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16:23:06

케네스 비글리 피살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피랍자 명단3. 납치 이전 이들의 생애4. 사건의 경위5. 납치와 피살6. 남은 인질 비글리의 운명7. 관련 인물

1. 개요

2004년 이라크에서 미국인 2명과 영국인 1명이 알 자르카위가 이끌던 테러 조직인 유일신과 성전에 피랍당한 사건. 본 항목에서는 케네스 비글리와 같이 피랍당한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에 대해서도 같이 서술한다.

2. 피랍자 명단

<colbgcolor=#000><colcolor=#fff> 유진 암스트롱
Olin Eugene Jack Armstrong Jr.
파일:e.o.armstrong.png
출생 1952년 6월 5일
오레곤 주 힐즈 버러에서 미시간 힐즈 데일로 이동
사망 2004년 9월 20일 (향년 54세)
이라크 바그다드
가족 형제 프랭크 암스트롱, 친척 신디 암스트롱
학력 오리건 주립대학교
직업 토목 기사
<colbgcolor=#000><colcolor=#fff> 잭 헨슬리
Jack Hensley
파일:image644990.jpg
출생 1955년 9월 22일
노스캐롤라이나 헨더슨빌[1]
사망 2004년 9월 21일 (향년 49세)
이라크 바그다드
가족 母 줄리아, 부인 파티, 딸 사라, 남동생 타이(Ty)
학력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직업 기술자
<colbgcolor=#000><colcolor=#fff> 케네스 비글리
Kenneth John Bigley
파일:Bigleyandwife.jpg
출생 1942년 4월 22일
잉글랜드 리버풀
사망 2004년 10월 7일 (향년 62세)
이라크 바그다드 라티피야
가족 母 릴 비글리, 부인 솜밧, 형 스탠, 남동생 필립, 폴, 아들 크레이그
직업 BBC 현장 기자 및 기술자
[clearfix]

