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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전 정무원 부총리. 무역 부문의 테크노크라트였다.2. 생애
1927년 12월 19일 경기도 개성군에서 태어났다. 개성상업학교 졸업 후 니혼대학으로 유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광복 후 좌익활동을 하면서 정계와 연이 닿게 되었다.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과에 다시 입학하여 졸업한 후 1954년 인민경제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교편을 잡았다가 1958년 대외경제총국 2부장에 임명됨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1963년 부총국장, 1964년 총국장으로 승진하였으며 1966년 조선설비수입상사 사장, 1966년 석탄공업성 부상, 1967년 대외경제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71년 6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전임 대외경제위원장 김경련이 재정상으로 이동함에 따라 후임 대외경제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쿠바로 파견되어 쿠바 국가통계국 고문을 맡기도 했다고 하며 이 인연인지 1972년 북한-쿠바 단결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자 최고인민회의 5기 대의원으로 선출되는 한편, 대외경제사업부장에 임명되었고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1974년 정무원 사무장을 거쳐 1975년 정무원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1976년 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었으며 3월에 남일 장의위원, 5월에 홍원길 장의위원, 9월에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7년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부총리 겸 대외경제사업부장으로 재선출되었다. 1978년 즈음에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었음, 1980년 10월, 6차 당대회가 개최되자 정치국 후보위원에 재선되었으며 12월에 전해에 교통사고로 사망한 로태석 국가계획위원장의 뒤를 이어 국가계획위원장을 겸하게 되었다. 19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7기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부총리 겸 무역위원장에 임명,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4월에 최현 장의위원을,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4년 3월에는 김일 장의위원, 4월에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80년대 북한의 경제가 영 좋지 않게 되면서 1985년 10월 1일, 정치국-중앙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부총리 및 무역상에서 해임되어 인민봉사위원장직만 남기게 되었고 1986년 2월 조선로동당 6기 11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해임되었다. 김정일은 소련 대사와의 면담에서 공진태의 해임이 공진태가 불법적으로 자원을 서방에 수출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공진태는 정치국 회의에서 극심한 비판을 받고 구습에 물든 인물로 지목당했으며 정치국 후보위원의 직무도 정지당했다. 이에 공진태는 외화를 많이 벌어 바치고 싶었다고 자아비판했다고 전해진다. 한다. 86년에 8기 대의원, 90년에 9기 대의원에 재선출된 후 1994년 1월 8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정무원 경제부총리에 다시 임명되었다. 이후 일부 외교 활동 및 1994년 7월, 김일성과 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낸 것 외에는 특별한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1998년 8월 29일, 청년절 참석을 마지막으로 공개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그해 9월, 헌법 개정으로 정무원이 폐지되면서 정무원 부총리 겸 인민봉사위원장에서 자동적으로 물러났다. 다만 10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직이었다. 다만 중앙위원회 위원 직위는 그가 죽은 후인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에서야 중앙위원회 조직개편이 있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유지하였다.
이후 은퇴하여 조용하게 살다가 2009년 8월 사망했다. 8월 19일, 김정일이 애도를 표하며 화환을 보내주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볼때 8월 18일 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부고 발표는 없었으며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인 전 정무원 부총리 공진태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하여 19일 고인의 령전에 화환을 보내시였다"라는 아주 짤막한 보도만 있었다.
3. 참고문헌
- 강석승, 이달의 인물초점: 부총리 겸 인민봉사위원장 공진태, 북한 (1996.12)
- 통일부 정보분석국, 2005 북한의 주요인물, 통일부(서울: 통일부,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