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08 14:15:50

박영빈(1907)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소련공산당의 지시를 받고 북한에 들어온 고려인으로 소군정 시기부터 북한 정권 수립 초기까지 소련파의 주요 인물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김일성에게 충성하면서 소련파의 수장이었던 허가이를 실각시키는데 큰 공헌을 세웠고, 이후 별 탈 없이 지내다가 소련으로 귀국하였다.

2. 생애

1907년 7월 31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중국을 거쳐 넘어온 양반 가문의 서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인민학교 교원을 하였으나 교원 월급이 너무 적어 고생을 하게 되자 다시 이주하여 농민이 되었다. 조선에 있을때 서자로서 괄시당한 것, 그리고 교원으로 고생한 것 때문에 그는 아들 박영빈에게 한때 공부를 금지할 정도라서 박영빈은 14살이 되어서야 인민학교에 입학했다. 늦게 입학한 박영빈은 열심히 공부하여 5년 과정을 1년 반만에 최우등으로 마쳤고 1924년에 초중에 입학, 1926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소왕령에 있는 러시아 사전에 있는 한인학부에 입학하여 1929년에 우등으로 졸업했다.

사전 졸업 이후 박영빈은 처음에 소련북사할린으로 이주하여 교원생활을 하였다가 열성적인 교육활동의 공을 인정받아 1931년에 레닌그라드 국립사범대학교 진학 자격을 얻게 되었다. 처음에 역사-철학부에 진학하였다가 이후 수학-물리학부로 전과하였다. 거기서도 성적이 좋아 학부당위원장, 대학 당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청년회 사업, 직맹 사업을 조직지도하였다, 레닌그라드 사범대 재직 중 박영빈은 동양인민회관 산하의 고려인 향토협회를 방문했으나 폐허나 다름없다는걸 알고 레닌그라드 인민위원회에서 일하던 한명제의 허락을 받아 자신이 처음부터 이를 새로 조직했다.

1936년 레닌그라드 사범대 졸업 이후 레닌그라드 사범대 연구원에 배치되었다가 연해주 지역에 뛰어난 자질을 가진 교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인민교육위원 안드레이 부브노프의 지시에 따라 소왕령 한인전문학교의 수학교원으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가 연해주에 배치된 직후 대숙청이 시작되면서 박영빈은 레닌그라드에서 신분을 숨기고 달아난 반동분자가 아닌가 의심을 받아 취조를 받게 된다. 다행히 올긴구역에서 협동조합 위원장을 맡고 있는 친형의 보증으로 신분이 밝혀지면서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지만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에 휘말려 카자흐스탄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사범전문학교에 배치되어 1940년까지 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941년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하였고 2년간 고중 수학교원으로 일했다. 1942년, 교육부의 지시로 타슈켄트주의 빠빠린 조합으로 이주, 그곳의 한인 고중의 교무주임 겸 수학교원으로 일하다가 1943년에는 교장으로 승진했다.그러다가 1945년 10월 타슈켄트주 군사동원부의 명령을 받고 북한에 파견되어 소군정에 배치, 북한의 토지개혁을 지휘하였다. 1946년이 되자 고급지도 간부학교 조직을 맡게 되었고 테렌티 시티코프 대장의 보좌관으로 미소 공동위원회에도 참가하였다. 이후 1949년까지 내각 간부학교에서 일하다가 1950년 말에 중앙위원회 조직부 부부장으로 승진하여 당의 조직사업을 맡게 됐다. 또한 1950년 12월 11일, 교육성 부상 남일이 인민군 총참모장으로 보임함에 따라 박영빈이 교육성 부상에 임명되었다. 1951년 허가이김일성과 충돌하였을때 박창옥, 박정애, 박금철과 함께 그를 맹렬히 비판하여 실각시켰고 이 때문에 김일성을 모시는 4명의 박가라는 뜻의 사박가, 즉 러시아어 사바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허가이가 실각한 이후 그가 가지고 있던 조직지도부장 자리를 차지했으며 박헌영과 남로당 숙청에도 매우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등 김일성 권력 강화에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7월에 허가이가 의문스러운 자살을 한 이후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953년 8월, 조선로동당 2기 6중전회가 개최되었다. 박영빈은 새로 설치된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953년 12월 전원회의에서 박금철과 함께 정치위원으로 충원되었다. 1954년 11월 전원회의에서 박금철에게 조직지도부장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이후 선전선동부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잘 나가던 소련파는 1954~1955년 대기근 이후 김일성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대대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다. 박영빈은 박창옥과 함께 김일성의 개인숭배가 지나치다고 비판했으며 김일성이 자신의 최측근 최용건을 수상으로 임명하는 것이 어떻냐고 제안했을때 이를 반대했다. 이에 김일성은 1955년 11월 전원회의에서 흐루쇼프의 평화공존론을 언급한 박영빈을 조국의 분열을 정당화하고 영구화하려는 대단히 위험한 생각을 가졌다고 비판했다. 이후 1955년 12월 전원회의에서 박영빈은 흐루쇼프의 평화공존정책을 옹호하였다는 이유로 김일성의 혹독한 비판을 받고 해임되어 리일경에게 선전선동부장 자리를 내주었다.

