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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04:59:25

학병

學兵

1. 개요2. 상세3. 출신 인물

1. 개요

1943년 이후에 일본 육군에 의해 징집, 또는 자원한 조선인 일본군을 포함한 일제 식민지의 학생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학도병이 올바른 표현이지만, 6.25 전쟁의 영향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학도병은 한국전에 참전한 소년병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고정된 편이다. 실제로, 일본에서 '학도병'이 아닌 '학병'이라는 단어를 쓰면 상대는 알아듣지 못한다. 조선인 뿐만이 아니라 대만, 오키나와에서도 강제징집하였다. 해당 제도의 세부내용은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를 확인할 것.

2. 상세


1938년부터 일본군은 인원이 부족하자 지원병제를 도입했다. 조선지원병은 당시 불경기라든가 공직 진출 등의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1944년까지 17,664명을 뽑았다. 1944년부터 징병제를 적용했는데 그 전인 1943년에 전문학교 등 고학력자들을 대상으로 학병을 뽑았다. 일본에 체류하던 조선인 유학생을 강제로 뽑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학병은 강제입대로 이뤄진 경우가 많았는데 육군 장교 자원으로 뽑아갔고 주로 소모품 소대장으로 쓰려고 했다. 훈련 중에 낙마한 이는 강제로 육군 으로 복무시켰다. 다만 가장 빠른 시기인 1944년 1월 20일에 학병으로 입대한 사람도 막 예비사관학교를 수료하면 1945년 8월이어서 견습사관 신분으로 패망을 맞이 하였다. 다만 일제는 1945년 9월 군대 해산하며 모든 견습사관들을 소위로 임관 시켜주었다.

이처럼 모집과정에서의 강제성 때문에 입대에 대한 회피와 저항이 있었다.
학도지원병의 경우에도 함경북도 청진 검사정의 보고에 의하면 지원자 256명 중 “자발적으로 지원하였다고 볼 수 있는 자는 도내 겨우 10명 내외에 불과하고, 다른 대부분은 모두 농후한 지도적 격려를 더하면서 결의 지원한 자”라고 하였고

ㅡ 高等法院檢事局, 「臨時陸軍特別支援兵の動向一斑」, 『朝鮮檢察要報』 1, 1944. 3, 2쪽.
교련 교관: "황국신민이라면 지원해!"

(마음속으로): "물론 아니지, 황국신민이 뭐야? 이 미친놈들아!"

교련 교관: (지원자가 없자 일본도를 빼들며)"지원하지 않는 자는 일본사람이 아니니까 내가 오늘 목을 잘라 버리겠다! 그런 놈은 죽여 버려야 해!"

ㅡ 학병, 손종영, 2008년, 60쪽.
일본은 계속해서 필리핀, 월남,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수마트라, 뉴기니아, 그리고 진주만 폭격으로 전쟁을 벌여 나갔는데 그래서 병력이 많이 소모되고 모자르게 되어 결국 대만과 한국을 황국신민화시키고 실업학교[1]를 많이 만들어서 한국인구 2천만에 2백만을, 대만인구 8백만에 1백만을 전쟁에 동원하자는 계획으로 지원병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한국에서도 태능에 지원병 훈련소를 만들어 징병제를 실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직전에 전문대학에 다니는 인문계통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라는 것이 생겼는데 말이 좋아 지원병이지 실제로는 강제징발을 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때 나도 강제지원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지원에 응하지 않으면 공민권 박탈은 물론이고 만주벽지 탄광에 노무자로 보내느니 식구들 사업도 방해하고 또 공무원도 못하게 되어 있어 마지못해 우리는 죽든지 살든지 지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6.25 전쟁 당시 25연대장, 김병휘 장군 인터뷰 중. 월간 군사세계.

첫번째 인용문에서 언급한 '농후한 지도적 격려'는 살벌하였다. 손종영이 다니던 경성고등상업학교의 경우 결국 조선인 20명을 모두 지원서를 쓰게 되었다. 눈앞에서 일본인 교련 교관이 일본도를 휘두르며 안쓰면 죽여버리겠다고 하는데 버틸 재간이 없던 것이다. 그래도 저자인 손종영은 시골로 도망갔는데 본인은 죽어도 상관없다는 태도였지만, 일본 경찰이 가족까지 압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경찰서에서 다시 한번 지원서를 쓰고 모두 다 함께 1944년 1월 20일에 끌려가게 되었다.

구체적인 저항도 있었는데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하준식(河俊植)이 학병 지원을 거부, 덕유산 은신골로 피신해 징용·징병 기피자 73명을 규합, 광명당(光明黨)을 조직해 후방 교란 게릴라전을 기도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런 저항적인 거부운동은 전국 주요 산악지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지리산·운문산·포천군 산악지대, 금강산 등은 이런 학병 거부자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학병에 강제지원하기 싫다고 에 들어간 사람들 얘기가 바로 여기서 유례한 것이다.
학도지원병은 말로만 지원병이었다. 이 (학도)'지원'병은 부모,형제,처자에 대한 위협과 공갈에 기초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경북 의성 출신 오탁근은 명치대학 재학 중이었는데, 대학 교련교관, 의성경찰, 헌병 등이 총동원되어 가족을 위협하고 협박했다. 조선-일본간의 연락선은 물론 철도의 승차권 역시 엄격하게 제한되어 학병 '지원' 여부를 검사했다. 가족들의 신변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학병들은 학병거부 및 도피를 택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215p)