3. 납치 이전 이들의 생애

파일:14544724_f59a5ac2-da83-40ab-8915-74ae2705111b.jpg
1971년 촬영된 유진 암스트롱의 사진
파일:14544724_e03bd4fa-2b02-48ae-8271-d670494aa305.jpg
유진 암스트롱의 유년기 시절 모습 사진
유진 암스트롱은 오레곤 주 힐즈버러에서 태어났으며 교육과 근면을 중시하는 친밀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오리건 주립대학교에서 토목 공학 학위를 취득 했으며 탁월한 성과를 거두고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미시간 주 출신으로 미국을 떠나서 중동 지역에서 토목 기사로 일해 왔으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앙골라에서 현장 기술자로 일한 경력이 있으며 중동에 오기 전에는 독일에서 어머니와 살다가 태국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태국인 부인과 결혼 해 거주했으며 취미 생활은 독서였고 자신의 해외 생활에 대한 회고록을 작성하여 그것이 출판 되기를 바랬다. 그는 전 세계를 여행하는 걸 즐겼으며 유진 암스트롱의 생계는 그를 세계의 여러 지역으로 데려가 인프라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개발도상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전직 해군 수병이였으며 그의 사촌인 팻 암스트롱은 걸프 전쟁에 참전한 미 해병대 참전 군인이었다. 암스트롱이 이라크가 위험한 지역인 걸 알면서도 간 이유는 가여운 이라크인들을 위한 필수 서비스와 시설을 복원하기 위해 재건 노력에 전념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라크를 재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파일:storytime.jpg
딸 사라에게 책을 읽어주던 잭 헨슬리
파일:jackty.jpg
남동생 타이 헨슬리의 결혼식에 참석한 잭 헨슬리
(2004년 1월 촬영)
잭 헨슬리는 한 집안의 가장이자 부인인 파티 헨슬리와 자녀인 사라 헨슬리를 두고 있었으며 콜롬비아, 사우디 아라비아 등 여러 국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었다. 헨슬리는 자신의 아내와 딸, 그리고 병 든 어머니와 함께 소박한 교외의 집 안에 은둔하며 살았다. 그는 노스캐롤라이나 헨더슨 빌에서 태어났으며 오클라호마 주 폰카 시티에서 자랐고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를 졸업하고 수학 학위를 취득 했다. 그는 콜롬비아에서 부인 파티를 만나서 결혼하고 둘 다 컴퓨터 사업에서 일했으며 1984년에 부인과 같이 애틀랜타 지역으로 이사하고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ICT 서비스 기업 Getronics에서 일했다. Getronics의 동료인 빌 멜빈의 증언에 의하면 헨슬리가 대규모 통신 프로젝트를 관리할 때 기술적 지식과 사람들의 기술을 결합한 것 같다고 말했다. 헨슬리와 17년 동안 함께 일했던 동료인 멜빈은 기술 전문가에게는 또 다른 차원이 있다고 평했다. 헨슬리는 젊었을 적 시절에만 컴퓨터 사업에 집중했으며 더 이상 컴퓨터 사업으로 최신 상태를 유지하고 싶지 않다면서 일을 관두고 부인 파티와의 만남 이후 딸을 키우는 교육을 집중 했다. 타이 헨슬리에 의하면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1년 반 동안 일했다는 증언이 있다. 본국인 미국에서 여러 차례 사업에 실패한 후[2] 극심한 생활고를 겪으며 자신의 가족들이 가난함에 시달려서 어린 딸과 부인을 부양하고 딸의 대학 진학 자금[3]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한 끝에 이라크에서의 건설 계약직을 택했다. 부인과 딸을 매우 사랑했던 헨슬리는 가족과 떨어지는 것에 대해 매우 슬퍼했고 이라크 근무에 수반되는 위험 역시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경제적 사정이 워낙에 나빴기에 이라크행을 택했다. 이후 이라크 정세가 악화되고 닉 버그와 김선일 등 외국인 인질들이 피랍되어 참수되는 흉흉한 사건이 일어나며 이라크 정세가 급격히 불안정해지자 아내 파티 헨슬리는 이라크에서 일하던 남편이 심히 걱정돼서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보수 금을 받지 않아도 상관 없으니 하루 빨리 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돌아와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으나 그는 괜찮다면서 선의의 거짓말로 자신의 가족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잭 헨슬리는 그러면서도 남동생 타이 헨슬리와 매일 주고 받은 이메일에서 자신의 가옥이 감시당하고 있으며 안전이 매우 염려되고 현재의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며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4] 여담으로 그의 어머니 줄리아 헨슬리는 오클라호마의 케이 카운티 보건 국에서 수년 간 근무했던 경험이 있다.
파일:kenbigley.png
리버풀에서 찍힌 케네스 비글리의 사진
케네스 비글리는 이라크에 입국하기 전까지 보통의 영국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았으며 직업은 엔지니어 기술자였고 에버튼 FC의 팬이었으며 휴가가 있을때마다 아들 크레이그와 구디슨 파크를 찾아서 경기를 관람하는 것을 즐겼다. 중동에 오기 전에는 뉴질랜드와 호주에 엔지니어 회사를 차리기도 하는 등 전 세계적인 기술자 업무를 보았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뒤바꾸는 비극이 찾아오고 말았는데 그의 어린 아들 폴이 용돈을 은행에 입금하러 자전거를 타고 가던 길에 트럭에 치이는 사고를 당해 회복 불능 상태에 빠졌고 그는 아들의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하는 데 동의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선택을 내려야만 했고 참척의 고통에 몹시 괴로워했다. 그는 생전에 두 번 결혼한 경험이 있는데 첫 번째 부인과는 아들의 죽음 이후 케네스 비글리가 정신적으로 무너지며 파혼하게 되었고 이후 휴가차 태국에서 만난 태국인 아내인 솜밧과 편지로 서신을 주고받다가 관계가 가까워져 재혼하였다. 그는 중동 근무와 태국인 아내와의 재혼 이전까지는 먼저 떠난 어린 아들을 그리워하면서 슬픔에 잠겨 폐인처럼 허송세월을 보냈는데 이를 보다 못한 형제중 비글리와 가장 사이가 좋았던 남동생인 폴은 그가 재기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중동에서 기술자로 일해 볼 것을 제안했다. 폴은 케네스보다도 먼저 중동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에게 자리 하나를 마련해주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동생의 도움으로 중동에서 엔지니어 업무를 시작한 그는 다양한 중동 국가에서 근무하면서 아랍과 이슬람 문화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으며 또한 태국인 아내와 결혼하며 참척의 슬픔을 극복하고 다시 행복을 되찾았다. 그는 재혼한 아내 솜밧을 매우 사랑했으며 아내와 떨어져 있는 기간에도 매일 같이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태국의 캄보디아 국경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망고밭과 작은 가게를 두고 소박하게 살아갈 행복한 노후 생활 계획을 세우곤 했으며 동료들과도 매일 아내 얘기를 했다. 그러던 비글리에게 이라크 건설직 계약 제안이 왔고 잭 헨슬리와 유진 암스트롱과는 다르게 케네스 비글리는 이미 환갑을 넘긴 은퇴를 앞둔 나이였고 경제적으로도 전혀 부족할 것이 없었으나 은퇴 직전에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이라크 건설직 계약을 수락하고 예정된 은퇴까지 미루고 이라크행을 감행했다. 비글리는 납치 직전까지는 이라크에서의 생활에 만족하였으며 현지의 이라크인들과 친목을 다지기도 했다.
파일:c5b7b383e526c2fc628196dd3e068a77.png
케네스 비글리와 그의 동료 잭 헨슬리와 이라크 근무 중 같이 찍은 사진.
찍어 준 사람은 유진 암스트롱으로 추정된다.[5]
비글리보다 앞서 중동 경험이 있던 폴과 태국에서 케네스를 애타게 기다리던 그의 태국인 아내는 이라크는 서양인 근무자에겐 너무 위험하다며 그의 이라크행을 극구 만류하면서 남편이 가겠다면 자신도 같이 따라가고 싶다고 했으나 그는 자신 혼자만 가겠다며 또한 미군의 보호를 받는 요새화된 완전 안전 지대이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이후 그는 그의 미국인 동료 2명인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와 함께 외국인들이 그토록 꺼리는 이라크 땅을 밟게 되었다. 그들 셋이 함께 살던 자택은 바그다드 시내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으며 그가 폴에게 했던 말과는 다르게 미군이 아닌 이라크인 경호원들이 보안을 담당했고 그와 그의 미국인 동료들은 외국인이 아닌 이라크 현지인들과 부대끼며 생활했다.

