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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7 22:02:28

림호군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林鎬君?[1]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조선로동당 조사부장, 작전부장 등을 역임한 대남공작 전문가로 많은 대남도발을 지휘하였다.

2. 생애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1930년 량강도에서 출생, 만경대혁명학원,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여 1962년 당 연락부 지도원에 배치, 1967년에 조사부 부부장으로 승진하였다.

전향한 남파 공작원의 증언에 따르면 조사부 예하 연락소에서 대남공작원들의 침투 및 복귀 호송임무를 수행하던 공작모선 선장 출신이다. 연락부와 조사부에서 대남 전문가 경력을 쌓았고 김정일이 대남공작 부문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그의 측근이 되었다. 김동수의 논문에 따르면, 1977년 3월,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1978년 12월, 조사부장 리완기가 연락부 부부장으로 좌천됨에 따라 후임 조사부장으로 승진 임명되었다. 1978년 초에 납치된 최은희와 신상옥이 그를 부부장으로 기억하는 것을 봐서 통일부 자료 쪽이 좀 더 정확해보인다. 리완기와 함께 최은희, 신상옥 부부 납치를 진두지휘한 것 역시 그였다. 납치된 최은희가 울부짖으면서 돌려보내달라고 부탁하자 "최선생, 우리는 지금 김일성장군님의 품으로 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림호군이었는데, 오랫동안 해외에서 생활해서 그런지 다소 더듬거리는 한국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좀 깨는 일이 있는데, 한번은 림호군이 술에 취해서 최은희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슬그머니 누워 추파를 던지려다가 최은희가 비명을 지르며 그를 침대 밖으로 밀쳐내자 선실 밖으로 달아났다고. 그런데도 근성 있게 또 침대 위로 올라가려다가 걸려서 최은희가 비명을 지르자 다른 공작원들이 "부부장 동지, 왜 이러십니까?"하고 그를 끌어냈다고 한다. 최은희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 측근답게 김정일 연회에도 초대를 받곤 했으며, 최은희에게 반했는지 술에 취한 최은희가 2층에 있는 휴게실 소파로 가서 쉬고 있을때 따라와서 몰래 뺨에 입을 맞추다가 최은희에게 뺨도 맞았다. 최은희가 "어디서 이따위 짓을 하는 거예요?"라고 난리를 치자 "어, 이거 그렇게까지 할 것 없지 않소?"라면서 얼굴이 벌개져서 어쩔 줄 몰라했다고.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99년 2월, 신상옥과의 대담에서 황장엽이 한 증언에 따르면, 1983년 아웅산 테러를 주도한 것도 바로 그였으며 김정일에게 전두환을 반드시 암살하겠다고 맹세까지 하였다고 한다. 1980년대 초에 조사부가 작전부와 대외정보조사부로 분리되면서 작전부장에 유임되었으며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1985년에 최은희가 봉화진료소에 갔을때 우연히 림호군과 마주쳤는데 얼굴이 창백해서 어쩐일이냐니까 간염에 걸렸으며 김정일에게 옮길까봐 김정일도 못만나고 있다고 했다고 한다. 이후 1990년대 초에 오극렬이 후임 작전부장에 임명되면서 작전부 부부장으로 강등되었다. 통일부 자료에는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고 잘못 적고 있으나 대의원 명단에 림호군은 없으며 당시 분석 기사에도 림호군이 탈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대남공작 전문가답게 그 외에 뭘하는지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다가 2009년 5월 28일, 애국렬사릉에 시신이 안장되면서 사망이 확인되었다. 조선중앙통신은 "오랜 기간 당과 국가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였던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 림호군"이라고 그를 짤막하게 언급하였다.

3. 참고문헌


[1] 1989년 6월 15일자 조선일보의 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