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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에 대해 다루는 문서.2. 내용
2.1. 조선 전기
무로마치 막부가 지방 세력들을 제압한 후 한일 관계는 교린 관계로 그럭저럭 평온하게 유지되었다. 변효문과 신숙주 등이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세종의 대마도 정벌 이후 15세기 중후반에는 왜구가 한반도를 노략질하는 일은 줄어들었다.조선이 15세기에 이르러 외교적 안정과 평화를 맞으면서 내치에 집중했던 반면, 일본은 오닌의 난이 발발하여 무로마치 막부가 통제력을 잃고 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각자도생을 꾀하던 일본의 지방세력 중 서일본의 세력일 수록 경제적 이익을 구하여 조선과의 교류에 힘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 해에 일본에서 건너온 사절단이 6,000여명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활발하였다. 이들은 조선 정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저자세를 취하여, 조선을 '상국'이라 부르고 국왕을 '황제 폐하'라 칭하는 등[1] 몸을 낮추었으며, 조선 역시 일본에 대한 우월의식을 확립할 수 있었다. 세조는 "야인과 왜인은 모두 우리 번리(藩籬)이며, 우리의 신민이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조선 지배층들의 일본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었다.[출처]
2.2. 임진왜란
그러나 일본과의 통교는 작고 큰 참화를 불러오기도 했는데, 16세기에 삼포왜란, 을묘왜변이 발생하여 조선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면서 이전의 일본의 저자세가 사라져서 조선 정부로서는 크게 당황하였으며, 그가 일으킨 임진왜란이라는 전면전까지 발발했다. 선조가 수도 한성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을 나서고, 명나라의 손을 빌려 간신히 일본을 패퇴시키는 등[3] 이 과정에서 많은 이가 일본군 또는 전염병으로 죽거나 다치고 국토도 황폐화되었다. 당연히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떨어져 버렸다.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군대를 보내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조선 측에서는 새로운 승리자가 된 그와 적대를 할 이유가 없어 광해군1년인 1609년 빠른 관계 회복을 원했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멋대로 국서 바꿔치기 주작을 하였지만 어찌 되었든 기유약조를 맺어 국교를 재개하게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마지막 막부 정권인 에도 막부를 열었다.
2.3. 조선 후기
하지만 왜란 직후 병자호란이 터지고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반청 감정이 앞서게 되고, 조선은 조선 통신사 등을 정례화하는 등의 노력으로 일본과 함께 교린 관계를 유지한다.하지만 임진왜란 이전 조선 수도로 파견된 일본 사신의 왕랫길을 일본군이 그대로 침략 루트로 써먹는 바람에 조선 측은 일본 사신의 한성 진입은 커녕 동래 왜관 이외의 출입을 엄금하였다. 반면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에도까지 불러 네덜란드인들에게 난학을 배울 때 한 대접조차 초월하는 융숭한 접대를 하였다. 막부가 국가 재정에 무리수를 두면서 통신사를 대접한 것은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시기에 따른 추이는 있으나 대체적으로 수평적이었던 한일 관계가 기울어진 건 일본이 개화를 하면서 조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국력을 구축한 근현대사 시기부터이다.
2.4. 개항기
근대 이후 한일 관계는 급격히 일방적인 쪽으로 바뀌게 된다. 일본은 쿠로후네 사건을 통해 개항한 시기가 조선의 개항보다 훨씬 빨랐다. 게다가 조선이 개혁개방에 지지부진한 사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급격히 발전한 일본 제국은 막부 시절의 쇄국정책을 버리고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조선을 위협했다. 이에 따른 첫 결과물이 바로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이다.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열강으로 부터 한국의 식민지배를 인정받고, 을사조약,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당연히 한국의 반일 감정은 급속히 오르게 된다.
3. 관련 문서
[1] 세조와 성종 대의 외교문서에서 빈번하게 발견된다.[출처] 세조실록 8권, 세조 3년 7월 29일 경인 2번째기사[3] 비록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전선을 고착화시키기도 하고 민폐도 많았지만 명나라군의 전투력과 지원이 있었기에 조선군이 재정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조선이 거둔 승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정유재란 때는 명나라군이 지상군의 주력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5만~7만 4천 명 가량, 정유재란 때 파견된 명나라군 규모가 무려 9만~11만 7천 명이다. 특히 정유재란 당시에는 명나라 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을 압박하였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 역시 사실이다. 만약 명나라 군의 이러한 활약이 없었다면 설사 히데요시가 죽었더라도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철수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