4. 사건의 경위

당시 이라크인들은 외국인 근무자들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었으며[6] 이전에도 같은 미국인이었던 닉 버그폴 존슨, 한국인 김선일이 참살당하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안 그래도 불안했던 이라크의 정세는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닉 버그와 폴 존슨, 김선일 참수 사건 이후 자신도 그 다음이 될지 모른다는 패닉과 공포감에 수 많은 미군 관련 업무를 보던 외국인 근무자들이 계약을 파기하고 앞다투어 이라크를 떠났다.[7]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라는 미국인 2명과 영국 국적인 케네스 비글리는 모두 같은 쿠웨이트 회사인 "Gulf Supplies and Commercial Services"의 계약 직으로 건축 토목 기술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이라크 전쟁으로 피폐했던 이라크의 재건을 돕기 위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이라크에 있는 집을 따로 얻어서 만일에 일어날 테러 조직의 위협을 대비하기 위한 철저한 감시를 하는 경비원의 아래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택을 감시하던 경비원이 유일신과 성전의 살해 위협 때문에 경호 업무를 포기하고 떠나겠다고 선언하자 결국 자신들이 오히려 큰 위험에 노출되었다. 이라크인 경호원들은 안전 보장이 되지 않아 더는 경호 업무를 볼 수 없으며 그들의 집은 지금 누군가한테 감시당하는 것 같으므로 그들도 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살벌한 경고를 남기고 일방적으로 떠났다.

