고 추켜세워주었는데 이 회이라는 말은 지역적으로 고구려 유민 이정기 일가가 준독립세력인 평로치청번진을 세웠을 정도로 고구려 유민이 대단히 많았던 회하 유역에서 산둥성 동남부에 걸쳤던 지역을 말한다(주로 현 장쑤성 양저우시 일대). 또한 무려 최소한 한사군낙랑군 시대부터 시작하여 고구려 시대를 거치며 융성했던 고구려 계열 성씨가 다름 아닌 '왕씨'였던 것도 강렬한 시사점이 있다.[3] 심지어는 신라와 대단히 관계가 돈독한 가야 금관국 왕족 출신의 신 김씨들도 문무왕의 시대가 되기 전까진 적어도 진골 상대 결혼 후보자로는 꺼려질 정도였다.[4] 견훤의 족보들 중 백숭 부인이 등장하지 않고 아예 부여융을 선조로 하여 세대수가 납득이 가게 작성된 족보가 있는데, 해당 족보는 그 시기의 정확성 탓에 오히려 진실성이 의심된다. 어느 누가 봐도 뭔가 어설픈 부분이 있고 세대수도 분명 좀 엉터리인 백숭부인판 족보가 적어도 진실성이나 신뢰도는 높은 형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