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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남명 제3대 황제 영력제 | 永歷帝 | |
묘호 | 소종(昭宗) |
시호 | 응천추도민의공검경문위무예인극효광황제 (應天推道敏毅恭檢經文緯武禮仁克孝匡皇帝) |
연호 | 영력(永曆) |
성씨 | 주(朱) |
휘 | 유랑(由榔) |
부황 | 예종(禮宗) |
모후 | 소성태후(昭聖太后) 마씨(馬氏)[2] |
황후 | 효강광황후(孝剛匡皇后) 왕씨(王氏)[3] |
출생 | 1623년 11월 1일 (음력 10월 9일) |
사망 | 1662년 6월 1일 (음력 4월 15일, 38세) |
재위 | 명 영명왕 |
1636년 ~ 1646년 | |
남명 계왕 | |
1646년 | |
남명 황제 | |
1646년 12월 24일 ~ 1662년 6월 1일 |
[clearfix]
1. 개요
남명의 마지막 황제이자, 명나라 전체로는 제19대 황제였다.묘호는 소종(昭宗), 시호는 광황제(匡皇帝)였으며, 정식 시호는 응천추도민의공검경문위무예인극효광황제(應天推道敏毅恭檢經文緯武禮仁克孝匡皇帝)였다. 이는 뒤에 동녕 왕국의 정경이 묘호와 함께 추서한 시호였다. 연호가 영력(永曆)이라 영력제(永曆帝)라고도 한다.
제13대 신종 만력제의 손자로,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제16대 의종 숭정제의 사촌이었으며, 황제에 즉위하기 전에는 영명왕(永明王)의 지위에 있었다. 만력제의 7남 계단왕(桂端王) 주상영(朱常瀛)[4]의 4남이었다.[5]
2. 생애
1643년, 아버지 주상영과 함께 광서(廣西)로 도망쳤다. 이후 주상영이 사망하고 계왕(桂王) 지위를 세습한 둘째 형도 사망하자 뒤를 이어 계왕이 되었다.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북경이 함락되고 절망한 숭정제가 자살하여 명나라가 멸망했다. 이후 남경을 수도로 한 남명의 초대 황제인 안종 홍광제 주유숭이 청군에게 생포되어 교살되고,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종 융무제 주율건 역시 청군에 생포되어 단식끝에 굶어 죽자, 계왕 주유랑은 조경(肇慶)으로 피신하여 1646년 남명의 제3대 황제로 즉위했다. 이후 영력제는 타지에서 황제로 즉위한 소무제 주율오[6]와 정통성 문제로 광주의 삼천에서 대립했다가 전투에서 대패하고 위기에 처했으나, 얼마 후 청군이 광주를 함락시켜 주율오가 후사를 남기지 않은채 자살하면서 영력제만 남았다.
당시 영력제에게는 장헌충 휘하의 부하였다가 장헌충이 세운 서나라가 멸망하자 남명에 투항한 장군 이정국이 있었다. 이정국은 일시적으로 광서와 사천의 일부를 수복하고, 1652년 한간인 청나라의 정남왕 공유덕을 전사시키는 업적을 세웠다. 또한 정성공의 협력하에 한때 광동, 광서, 귀주, 운남을 지배했다. 그러나 1650년, 청군이 경동과 계림을 함락시키고, 1656년에는 주산 열도를 점령했다. 이때 영력제 주유랑은 화남 일대를 방랑하다가 1659년 운남까지 잃자 버마(따웅우 왕조)로 도주했다. 이때 영력제와 황실을 따른 가신은 이중국 휘하의 65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1662년, 과거 산해관을 들어 청나라의 예친왕 도르곤에게 투항했던 오삼계가 버마까지 쳐들어왔다. 결국 청군의 위세를 무서워한 버마 국왕 폐 민[7]에 의해서 곤명에 있었던 오삼계에게 압송되었다. 오삼계는 청나라에 대한 본인의 충성심을 직접 증명할 요량이었는지 영력제 주유랑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을 모두 직접 목졸라 죽였다.[8] 이때가 1662년 6월 1일이었다. 이렇게 영력제 일가는 곤명에서 학살되었고, 이정국도 미얀마 북부의 타웅우에 주둔하던 중 영력제의 처형 소식을 듣고는 곧 병사했다. 대만에서 영력제의 비참한 죽음을 전해들은 정성공도
"내 소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무슨 낯으로 황천에서 황제 폐하를 뵐 수 있겠는가"
라며 절규하다가 1개월 뒤인 6월 23일에 죽었다.[9] 이로써 한족 최후의 통일 왕조였던 명나라는 잔존 세력없이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이후 오삼계가 성조 강희제에 대항하여 삼번의 대란을 일으키면서 그 대의명분으로 명나라의 부흥과 만주족에 대한 복수를 내걸고, 자신이 죽인 영력제의 능을 참배하며 곡을 하기도 했으나, 애초에 산해관을 열어 청군을 맞이한 것도, 남명의 저항 세력을 모두 박살낸 것도, 남명 최후의 황제인 영력제를 직접 교살한 것도 오삼계였고, 반란 직전까지 청나라의 번왕으로 부귀영화를 누렸기에 그런 인간이 이제 와서 반성한다고 감동하는 옛 명나라 백성들도, 그를 지지해 반청운동에 나선 명나라의 유신 및 장수들도 없었다.