이후 암스트롱과 헨슬리, 비글리는 신변에 중대한 위협을 감지하고 공포에 빠졌으며 이라크를 지금 떠나야 하는지의 여부에 대한 심각한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케네스 비글리도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서 아내를 만나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며 잭 헨슬리 역시 고국의 아내와 딸과 재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들이 고심한 끝에 도달한 결론은 이라크에 끝까지 남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건설 계약도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고 도중에 고국으로 떠난다면 이라크에서 일했던 보수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잭 헨슬리의 동생 타이 헨슬리도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라크에 남은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선택은 그들의 인생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다.

이후 그들은 경비원이 떠나 버린 텅 빈 자택에서 머물면서 9월 16일까지 계속 일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경비가 허술해진 자택에서 살던 그들은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한 유일신과 성전의 대원들이 발전기를 고장 내어 정전을 일으키는 바람에 동료 중 한 명이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철문을 열었다가 자택에 쳐들어온 후 납치 당하고 말았다.

5. 납치와 피살

파일:axas.png
파일:12495153521.png
유일신과 성전에게 피랍되어 포박된 세 사람. 우측부터 케네스 비글리, 유진 암스트롱, 잭 헨슬리[8]

유일신과 성전은 세 사람을 모두 인질로 붙잡고 유일신과 성전의 본거지로 압송하여 억류했으며 48시간 안에 미군들과 동맹군이 억류하고 있는 이라크인 여성 포로들을 전부 석방해 주지 않으면 이들을 모두 참수 하겠다고 밝혔다.[9] 협박 영상에서 그들은 지하드 현수막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고 사복을 입은 채로 눈가리개를 쓰고 있으며 테러범들은 잭 헨슬리, 유진 암스트롱, 케네스 비글리의 머리 옆에 총을 겨누면서 차례로 유언을 남기게 하는 영상을 공개했다.

잭 헨슬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협박 영상에서 "내 이름은 잭 헨슬리입니다. 타지 지역의 캠프 공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라고 유언을 남겼다. 인질들의 납치 소식이 알려지고 이들을 납치한 단체가 무장 강도단이 아닌 이미 이전에 외국인 인질을 참살한 전적이 있던 악명높은 유일신과 성전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본국의 가족들은 망연자실했다. 그의 부인인 파티 헨슬리도 방송에서 남편의 구명을 간절하게 호소하면서 내 딸도 아버지가 무사히 살아서 돌아오길 바라고 있으며 그를 데려올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말을 전했고 자신의 남편은 진심으로 이라크인들을 도와주기 위해 간 것이며 테러범들이 절대로 그를 해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그의 남동생 타이 헨슬리는 잭 헨슬리가 이라크에 간 건 이라크인들을 돕기 위함이었고 그의 업무가 미군의 전쟁수행 지원에 관련된 업무가 아닌 이라크의 주택과 수도 시설을 공사하는 데 집중되었음을 강조했으며 그를 죽이는 건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라며 호소했다.. 또한 형이 매우 선한 사람이었으며 항상 남을 돕는 데 앞장선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라크인들을 돕기 위해 이라크에 간 것이었고, 가정적이고 자신을 학교에 항상 데려다주고 티볼을 가르쳐주던 매우 자상한 형이었기 형이 살아 돌아오길 간절히 바란다고 호소했다. 또한 잭 헨슬리의 딸인 사라 헨슬리가 직접 TV에 나와 "아빠 보고 싶어요. 그리고 사랑해요. 꼭 집에 돌아와주세요."라며 호소했다. [10]

그 다음 유진 암스트롱도 "내 이름은 유진 암스트롱. 팻 암스트롱이라는 사촌이 있습니다." 라는 유언을 발언 했다.

케네스 비글리도 헨슬리와 비슷하게 두려워하는 목소리로 "제 이름은... 케네스 존 비글리 입니다. 그리고 제 일은 미군의 타지 캠프를 건설하고 정비하는 일입니다." 라는 유언을 남겼고 해당 소식을 접한 영국의 가족들과 태국에 있던 아내는 큰 충격을 받고 각기 비글리의 구명을 호소했으며 영국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했다.

