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식당에 대한 내용은 음식점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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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름만 들으면 그냥 식당을 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기생[1]을 두고 술과 요리를 파는 유흥업소이다. 음식은 주로 한정식을 취급했다.
2. 역사
일본에서 운영하던 '료테이(料亭, りょうてい)'를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한반도로 들여온 것이다. 한자로는 요정(料亭)이라고 하는데, 원래 일본에서 쓰이던 한자말을 한국식으로 읽은 것이다. 원래 처음부터 일본 료테이를 들여온 것인 만큼 일본에서도 비슷한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 진짜 요릿집 뿐 아니라 토비타신치 같은 집창촌도 요리조합과 요릿집의 구색을 갖추고 장사한다.192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정치인들과 권력자, 기업인들은 여자를 끼고 이곳에서 정치에 관련된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며 접대를 했었다고 한다. 일명 '요정정치'라고도 불린다. 오늘날의 룸살롱에 비견되는 곳이다. 사실은 룸살롱에 비견되는 곳이지만, 지금도 요릿집은 룸살롱보다 가격대는 훨씬 더 높다. 지금이야 룸살롱은 여러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지만 요정은 값이 비싸 고위관료나 대기업 간부들 정도만 이용하는 곳이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당시에 일본인 부유층들이 조선 궁중음식을 맛본다면서 종종 찾아왔었기도 했었는데, 이는 당대 유명 요릿집 중 일부가 수라상을 만들던 대령숙수들을 영입해서 고용했기 때문이었기도 했다.
사실 요정, 방석집 등 다양한 업소가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전부 룸살롱으로 바뀌면서 일원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전통 문화(?)를 유지한다는 이미지도 있는지 접대부들이 한복을 입고 일한다는 것도 특징 중 하나.
전성기 시절엔 국악전공 대학생들의 아르바이트 장소로 각광받던 곳이다. 물론 접대부 말고 말 그대로 국악기 연주하는 일이 그렇다는 것. 1970년대 기준으로 3~4시간에 십만 원씩도 받을 정도였는데 당대의 평균 급여수준이 월 몇만원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몇달치 급여를 한번에 벌수있는 고수입 알바였던 것. 현대에도 이런 아르바이트 자체는 일반 고급 한식당에 남아있긴 하다.
근래에는 룸살롱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고급 한식집으로써의 이미지 변신을 시작, 상당 부분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음식이 아무리 고급이고 맛있다고 하더라도 일반 서민들 주머니로는 살떨리지 않을 수가 없다. 뭐 가격 좀 비싸더라도 질 높은 서비스와 고급 한식으로 나가려고 하긴 하지만, 사실 이 마저도 특급 호텔의 고급 한식당으로 대체되는 분위기인지라, 예전과 같은 고급 이미지는 아니다.
3. 논란
일명 '기생관광'의 육성을 위해 세금 혜택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관련기사.서울특별시의 고급 요정에서 성매매를 한 것이 무더기로 적발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4. 매체
일제강점기 혹은 1950~60년대까지를 다룬 매체들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장소이다. 1970년대까지는 성업했기 때문에 요정정치 관련 등이 나오는 매체에도 나온다.1943년에 발표된 한복남의 대중가요 <빈대떡 신사>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요릿집이기도 하다. 양복 입은 신사가 요릿집에 들어가서 요리를 먹었다가 돈이 없어 뒷문으로 도망치려다 주인에게 붙잡혀 매를 맞는다는 내용이다. 참고로 후렴구가 '돈 없으면 집에 가서[3]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릿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
요릿집이 등장하는 작품들
5. 유명한 요릿집들
5.1. 삼청각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으며, 건축가 정재원이 설계 후 현대건설이 시공해 1972년에 개장했다. 1980년대 청운각과 함께 서울 최고의 요정이었으며, 요정 정치가 이루어지는 장소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대외적인 긍정적 용도로 사용된 것이라면 7.4 남북 공동 성명 만찬장으로 사용되었다거나, 1970년대 남북적십자회담 장소로 쓰였다거나 하는 등의 역사적 일도 있었다.하지만 현대로 오면서 룸살롱 시대가 열리자, 요정은 고급 중국요릿집이 되었다가 망해가다가, 서울시의 문화시설 지정을 받은 것을 계기로 요정 이미지에서 탈피해 전통문화공간의 이미지로 변하려 노력 중이며, 그 일환으로 전통혼례공간으로도 거듭났다. 활옷에 사모관대를 갖추고 전통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 다만 옛날 이미지를 잘 기억하고 있는 어른들의 경우 기생집에서 결혼식을 올린다고 생각해 싫어하는 경향도 있다고 한다.
