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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오극렬 吳克烈 | O Kuk Ryol | |
출생 | 1930년 1월 7일 |
중화민국 국민정부 지린성 | |
사망 | 2023년 2월 9일 (향년 93세) |
평양시 | |
국적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김일성종합대학 (학사) 프룬제군사대학 (학사) |
계급 | 대장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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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군인, 정치인.2. 생애
중국 지린성에서 김일성의 측근 중 한 사람인 오중성[1]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복 후 가족들과 북한으로 돌아와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했고, 한국 전쟁 시기에는 조선인민군 공군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전후에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뒤 1962년에 소련의 프룬제 군사대학에서 2년 동안 유학했다.귀국 후에는 공군 소장으로 진급해 장성이 되었으며, 동시에 김책공군대학 학장으로 부임했다. 3년 뒤인 1967년에는 중장으로 한 계급 더 올라 조선인민군 공군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을 거쳐 제1부총참모장 겸 작전국장, 1979년에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 되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대회 집행부에 선출, 정치국 위원 및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됨으로 정권의 핵심부에 진입하였다. 오극렬의 이러한 급속도의 성장은 김일성의 후계자 김정일과의 각별한 친분이 있어 가능했는데, 이미 1960년대부터 오극렬은 김정일과 친하게 지냈으며, 오극렬의 딸 오영희의 대학동창이며 최룡해 집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장진성은 오극렬이 아예 김정일, 최룡해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나중에 김정일이 집권하면 김정일이 국가주석, 최룡해가 당제1비서, 오극렬이 인민무력부장을 하기로 결의했다고 주장했다. 어쨌거나 김정일은 그를 오진우, 장성우, 김영춘, 김하규, 김광진, 김창선 등과 함께 총애하면서 특별히 216 벤츠를 하사할 정도였다. 1970년대 김동규 사건 이후 군 숙청을 주도한 것도 그였다고 한다.
김정일의 총애에 힘입은 그는 1980년 상장으로 진급했으며,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4년 3월에는 김일 장의위원, 4월에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5년 4월 1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백학림, 김두남, 리을설, 주도일, 김봉률, 김광진, 리두익과 함께 대장으로 진급, 1987년 8월, 박영순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총참모장 재임 시절 소련 유학 경험 때문에 신무기 도입에 적극적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1983년 4월, 군사훈련 현지지도를 나온 김정일을 수행하는 오극렬 |
하지만 이 시점에서 오극렬은 인민무력부장인 오진우와의 갈등이 심각해진 상황이었다. 오진우는 대가리에 피도 안마른 것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 든다고 이를 갈았고, 1985년 8월에는 소련군사대표단의 방북 준비 행사장에 나와본 오진우가 오극렬이 행사준비를 하는 것을 보더니 "야! 인민무력부에 주인이 몇이야!"라고 고함을 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진우는 군부의 수장으로 사실상 북한의 3인자였고 오진우 역시 김정일과 관계가 친밀해서 김정일은 오진우를 다짜고짜 찍어낼 수는 없었다. 1987년 오진우가 교통사고가 나서 중태에 빠졌을때 오극렬이 인민무력부장 겸 총정치국장 대행으로 인민무력부를 장악하려 했으나 오진우가 금방 회복해서 돌아오면서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1988년 초반에 정치군인들과 야전군인들의 알력이 수면 위로 올라가는 것에 대해서 오극렬 등이 포착하고 정치위원 제도가 야전 사령관들의 지휘권을 지나치게 제한한다고 생각했는지, 김정일에게 이 제도를 폐지 혹은 약화시킬 것에 대해서 제안한 일이 있었다. 최주활의 증언에 따르면 역시 김정일의 측근인 인민무력부 부부장 박중국 상장이 김정일 연회에 참석하여 술이 취해서 군사지휘관들과 정치일군들 사이의 갈등이 심각하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김정일이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군정 배합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줄로 아는데?"라고 물었고 정치위원 문제에 대해서 박중국 등이 얘기하자 이를 김일성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노발대발하여 박중국은 장평산같은 놈이라고 욕을 되알지게 퍼부으면서 사상검토를 명령했다. 박중국은 군벌관료주의자로 몰려서 엄청나게 조리돌림을 당했으나 김정일의 총애를 받는 관계로 쿠바 대사로 조동되는 것으로 마무리지어졌으나 그 여파는 오극렬에게로 미쳤다.