영력제에게는 7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모두 요절하거나 행방불명되었거나 오삼계에게 살해되었다.
3. 일화
특이한 이야기가 있는데, 운남에서 밀려나면서 정성공과의 연락이 거의 단절된 상태에 이르자, 명나라의 재건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듯 뜬금없이 로마에 있는 교황에게 SOS를 쳤다.[10] 남명 황실에 와 있었던 예수회 사제가 영력제의 황후 왕씨(세례명 안나)의 청을 받아들여 교황과의 연락을 주선한 것이었다. '지원으로 인해 명나라의 재건이 성공하면 황제인 내가 책임지고 솔선해서 중국에 가톨릭 신앙을 퍼뜨리겠다'는 파격적인 조건까지 제시한 상태였으나, 당사자인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미온적인 반응과 너무 먼 지리적 간극, 연락책을 맡은 보임(Boym)[11] 신부가 1659년에 사망하는 등의 여러 이유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후 이것저것 여의치 않자 버마로 도망치듯 망명했으며, 그 결과는 상술한 바와 같다.황후 왕씨가 로마 교황에게 보낸 구조 요청 문서. 바티칸 도서관의 비밀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라틴어 번역본.
4. 사후 추서
정성공의 아들 정경은 영력제가 붕어하자 국상을 선포하고, 애도 기간을 가진 뒤 소종(昭宗)이라는 묘호와 응천추도민의공검경문위무예인극효광황제(應天推道敏毅恭檢經文緯武禮仁克孝匡皇帝)라는 시호를 추서했다.5. 기타
1644년 명나라의 멸망 이후, 조선에서는 조선중화주의에 입각한 사대부들이 조선이야말로 명나라의 진정한 후계 국가라고 생각하면서, 선대 왕조인 명나라의 역사를 정리했다. 그런데 여기서 이른바 남명의 세 황제[12]를 정통으로 인정하는가의 여부를 두고, 의견 차이가 생겼다.- 1644년 북경이 함락되고, 숭정제가 자살함으로써 명나라는 멸망했고, 조선은 남명과 직접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한 일이 없으므로 '우리가 알던 명나라는 숭정제까지'라고 보는 입장.
- 남명의 세 황제가 어쨌든 명나라 황실의 혈통을 이어서 즉위했고, 영력제의 연호를 사용한 책력(달력)을 소지한 남명 사람들이 1667년 제주도에 표류함으로써[13] 영력제의 책력이 조선에 전달되었으니 외교 관계가 수립된 것과 같다고 간주하여 '명나라는 영력제까지'라고 보는 입장.
자세한 내용은 숭정 문서 참고하십시오.
한편 동녕 왕국에서는 영력제가 처형당한 후에도 1683년까지 영력 연호를 계속 사용했다. 이 때문에 위에서 서술한 남명 사람들이 제주도에 표착한 사건에서 이들이 지닌 책력에는 영력제 사후의 연도인 영력 21년(1667년)이 적혀 있었다.
[1]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2] 세례명은 마리아.[3] 세례명은 안나.[4] 아들에 의해 예종(禮宗) 체천창도장의온홍흥문선무인지성효단황제(體天昌道莊毅溫弘興文宣武仁智誠孝端皇帝)로 추존되었다.[5] 주상영은 8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주유랑을 제외하면 모두 요절했다.[6] 제2대 소종 융무제의 동생이었다.[7] Pye Min, 한자로는 망백(莽白).[8] 황후 왕씨는 그릇을 깨뜨려서 그 파편으로 목을 그어 자결했다.[9] 물론 영력제 처형 자체의 충격도 크긴 했지만, 이미 이전부터 정성공 역시 중병에 걸려서 헛 것을 볼 정도로 오늘내일하던 상황이었다.[10] 물론 아예 뜬금없는 것은 아니고, J.M. Roberts의 《A History of Europe》에 의하면 영력제 주유랑은 중국 역사상 유일한 가톨릭 군주였던 것은 물론이고, 그의 모친인 태후 마씨와 그의 후계자 모두 Andreas Xavier Koffler 신부로부터 세례성사를 받았다고 한다. 얄궂게도 영력제와 함께 교살된 아들 주자훤(朱慈煊)도 세례성사를 받았는데, 세례명은 콘스탄티노였다.[11]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출신이었다.[12] 제1대 홍광제, 제2대 융무제, 제3대 영력제[13] 정확히는 영력제가 처형당한 1662년 이후에도 영력 연호를 유지하던 동녕 왕국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