1956년 1월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박영빈은 박창옥 등과 함께 문예사업을 잘못했다고 매우 혹독하게 비판을 받고 기석복과 함께 당중앙위원회 위원에서 제명되어 상업성의 대내외 부상으로 좌천되었다. 박영빈은 이에 대해서 자신이 최용건 수상 임명에 대해서 반대했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어쨌거나 건강이 심각하게 나빴던 그는 종파주의자 혐의를 제외한 자신의 잘못을 열거한 목록을 가져와서 매우 혹독하게 자신을 자아비판했는데 김일성은 이에 대해서 크게 흡족해하면서 그가 자아비판을 잘했다고 칭찬했다. 이후 4월에 열린 3차 당대회에서도 중앙위원회에서 탈락하는 등 확실하게 몰락하고 만다. 하지만 김일성은 소련파 비판이 너무 지나치다고 연안계를 토사구팽하여 숙청하였고 박영빈을 위로했는데 이 때문인지 박영빈은 반 김일성 움직임에 가담하지 않았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에서 옛 동지들 상당수가 참가했다가 숙청됐지만 박영빈은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고 1958년 11월에 무역성 부상에 임명되어 묵묵히 일을 했다. 1958년 3월 김일성은 '당 사업을 개선할 데 대하여' 라는 연설을 통해서 박영빈이 조직지도부장 직함을 가지고 사업하면서 사람들을 방조하지 않고 무슨 양복 몇벌 맞췄는지까지 엄히 조사해서 조지다보니 군중과 당을 분리시켰다고 비판했다. 다만 박영빈은 반동 취급은 아니라서 그래도 박영빈 동무라고 연설에서 나름 좋게 표현했다. 그러다가 1960년에 이르러 위장병이 크게 악화되면서 북한 생활을 포기하게 되고 귀국 청원을 제출하게 된다. 소련과 북한이 모두 이를 비준하면서 박영빈은 1961년 3월 모스크바를 거쳐 친척들이 사는 타슈켄트로 돌아갔다. 이후 6개월 정도 요양을 한 이후 상업성 산하 타슈켄트시 식료품 관리국 식료품 관리기업소 책임자로 배치되었다. 1965년까지 일한 후 은퇴하여 연금을 받으며 생활했다.

북한에선 김일성에게 개긴 적이 없는 박영빈은 이쁘게 봐주었는지 1990년 2월, 북한 대사관 1등 서기관을 파견하여 그를 위문한 후 평양으로 초청하였다. 무려 30년 만에 북한을 방문한 박영빈은 청진에서 김일성과 재회했고 김일성은 나는 너희들이 소련에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후 북한에서 1개월 간 요양을 한후 귀국했는데, 이후로도 자주 북한의 초청을 받았으나 김일성이 죽은 이후 1997년부터는 북한에서 잘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1996년에 아내 박마리야를 잃고 손자들을 돌보다가 1998년 5월 17일에 사망하였다.

3. 여담

그가 주목을 못받아서 그렇지 북한을 떠난 고위 인물들 중에서 황장엽을 뛰어넘고도 남는 역대 최고위급 인사다. 최고 지도기관인 정치위원회 위원[1]에 조직부장[2], 선전선동부장 등 여러 주요 요직을 역임했던 역대 정치국 위원들 중에서 북한 바깥에서 생을 마친 인물은 지금까지도 박영빈 외에 아무도 없다. 다른 고위 인물들과 달리 말년에 김일성과 화해해서 북한도 자주 오가고 하는 바람에 남한 학자나 언론인들과 별로 접촉을 못한 것이 그에 대해서 알려지지 못한 원인 중 하나일듯. 한국과 러시아의 많은 언론인과 학자들이 박영빈과의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일절 거절하였으며, 다만 1953년 남로당 숙청에 대해선 그들은 죄가 있어서 숙청되었다고 짤막한 코멘트를 남겼다.

4. 참고문헌


[1] 현재는 정치국 위원[2] 현재는 조직지도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