원래 개인 소유였으며 1999년 화엄건설에 소유권이 넘어가 고급주택 부지가 될 뻔했으나, 2001년부터 서울시가 매입해 공연시설은 세종문화회관에게, 한식당은 한화개발 외식사업부(현 푸디스트)에게 각각 위탁운영했다가 2005년에 소유권이 파라다이스에 넘어갔다가, 2009년부터 현재까지 세종문화회관으로 넘어갔다. 공연 및 전시공간으로도 이용되고 있으며, 원래 본업인 고급 한정식집으로 성업 중이다.
5.2. 선운각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에 있으며, 1980년대까지 밀실정치 3대 요정하면 대원각, 삼청각, 그리고 선운각이었다.원래 김재규의 내연녀였던 장정이가 1967년 개점했는데, 당시 한옥 몇채를 뜯어와서 그 부속품으로 건물을 지었는데 이 건물 중 일부가 안국동에 있던 안동별궁으로 보인다.
이후 그 자리를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구매해서 기도원과 사택으로 쓰다가 2021년부터는 다시 '선운각'이라는 이름으로 한옥 카페 겸 결혼식장으로 쓰고 있다. 미스터 션샤인, 이태원 클라쓰, 부부의 세계 등 유명 드라마의 촬영 장소이기도 하다.
5.3. 동래별장
일제강점기 동래온천장에 건립된 하자마 후사타로(迫間 房太郞)의 별장인 박간별장이 기원. 하자마는 당시 부산을 기반으로한 대부호로, 일제강점기 때는 금강원과 온천장 일대의 근대적 위락시설들의 랜드마크였으며, 일본 왕실에서 다녀갈 정도의 호화로움을 자랑하였다.동래온천과 해방 후 미군 휴양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엔 여러 요정들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일반음식점으로 운영 중이다.
6. 폐업한 유명 요릿집
6.1. 대원각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으며 1951년 개장.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던 김영한(김자야)이 운영했던 요정으로, 백석의 시에서 가끔 등장하는 '자야'라는 여인이 바로 그녀이다. 다만 그녀가 진짜 백석의 연인이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김자야가 1997년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서, 요릿집이었던 대원각은 길상사라는 절로 바뀌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6.2. 청운각
1956년 조차임이 이시영의 사저인 종로구 청운동 자택을 빌려서 개장했다. 원래 일본인 땅이었다가 이시영이 적산 불하를 받은 것이다.청운각의 전성기에는 다른 요정은 다 아래에 있었다고 할 정도로 유명한 요정이었다고 한다.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이 이곳에서 맺어졌다. 그러나 이후 조차임이 암에 걸리자 자산을 정리해서 '우산육영회'란 이름의 장학재단을 만들면서 없어졌다.
6.3. 오진암
1953년 개장했으며, 서울시의 첫 등록 식당이기도 하다.3대 요정이라느니 하는 유명세는 다소 떨어지지만 그 바로 다음으로 언급될 정도의 위치에 있으며, 요정정치하면 여기도 그렇게 밀리지 않는다. 김두한의 단골집 중 하나였으며, 이후락이 북한의 박상철과 만나서 7.4 남북 공동 성명을 사전 논의한 곳이기도 하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완전히 몰락해서, 2009년 성매매를 알선하다가 적발되었다는 대표적인 요릿집이 여기다. 결국 2010년 망했고, 2014년 종로구가 여기 이름을 안평대군의 자택터인 무계정사로 옮겨서 무계원이라고 해서 전통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 원래 종로구 익선동에 있었는데, 무계정사는 부암동이라서 그냥 이름만 가져다 붙인 형태일 뿐이다.
