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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테크노크라트. 김일성 말기에 크게 주목받은 경제 엘리트지만 김일성이 채 죽기도 전에 몰락했다.2. 생애
1941년 평남 강서군에서 출생했다. 해방 이전에는 청진에서 유랑생활을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 김일성의 외가쪽 5촌 조카인 강관주의 여동생 강관숙과 결혼하였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김일성 일가에 포함된다.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이후 주로 소련, 동독, 체코로 유학가는 북한 엘리트들 중에서는 특이하게 알바니아로 유학했다. 귀국 후 1963년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을 지냈다.1977년 11월 과학원 부원장을 지냈으며 1980년 정무원 참사실 실장, 1982년에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86년에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1987년 3월 19일, 김환의 뒤를 이어 정무원 화학 및 경공업위원장에 임명되면서 중용되기 시작했고 1988년 2월 1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화학 및 경공업위원장에서 해임되어 홍성남의 뒤를 이어 국가계획위원장으로 이동했다.[1] 1988년 6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국가계획위원장에서 대외경제위원장으로 이임했으며 1988년 10월 7일에는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최정근의 뒤를 이어 정무원 무역부장을 겸하게 되었다. 정무원에서 자리가 높아짐에 따라 1988년 3월, 조선로동당 6기 13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정무원 부총리에 선출되었다. 1991년 6월, 연형묵과 함께 태국을 순방하였다.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고 3월에 이집트, 6월에 리비아를 순방하였다. 귀국 후 미국 및 일본의 여러 언론사와 인터뷰를 가졌으며 7월에는 무려 열흘이나 서울을 방문하여 남한에 상당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이때 노태우 대통령과 접견하였다. 당시 북한의 어려운 사정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토로하는 등 노태우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남한 측으로부터 말이 통하는 인물로 평가받았지만 이것이 나중에 숙청 사유가 된 것으로 보인다. 12월에는 이란을 방문하는 등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남한에서는 북한의 온건개혁세력으로 평가받았다.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2년 4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12월 10일 조선로동당 6기 20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보선, 12월 1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대외경제위원장에서 해임되어 최영림의 뒤를 이어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대외경제위원장 자리는 리성대가 물려받았다. 12월 11일 최고인민회의 9기 4차 회의는 이를 추인하였다. 이후 1993년 5월 군민다리 준공식, 9월 자재공급 일군대회에 참석하는 등 여러 활동을 보였으며 주민생활 향상과 경제혁신 실현이 자재공급 분야의 당면과제라고 강조하였다. 이어 가격일군대회도 참석하였다.
하지만 1993년 12월 7일, 3차 7개년 계획의 실패의 희생양으로 찍히는 바람에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을 통해 직무 이동을 구실로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에 해임되고 홍석형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소문에 의하면, 흥남비료공장의 현대화를 위해 북한에서 압축식 터빈기 자체제작이 가능한지를 검토했다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솔직하게 결론내렸지만, 김달현을 미워하던 김정일이 이걸 트집잡아서 간부강연회에서 그를 조리돌렸다고 한다. 강명도의 주장에 따르면, 신임 대외경제위원장 자리를 두고 김달현은 리성대를 지지했는데, 최정근을 지지한 김국태가 이에 반발하여 김달현을 몰락시켰다고 한다. 1993년 12월, 6기 21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해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2.8 비날론 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강등당하였는데,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6년 2월, 리승기 장의위원 등을 지낸 것 외에는 별 다른 소식이 없었으며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에 탈락하는 등 김정일에게 찍혔음이 확실시되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계속 이름이 오르내려서 1990년대 후반에 강성산의 후임 총리로 발탁되었다는 보도가 수차례 나온 바가 있다.
이후 소식은 없으나 2000년 경에 김정일이 김달현을 미워하여 그를 확실히 조지기 위해 연형묵을 검열단장으로 하여 2.8 비날론 연합기업소를 검열하게 하자 사무실에서 넥타이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풍문이 전해졌다. 이 풍문에 따르면 김정일은 김달현이 목숨을 끊자 그 처자식에게 죄를 물어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버렸다 카더라. 하지만 이런 류의 풍문들을 보면 김일성은 어떻게든 나라 살리려고 했는데 사치에 물든 수꼴 김정일이 일방적으로 패악을 부려 망했다는 내러티브라서 신빙성이 높진 않다. 확실한 것은 김달현이 김정일과 사이가 좋지는 않아 보인다는 것 정도. 통일부 자료에서도 2000년 정도까진 2.8 비날론 연합기업소 지배인이었던 것이 확인되는데 그 이후에는 동정이 확인되지 않아 2000년 즈음에 죽었을 수도 있다. 태영호는 김달현이 지방에서 울화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국정원의 보고에 따르면 2000년 즈음에 북한 안에서도 김달현이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하며 장진성의 주장에 따르면 김정일이 나중에 김달현이 옳았다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믿거나 말거나....
3. 여담
-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을 지낸 김달현과는 동명이인이다. 이 김달현도 천도교청우당을 조지는 과정에서 숙청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젠 복권이 되었는지 다시 북한 매체에 김일성을 잘 모신 인물로 언급이 되고 있다.
- 참고로 2004년에 갑자기 우리나라에서 다시 이름이 오르내린 적이 있다. 당시 송두율 교수가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40대에 정치국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가 아닌가를 따져보는 과정에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던 김달현의 이름이 국내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
- 1992년 남포공단 사업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 대표로 남한을 방문하여 대우, 포항제철, 삼성전자 등의 여러 생산 시설 12곳을 시찰하고, 잠실에 있는 롯데월드를 구경하고 돌아갔다. 당시 한 여름이었는데 롯데월드의 아이스 스케이트장에서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타며 노는 것을 보고 전 대우그룹 이사 김경연에게 '동원하는데 몇시간이 걸렸느냐?'고 질문했다고 한다. 이에 '보여주기식 가짜 동원'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동원한 것이 아니라 다 자발적으로 나온 사람들이며 많이 보고 가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2]
4.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통일부 정보분석국, 북한의 주요 인물 자료집 2000(서울: 통일부,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