우선 자리를 털고 일어난 오진우가 김일성에게 오극렬이 군에서 당의 힘을 약화시키고 정치기관과 보위기관의 역할을 억제했으며, 조선인민군을 소련군대의 부속품으로 만들려 했다고 강하게 비판했고 김일성이 또 길길이 날뛰면서 결국 오극렬은 총참모장 및 정치국 위원에서 해임되어 김일성 고급당학교 6개월 연수형을 받는 수모를 겪게 되었고 오극렬의 후임으로 1988년 2월, 빨치산 1세대인 최광이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그와 함께 김영춘, 장성우, 리동춘, 전영수 등도 줄줄이 경질되었다. 고급당학교 연수가 끝난 다음 오극렬은 당중앙위원회 민방위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90년대 초에는 림호군의 후임으로 대남 공작기구인 당중앙위원회 작전부장으로 조동되어 거기서 자신의 독립왕국을 만들고 세도를 부렸다.# 1992년 4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렇듯 어느 정도 예우는 받았는데 김일성의 노여움을 산 여파 때문인지 건강 문제 때문인지는 몰라도 김정일을 둘러싼 조명록, 김영춘, 김일철 등이 승승장구할 동안 자기 혼자 대장에 머물렀으며, 국방위원회에도 선거되지 못하는 등 존재감은 과거에 비해서 상당히 떨어졌다. 최주활, 강명도 등의 증언에 따르면 탈냉전시기 김정일의 의심이 극도에 달하면서 소련 유학파인 오극렬도 의심의 대상이 되어 한동안 밀려났다고 한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작전부장으로 재임하면서 슈퍼노트 제작을 책임졌다는 보도도 있다. 2003년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2008년 10월, 박성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러다가 그가 담당하고 있던 작전부가 정찰총국에 통합됨에 따라 2009년 2월 20일, 국방위원회 및 중앙군사위원회 결정에 따라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2009년 4월,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재선되었다. 2010년 4월, 김중린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는데 정치국에서 탈락한 것을 두고 3대 세습에 반대한 것이 아니냐는 보도도 나왔지만은 정말로 반대했다면 당중앙위원회 위원은 언감생심이고 뼈와 살이 분리되어야 정상이고, 김정은 집권 후에 승진한 걸 보면 오보로 보는 것이 맞다.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 2011년 12월, 김정일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12년 4월, 4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2012년 3월 8일에 국제 여성의 날 기념으로 평양대극장에서 개최된 은하수관현악단 음악회에서는 다른 주요 인사들처럼 무대로 불려나와 가족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는데, 부축을 받으며 나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건강은 별로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뒤로도 빈도 수는 최룡해나 김정각, 현영철 등 여타 군 최고위 장성들 만큼은 못하지만 계속 김일성/김정일 동상 제막식이나 정치 집회, 군 관련 행사, 예술 공연 등에 꼬박꼬박 얼굴을 내밀고 있다. 2013년 12월, 김국태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3년 12월 장성택이 처형당하고 그 수하들도 줄숙청을 당한 여러 경제기관의 빈 자리를 오극렬 일파가 빼앗으면서 다시 권력 전면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장진성도 오극렬이 조연준과 함께 김정은을 조종하는 실세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미 오극렬의 나이가 80이 넘은 고령인데다가 김정은이 지도부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신인들로 갈아치우고 있던 것을 보면 결국 희떠운 소리로 남았다. 치매설, 몰락설이 있었으나 말년까지 정정한 모습을 보인 점에서 치매설은 사실이 아니며, 몰락설도 나이도 많아지고 구시대의 인물인 그가 자연스럽게 물러나는 것을 두고 과잉해석한 것이다. 2014년 7월, 전병호 장의위원, 2015년 11월, 리을설 장의위원, 2015년 12월, 김양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으나 정치국에선 탈락했다. 2016년 5월, 강석주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16년 6월, 최고인민회의 13기 4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가 국무위원회로 대체되면서 국방위원회에서 물러나 완전히 은퇴하게 되었다. 2018년 9.9절 열병식에서, 육군 대장 예복을 착용한 채 모습을 보였다. 직위를 맡고 있는 대장, 상장들과 달리 계급만 유지한 軍원로석에서 리용무, 김정각 차수와 함께 열병식을 관람하였다.2021년 7월에 열린 7차 로병대회에서 초대받아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로 치매가 왔는지 김정은도 못알아보고 맛이 간 현철해와는 달리 정신은 온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육체적 건강은 나이가 나이인지라 영 별로인지 휠체어를 타고 이동했으며 김정은에게 박수를 칠 때도 웬만해선 앉아서 치는 등 많이 늙은 것이 보인다.