6.4. 명월관
1903년 9월 17일[4]에 마지막 대령숙수였던 안순환이 현재의 동아일보 사옥 자리에 세운 요정으로, 밑의 태화관의 본점 격인 곳이다. 1918년에 화재로 한 차례 소실되었다가 종로구 돈의동[5]에 다시 세웠다.경성부의 고위층 인사들이 단골이었고, 간송미술관의 설립자인 전형필도 중요한 거래 등을 할 때 이곳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6.25 전쟁 때 파괴되었다.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과 설향이 만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여담으로 시트콤 오포졸에서 나오는 기방의 이름도 명월관이나, 작품 설정상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관련이 없다.
6.5. (신) 명월관
일제강점기 명월관의 이름만 똑같이 따온 곳이었지만 역시 유명했는데, 왜냐하면 유명한 건달 이화룡의 누이가 운영했었기 때문이다. 많은 정치인들과 유명인사들이 들락거렸으며, 1960~70년대를 관통한 요정정치의 주역이었다.6.6. 태화관
명월관의 분관인데, 아주 복잡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원래 세종의 손녀 길안현주가 살았던 집인데, 세도정치 시절 안동 김씨 일가의 소유가 되었고, 헌종이 승하한 뒤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순화궁이 되었다. 경빈 김씨가 1907년 사망한 후에는 이완용의 형 이윤용의 소유가 되었고, 1911년 이완용이 형으로부터 사들여 1913년까지 살다가 이사를 갔는데, 명월관의 주인 안순환이 이곳을 빌려 태화관이라는 이름으로 개업한 것.당시 크고 작은 방이 많아 서울의 부호와 조선총독부 관리 등 친일파들이 즐겨 찾는 서울의 명소였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바로 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래서 아주 골치가 아파진 이완용은 이 건물을 감리교 교단에 매각해버렸다. 기존 임차인이었던 명월관 기생들이 이것에 항의하면서 밖에서 노래를 부르니, 이번엔 감리교 교인들도 맞받아서 찬송가(...)를 부르는 노래 시가전이라는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쨋든 소유권이 넘어갔기에 1921년부터 이 건물은 '태화여자관'이라는 이름으로 감리교 포교지이자 여성복지 사회재단이 되었고, 이후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이라는 이름으로 변했다. 다만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했던 본래 건물은 1935년에 개축을 위해서 헐렸고, 태화복지재단으로 변한 재단은 훗날인 1995년 강남구 수서동으로 이전하게 된다. 이 태화재단에 이 건물에 대해서는 순화궁이었고 독립선언서 발표되었다는 소리는 있지만, 이완용에게서 구매했다거나 기생집이었다는 이야기는 없다고 한다. 현재 서울 종로타워 뒤 태화빌딩 자리이다.
6.7. 춘앵각
[1] 여기서 말하는 기생은 조선시대부터 전해내려왔던 전통적인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2] 정확히는 암묵적으로 접대부 아가씨들이나 사장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도 알아서 비밀을 유지해주는 것이다. 애초부터 고급 요릿집은 서로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려고 모이는 곳인데, 비밀을 유지해주지 않으면 과연 장사가 되겠는가? 그렇게 비밀 유지를 해주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망하게 되어있다. 물론 요릿집 가게 사장과 직원들이 이러한 비밀정보를 함부로 밖에 얘기하고 다니지 않았을뿐, 이러한 비밀정보를 잘 활용해서 유망한 주식 및 부동산, 사업에 투자해서 이익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3] 원곡에는 '대폿집에서'[4] 明月館紀念, 대한매일신보, 1908-09-18. 1909년에 세워졌다는 말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5] 현재 피커디리 극장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