학도지원병으로 끌려가기 싫어서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학병 해당자들은 여러 형태로 저항을 했다. 예를 들어 1943년 11월 이후 관공서를 습격, 파괴한 후 형사처벌을 받아 학병을 면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함남 북청 출신 이광림 등 학병 60명이 파출소를 습격하였고, 서재균 등은 재동파출소를 습격했으나 학도지원자라는 이유로 문책받지 않았다. 또한 서울에서는 경성제국대학이혁기, 보성전문이철승 등이 주동이 되어 학병 거부를 주도하며, 소기국소 총독과 학병문제로 담판을 지은 바 있다. (216p)

ㅡ 정병준 교수 저 '광복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이러한 강제성에도 불구하고 이와중에 학병으로 자원하는 것을 끝끝내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강제징용되어 철도공장이나 시멘트공장에서 노역을 하게 되었다. 계훈제, 최기일, 서명원, 황장엽이 이 케이스. 이들은 징용학도 혹은 응징학도로 불리기도 했다. 감히 신성한 황군에 지원을 하지 않아 천황의 은덕을 져버렸다는 이유로 사상범으로 간주되어 주로 사상세뇌교육도 많이 받는 등 여러모로 고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원래 강제징용되어 남양군도로 보내질 계획이었으나 그쪽에 주둔하고 있던 현지 일본군으로부터 어떻게 사상이 썩어빠진 조센징들을 우리한테 보낼 수 있냐고 반발이 있었던 덕분에(?) 남양군도가 아닌 국내의 공장으로 차출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대체로 한국어, 일본어, 영어가 가능한 대학물먹은 고급 인텔리들이었기때문에 현지 미군한테 붙을 위험도 크다고 간주하기도 했다고.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이들은 귀환하게 되는데 규모는 약 6천 명 수준이었다.

건군기에 장교 자원이었던 이들 약 90명이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조선경비대의 장교로 임관했다. 이들은 후에 한국군의 주축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학병출신들이 수적으로도 많았지만, 만주군,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나 중국군, 광복군 출신들이 각각 약점을 지녔기 때문이다.

먼저, 학병출신들은 만주군관학교나 일본 육사 출신들과 달리 강제로 군 경력을 쌓았다는 명분이 있어 친일 문제로부터 자유로워 전면으로 나설수 있었다. [2] 한편, 중국군, 광복군 출신들은 대체로 나이가 많고, 미군이 중국군, 광복군 출신들의 교육 경력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미군과 자주 충돌하여 미군의 절대적 영향을 받은 초기 한국군의 주력으로 성장하기가 힘들었다.[3][4]

즉, 학병 출신들은 만주군, 일본군 지원병 출신들과 달리 친일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우며, 나이가 어려 미군 고문관들과 잘 지냈기 때문에, 한국군내의 가장 주류세력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5]

일반적으로 이들을 일본에 의해 강제로 징집되어 끌려간 불행한 이들로 친일과 거리가 먼 희생양으로 생각하고 지원병 출신들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경우(사실 지원병들도 대다수는 일제의 강요로 억지로 지원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지원병 문서를 참고)가 많은데 일제강점기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다른 일면을 볼 수 있다.

학병은 전문학교, 대학 재학 이상의 고학력자들 위주였고 지원병은 기껏해야 소학교 졸업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자녀에게 그런 고등교육을 시킬수 있는 집안이 과연 가난한 집이었을까? 학병들은 다는 아니지만 대다수가 먹고 살만한 집안이었고 반대로 지원병은 8~9할이 소작농 자제였다. 그럼 다시 학병집안의 부는 어디서 나왔을까? 학병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그들의 선대들이 빈농을 착취해서 모은 부(富)를 바탕으로 고등교육을 받았다. 반대로 지원병들의 선대들은 착취당하던 사람들이었다.(김윤식, 일제말기 한국인 학병세대의 체험적 글쓰기론)

이들 '학병 세대'가 자신의 체험과 생각을 담아서 쓴 글들은 광복 이후 오랫동안 하나의 문학 장르가 될 정도로 널리 퍼졌다.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고뇌, 선택받은 최고 엘리트 특권층이란 위치에서 비롯하는 자괴감, 그리고 해방 이전과 이후의 격동하는 현대사를 직접 맞닥뜨린 경험 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작가 이병주, 영문학자 이가형이 이런 학병 세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3. 출신 인물

해방 이후 국군에 복무한 사람은 볼드체로 기술.

[1] 구제전문학교는 국내에서도 남아있다. 부산고등수산학교(현 부경대), 수원고등농업학교(서울대 농과대), 대구농업전문학교(경북대 농과대), 경성약학전문학교(서울대 약학대),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 의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서울대 치대),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 통합),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광산전문학교(서울대 공과대학), 평양공업전문학교등이 당시 일제가 만든 전문학교들.[2] 장창국의 육사졸업생들 참조. 장창국조차 일제 패망 후 일본육사에서 받은 일본도친일파로 몰릴까 돌아오는 귀국길에 바다에 버렸다.[3] 김홍일이 대표적인 예[4] 다만 학병과 광복군 경험을 둘 다 가진 장준하는 예외적인 케이스이긴 했다. 광복군 시절에도 미국 OSS로부터 훈련을 받기도 했고, 해방 후에는 군인이 되진 않았지만 대신에 잡지 사상계를 발간할 때 주한미국공보원으로부터 지원을 많이 받았다.[5] 1960~70년대의 육군참모총장 11명 중 무려 7명이 학병 출신자이고 합참의장과 한미연합사부사령관 역임자까지 추가하면 11명이나 된다. 1950년대 일본 육사 졸업 세대와 1980년대 정규 육사 졸업 세대이자 하나회의 중간 세대라고 생각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