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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28 23:44:41

김광진(1927)

前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김광진
金光鎭 | Kim Kwang Jin
파일:김광진.png
출생 1927년
평양부
사망 1997년 2월 27일 (향년 70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
[[북한|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최종 계급 차수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 구성4. 여담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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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군인, 정치인.

2. 생애

1927년 5월 12일, 평양시 중구역에서 길주펄프공장 지배인 김복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광진 소개편집물에 따르면 김복진이 해방 직후 소위 '종파분자'의 연설을 듣고 격노하여 도끼를 들고 덤벼들어 그 단상을 쪼개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김일성을 지지하는 아버지를 둔 덕으로 해방 직후 평양학원에 입학했다. 일각에서는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다가 소련군 포병기술학교에 입학, 소련군으로 독소전쟁에 참전하고 소련인 아내를 얻어 해방 이후 1947년에 귀국하였다고 했는데, 2022년 8월 25일, 조선중앙통신은 "우리 혁명무력의 핵심골간을 키운 위대한 동지애의 품"란 기사에서 김광진이 평양학원 출신이라고 했으며, 김광진 소개편집물에서도 그를 평양학원 출신으로 소개하고 있다. 1927년생인 김광진이 10대 초반의 나이에 소련군 기술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가능할리가 없다. 이후 조선인민군에 입대, 포병련대장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여 서울 함락에 참여했다. 정전 이후 1954년 9월, 김일성군사종합대학 교원이 되어 생도들을 가르쳤다. 90년대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내세우면서 소련계, 연안계들을 몰살시키고 외국물을 뺄 것을 요구하자 1959년에 소련인 아내와 이혼했다고 하는데 김광진이 소련 출신이라는 기존의 정보가 틀린 것이니 이 역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북한에서 2023년 5월에 소개편집물을 통해 공개한 약력에 따르면 1963년 3월에 포병사령부 부사령관에 임명, 1964년 9월까지 재임했으며 1964년 9월에 포병사령부 참모장에 임명되어 1969년 12월까지 재임했다. 이후 1969년 12월에 포병사령관에 임명되어 1978년 7월까지 재임했다. 또한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1970년부터 중앙위원회에 들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1970년 6월의 조선로동당 4기 21중전회 쯤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거되었다가 정작 5차 당대회에선 탈락해버렸다는 소리가 된다. 사실이라면 중앙위원회 보선 직후 사고 쳐서 혁명화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1970년부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선출되었다고 하니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보선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 죽을 때까지 재선된다. 1978년 7월 인민무력부 부총참모장으로 조동되었으며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2년 5월에 부총참모장에서 해임되었다. 1984년 4월, 5군단장에 임명되었으며 1984년 7월, 조선로동당 6기 9중 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1984년 12월, 인민무력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85년 4월 1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오극렬, 백학림, 김두남, 리을설, 주도일, 김봉률, 리두익과 함께 대장으로 진급, 1990년 5월, 9기 1차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해방 40주년, 당창건 40주년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남북고위급 회담에 북측 대표로 참석하여 청와대도 방문하였다. 1992년 4월 20일,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의 공동 정령에 따라 최광, 리을설, 주도일, 최인덕, 백학림, 리두익, 김봉률과 함께 조선인민군 차수로 진급하였다. 1992년 4월 24일, 조선인민군 창건 60주년 열병식에 참가했으며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오진우랑 사열을 돌았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5년 7월. 김봉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5년 3월,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으며 1995년 10월,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에 임명되었고 10월 7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선로동당 창건 50주년을 기념하여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군내부에서 김정일의 권력승계를 뒷받침하는 우상숭배 사업을 많이 벌였다. 김정일 체제의 기린아로 성장하나 했더니 갑자기 1997년 2월 27일에 6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는 공동 명의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전후 군사교육기관과 인민무력부의 핵심적인 직책에서 오래동안 사업하면서 당의 주체적인 군사로선을 관철하며 인민군대를 정치군사적으로 강화발전시키기 위하여 모든 지혜와 정력을 바쳤다. (...) 동지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당과 혁명에 끝없이 충실하였으며 당의 군사로선과 방침을 관철하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사업하였다."라고 후하게 칭송하였다.

이미 불과 1주일 전에 최광이 사망하여 북한은 국장 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광진을 위한 국장을 추가로 거행하였다.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조선인민군 차수, 공화국영웅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혁명무력의 강화발전을 위한 투쟁에서 영웅적 위훈을 세운 귀중한 선군혁명전우'로 조명록, 김두남, 전재선, 윤치호, 리동춘, 김하규, 리진수, 심창완과 함께 김광진을 언급하였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여담

경제학자 김광진과는 동명이인이며 중앙위원회 위원, 중앙위원회 경제부 제1부부장을 지낸 김광진도 있다.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정책부 부부장을 하다가 1995년에 탈북한 최주활 상좌는 김광진 급 되는 인물조차도 외화가 없어서 외국 출장을 나갔다가 거의 일정 마지막에 손자들에게 줄 사탕이나 겨우 사는 처지였다고 증언한 바가 있다.

5.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