2023년 2월 9일 09시, 급성심장부전으로 사망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기사(연합뉴스) 김정은이 화환을 보내주는 한편, 로동신문 3면에 부고가 게재되었으며, 당중앙위원회와 국무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오극렬동지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충직한 혁명전사이며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크나큰 믿음속에 우리 당과 국가의 강화발전과 나라의 방위력을 튼튼히 다지는 성업에 헌신하여온 로혁명가이다. 일제식민지통치시기 혁명가의 가정에서 태여나 이국땅에서 갖은 박해와 천대를 받으며 살아오던 오극렬동지는 해방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품에 안겨 만경대혁명학원에서 혁명의 피줄기를 꿋꿋이 이어갈 핵심골간으로 성장하였다. 동지는 조국해방전쟁시기 유능한 공군지휘관으로서 미제의 공중비적들을 격멸소탕하며 영웅적조선인민군의 불굴의 기개와 용맹을 남김없이 떨치고 전쟁의 승리를 안아오는데 공헌하였다. (...) 동지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우리 당의 위업에 충실하였으며 투철한 혁명적원칙성과 고지식하고 성실한 품성으로 하여 우리 인민들과 인민군장병들의 존경을 받았다. 우리 혁명의 제1세대 충신의 후손답게 수령에 대한 티없이 맑고 깨끗한 충성심을 지니고 한생토록 변치 않는 신념과 량심으로 주체혁명위업을 받들어 우리 국가, 우리 군대의 장성과 인민의 복리증진에 이바지하는 일들을 많이 해놓은 오극렬동지의 특출한 공적으로 하여 우리 당이 내세워준 혁명적이며 애국적인 일가의 이름이 더욱 빛나게 되였다. 오극렬동지는 비록 서거하였으나 당과 혁명을 위하여, 강대한 사회주의국가건설위업을 위하여 바친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공적은 길이 남아있을것이다."라고 후히 칭송했으나 사망 전 날 열린 열병식으로 돈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지 국장은 따로 거행하지 않았다. 영정사진도 공개되었는데, 리즈시절에 비해서 엄청나게 얼굴이 푹 퍼져서 상단의 공식 프사에 비하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또 군복차림의 영정이 공개되었으나 말년의 오극렬의 얼굴에 합성한 티가 역력하다.
3. 수훈 목록
4. 가족관계
가족관계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유언비어와 풍문이 도는 인물이다. 2004년 쯤에 외아들인 오세욱이 탈북에 성공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 염기순 아들 망명설에 대해서 조선중앙통신이 모략이라고 개거품을 물고 날뛴 것과 달리 북한은 이 주장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고 누구도 망명 사실에 대해서 진위여부를 확인해주지 않아 현재는 조용해졌다. 썰에 따르면, 오세욱은 마약에 중독된 망나니라서 오극렬이 인간을 만들어보겠다고 2번이나 요덕수용소에 처넣었을 정도였고, 이미 집안에서 내놓은 놈 취급이라서 그의 망명이 오극렬에게 큰 해가 끼쳐지진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 사실 외아들이 아니고 동생인 오세원이 또 있는데, 오세원이 김정은, 김정철 형제와 친해서 무사했다는 또 확인되지 않은 썰도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아들이 있는데 반 김정일 쿠데타에 참여했다가 처형당했다고 후지모토 겐지가 주장했다는 얘기도 있었으나 정작 후지모토 겐지에게 진위 여부를 묻자 오극렬이 누구냐고 대답하여 구라로 밝혀졌다.
장진성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오극렬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 다섯이 있으며, 모두 문필가로 활동했다고 한다. 이중에서 장녀 오혜선은 로동신문 기자였는데 2000년에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한동안 북한은 여성의 자전거 사용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딸 중 한명인 오영희는 장진성과 평양음악무용대학 동창이었다고 한다. 장진성의 증언에 따르면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 오혜선: 로동신문 기자. 2000년 사망.
- 오혜영: 조선영화문학창작사 시나리오 작가. 영화 나의 행복 시나리오 집필.
- 오혜옥: 조선인민군 군보 기자.
- 오영희: 조선중앙방송위원회 음앙국 문예부 직원으로 배치.
- 오영란: 조선인민군기록영화촬영소 편집원.
- 오세원
거의 알려져 있진 않지만 해운부장을 지낸 오성렬이 오극렬의 사촌이다.
5. 매체에서
- 지금 평양에선에서는 황민이 분했다.
- 웹툰 스틸레인에선 오극렬을 모티브로 한 북한 강경파 수장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오광렬이 나온다.
[1] 오중성은 다른 4형제들과 함께 빨치산으로 활동해 '유격대 오형제'로 알려져 있고, 그 중 오중흡(즉 오극렬의 숙부)은 (북한의 선전에 의하면) 김일성을 지키려다가 일본군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혁명투사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북한군에서 특별한 공을 세운 부대에게 주어지는 명예칭호인 오중흡 7련대 칭호가 이 자의 이름을 딴 것.
분류
-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 조선로동당 작전부장
- 11기 국방위원회 위원
- 12기 국방위원회 위원
- 13기 국방위원회 위원
- 조선로동당 6기 정치국 위원
- 조선로동당 5기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 조선로동당 6기 정치국 후보위원
- 조선로동당 6기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 조선인민군 제1부총참모장
- 조선인민군 작전총국장
- 조선인민군 공군사령관
- 조선로동당 민방위부장
- 지린성 출신 인물
-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1930년 출생
- 2023년 사망
-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 6.25 전쟁/군인
- 러시아 지휘참모대학교 출신
- 공화국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