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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3:27:53

박의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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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고려인 출신으로 내각 부수상 등을 역임했으나 1958년에 숙청된다.

2. 생애

1911년 9월 19일, 식민지 조선에서 출생했으나 온 가족이 러시아 제국으로 이주하면서 고려인이 되었다. 이름 의완은 러시아어 이반에서 바꾼 것이라는 말도 있고, 원래 이름이 의완인데 비슷한 이름인 이반을 러시아 이름으로 택했다는 말도 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청년동맹 비서로 근무하다가 철도대학을 졸업하였고 고려인 알렉산드라 리와 결혼했다. 1937년 6월 22일, 아들 박유리가 태어났고, 1938년에 알렉산드라가 사망했다. 고려인 강제이주가 시작되자 박의완은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되었고 타슈켄트주 양기율시의 고리키 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하다가 교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나탈리야 고르바토와라는 러시아 여성과 재혼했다. 이후 전연방공산당 구위원회 서기로 이임하여 양기율시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고 한다. 1945년 시점에서 양기율시 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까지 승진했다.

그러다가 일제가 패망하면서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한으로 보내졌다. 1945년 12월, 허가이, 방학세, 김찬, 기석복 등과 함께 도착한 그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철도국 부국장에 임명되었고 1947년에 가족들까지 모두 북한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나탈리야와 이혼하고 고려인인 평양 6학교 교장 율리야나 곽과 결혼한다.

1948년 9월, 초대 내각이 출범함에 따라 교통성 부상에 임명되었고 초대 교통상 주녕하가 소련대사로 이임함에 따라 교통상 대리를 지내다 1950년 7월 1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교통상에 임명되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 1951년 8월, 허헌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1년 말, 교통성이 철도성으로 개편된 후 철도상에 임명되었다. 1953년 7월, 김회일에게 철도상을 물려주었으나 7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으로 선출되어 권력의 중핵으로 진입한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6.25 전쟁 중의 공을 인정받아 로력훈장을 받았다. 김일성이 전후복구 3개년 계획을 추진함에 따라 1954년 3월 전원회의에서 경공업상을 겸하게 되었다. 하지만 박의완은 김일성과 박창옥이 지나치게 의욕적으로 공업화를 추진하느라 비현실적 지표를 남발하는 것을 보고 우려를 가지게 되었으나 당연히 김일성은 듣지 않았고 1955년에 대기근이 찾아오게 된다.

1954년 11월 전원회의의 결정에 따라 1955년 1월 2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경공업상을 리종옥에게 물려주고 건설상으로 조동된 김승화의 뒤를 이어 국가건설위원장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박의완에겐 여러모로 안좋은 상황들이 벌어지게 되는데 북한 사회와 동화되려고 하지 않고 경제적 특별대우를 받는 소련계에 대한 북한 내부의 불만이 고조되는 한편, 소련의 간섭을 상쇄하고 소련계의 비판을 제압하기 위해 김일성이 대대적인 반 소련계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박의완은 직접적 비판은 받지 않았으나 좌불안석이 되었다. 김창만은 그를 이반이라고 부르면서 노골적으로 조롱하기도 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된다. 소련 대표단장으로 참석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의 방문을 수행하였다. 김일성은 박창옥과 박영빈의 숙청에 대해 언급하며 박의완을 가스라이팅했다. 이 때문인지 박의완은 북한 내부의 심각한 상황을 목도하고 소련 대사관 쪽에 매우 비판적인 의식을 드러냈지만 최창익, 윤공흠, 리필규, 박창옥 등이 주도한 8월 종파사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이는 김일성이 박의완에게 '더러운 사업'에 말려들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경고한 것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김일성에게 정면으로 대들지는 않아서 일단은 생존한다. 하지만 박의완은 1956년 9월 전원회의에서 최창익, 박창옥 등을 복당하라는 소련과 중국의 요구가 매우 옳은 말이라면서 실수를 한 당원과 적을 구분해야 발언함으로 무덤을 파고 만다. 위험함을 눈치챈 박의완은 소련 귀국을 타진했으나 신임 소련대사 알렉산드르 푸자노프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될 즈음에는 박의완을 부수상에서 해임해야 한다는 얘기도 제기되었으나 일단은 생존하여 부수상 겸 국가건설위원장에 유임, 김두봉과 함께 대의원에도 선출되었다.. 하지만 1957년 10월 전원회의에서 박의완은 극심한 비판을 받았고 12월 전원회의와 평양시 열성자회의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게 된다. 이후 1956년 12월 전원회의의 결정에 따라 임업부문의 중앙당지도를 맡았다.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가 개최되자 그는 맹렬한 공격을 받고 김두봉, 오기섭과 함께 출당조치되었다. 그는 한번만 더 기회를 주면 열심히 일하겠다고 용서를 빌었으나 표리부동한 자라고 사방에서 비웃음과 공격을 당했고, 자기 비판을 잘 하지 않는다고도 공격당했다. 대표자회가 끝난 후 1958년 3월 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부수상에서 해임, 리주연에게 자리를 내주었는데 섬뜩하게도 로동신문은 그에게 의례적인 호칭인 동지를 붙이지 않고 그저 박의완이라고만 보도했다. 이후 투옥되어 극심한 구문을 받고 갈비뼈가 4대나 부러졌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남은 가족들은 소련으로 출국했다. 박의완은 일시적으로 가구공장 지배인으로 하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으나 나중에 공개된 소련 문서에서 1960년 1월, 서철, 김익선, 리송운, 김경석 등이 주재한 비밀재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음이 드러났다. 소련에 남은 유족들은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소련 정부에도 탄원하였으나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1992년에야 박의완의 죽음을 북한으로부터 확인받았다. 공식적인 사망 날짜는 1960년 3월 25일이며 사인은 심장마비다.

김정은 시대에서는 반당반혁명종파분자 소리까지는 아니지만 사대주의자, 기술신비주의자라고 평양속도를 무시한 멍청한 인간으로 디스당하고 있다. 김정은 시대에 나온 소개편집물 <기적의 45일>에서 박헌영, 리승엽의 졸개로 비난당하는 것을 봐서 복권은 요원해보인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