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14 17:05:05

주본립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670000> 자립 자립
현무제 순덕제
남명(南明)
<rowcolor=#670000> 융무 정권 동무 정권 노왕 정권
소무제 동무제 노왕
<rowcolor=#670000> 흥업 정권 정무 정권
정강왕 정무제
}}}}}}}}}


 
{{{#fff {{{#!wiki style="margin: -26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0C420, #F0C420,#F0C420,#F0C420, #00386A, #00386A, #00386A, #00386A)"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0.35px"
명(明)
제13대
만력제
제14대
태창제
제15대
천계제
제16대
숭정제
틈왕 정권
초대
고영상
제2대
이자성
순(順) 서(西)
초대
이자성
제2대
이자경
임시
이과
초대
장헌충
명나라 부흥군
초대
홍광제
제2대
융무제
제3대
영력제
비정통 주이해 · 주형가 · 소무제 · 동무제 · 정무제
동녕국(東寧國)
초대
조무왕
제2대
조문왕
제3대
조왕
삼번(三藩)
오주(吳周) 평남왕(平南王) 정남왕(靖南王)
초대
태조 고황제
제2대
오세번
초대
상지신
제2대
경정충
후금(後金) → 청(淸)
초대
천명제
제2대
숭덕제
제3대
순치제
제4대
강희제
}}}}}}}}}}}}}}}

명 비정통 황제
정무제 | 定武帝
묘호 없음
시호 없음
봉호 한왕(韓王)?
연호 정무(定武)?
주(朱)
본립(本鉝)?
출생 1616년
사망 1664년? (향년 48세)
재위 남명 비정통 황제
1646년? ~ 1664년?

1. 개요2. 전하는 생애

[clearfix]

1. 개요

남명의 비정통 황제라고 전해지는 인물.

휘는 본현이라고도 하고, 정무제가 실존인물이라고 믿는 일부 학자들은 다른 이름을 제시하기도 한다. 연호가 정무라 정무제로 불린다. 《죄유록》(罪惟錄) 등에 전하는 야사에 가까운 기록밖에 없어서 실존 여부를 의심하는 학자가 많다. 근대에 《남명사》를 편찬한 전해악(錢海岳)은 태조 홍무제의 20남 한왕(韓王) 주송(朱松)의 자손인 한단왕(韓端王) 주낭기(朱朗錡)의 아들 주단척(朱亶塉)과 동일인물로 간주했고, 역시 한왕 주송의 후손인 주경률(朱璟溧)과 동일인물로 간주하는 설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가설로 남았다.

2. 전하는 생애

1644년, 북경이 함락되고 제16대 의종 숭정제가 자살한 시기에 학영충(郝永忠)이 주본립을 명나라의 황제로 옹립했고, 주본립은 그해를 정무(定武) 원년으로 정했다고 한다.

1662년, 남명의 제3대 황제였던 영력제 주유랑이 청나라 장수 오삼계의 손에 의해 미얀마에서 피살된 뒤에도 여전히 정무제 주본립은 중국 본토에서 남명 조정을 이끌었다고 한다. 그는 영력제에게 칭신하지 않은 채 방산(房山)에서 그 세력을 유지했다고 하며, 이순(李順)의 후예인 이래경과 협력하기도 했다.

1664년, 청군이 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해오자 정무제는 학영충, 이래경, 유체순(劉體純)에게 명령하여 막도록 했으나 셋 다 대패했고, 이를 계기로 정무 정권은 급속도로 와해되었으며, 결국 정무제는 동년 12월, 청군에게 처형당했다고 한다.

청나라 제3대 세조 순치제 시기의 군인이었던 조택원(祖澤遠)은 정무제의 세력권인 방산에서 여러 전리품을 얻었다는 보고를 순치제에게 올렸다고 한다.

정무제의 실존 여부가 의심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영력제조차도 청나라 군대의 공격을 피해 외국인 미얀마로 나가야 했던 판이었다. 만약 정말로 정무제 주본립이 실존 인물이었고, 전해지는 대로 영력제가 죽은 이후에도 여전히 중국 본토 땅에 남아 청나라에 저항했다면, 정무제의 세력을 언급하는 청나라의 기록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야사에 가까운 기록밖에 전해지지 않는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