미국 측은 그들이 억류하고 있는 이라크인 여성 죄수들은 사담 후세인 정권의 생물 무기 연구에 관여된 과학자들이므로 석방할 수 없으며 또한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어떤 경우에도 그들과 협상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못박았다. [11]그러나 그렇다고 자국민 인질들이 죽도록 손 놓고 내버려 둘 수는 없었기에 이라크 주둔 미군들은 세 명의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두 차례 구출 작전을 실시했다. 유진 암스트롱이 참수되기 이전에(9월 20일 이전) 첩보에 따라 유일신과 성전이 인질들을 억류하고 있다고 알려진 바그다드의 여러 가옥을 급습했으나 인질들의 흔적을 찾는 데 실패하며 첫 번째 구출 작전은 실패했다. 두 번째 구출 작전은 암스트롱이 참수된 이후인 9월 21일에 이루어졌으나 이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구출 작전마저 실패하고 시한이 만료된 직후 유진 암스트롱은 참수당했고 잭 헨슬리도 그 다음 날 24시간 안에 참수당했고 닉 버그와 폴 존슨 이후 또 다시 미국인 인질들이 연달아 참수됐다는 소식에 미국 전역은 경악했다. [12]
[이미지 펼치기・접기]
파일:The_Death_of_an_American_in_Iraq.png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 휘하 유일신과 성전에 의해 참수되기 직전의 미국인 유진 암스트롱
첫 번째 인질인 유진 암스트롱을 참수하며 유일신과 성전은 성명문을 통해 미국의 점령자들이 이라크에서 노인과 아이, 남녀를 구분치 않고 마구 도살하고 있다면서 미국과 영국이 동맹군에 의해 억류 중인 모든 이라크 여성 수감자들을 석방하라는 요구를 계속 무시한다면 24시간 내로 다른 인질들도 살해하겠다고 경고했다. 영상 속에서 유일신과 성전의 수장인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로 추정되는 인물이 닉 버그와 폴 존슨 사건 당시와 비슷하게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을 "개" 라고 부르며 모독하면서 아랍어로 "첫 번째 이교도 인질의 운명은 너희가 두 눈과 두 귀를 열고 보는 앞에서 목이 잘려나가는 것이다. 24시간의 또 다른 시한을 준다. 우리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또 다른 이교도 인질의 머리가 이 이교도의 운명을 뒤따를 것이다. 너희가 삶을 사랑하듯,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기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13]을 위해 살인하는 것을 최대 소망으로 삼는다. 미군과 그들을 돕는 개와 같은 무리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우리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며 사악한 이교도들의 머리를 자르는 건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가 집행하는 것이다. 우리 자매들은 기뻐해도 좋다. 우리가 직접 나서서 그들을 쇠사슬로부터 풀어내 가족들에게 돌려보낼 것이니 말이다."라는 내용의 저주와 증오에 가득찬 내용의 성명문을 낭독한 후 암스트롱을 강제로 바닥으로 눕힌 뒤 직접 참수했고 끔찍한 참수 장면이 여과 없이 담긴 동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했다.[14][15]
[이미지 펼치기・접기]
파일:The_Death_of_an_American_in_Western_Asia.png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 휘하 유일신과 성전에 의해 참수되기 직전의 미국인 잭 헨슬리
그 바로 다음 날 헨슬리도 참수됐으며 그의 동영상 역시 공개되었다. 영상 속에서 성명문을 읽은 유일신과 성전 대원은 헨슬리를 참수하기 직전 "마지막까지 우리 요구가 한 치의 타협 없이 수용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마지막 이교도 인질의 머리도 잘라 너희에게 보내겠다."고 일방적인 최후통첩을 보낸 뒤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헨슬리를 끔찍하게 참수하는 영상을 공개했다.[16]
파일:BFHFB5J7USGJYBOFSAZU434QN4_1.jpg
유진 암스트롱의 죽음에 슬퍼하며 위로를 하는 미시간의 주 주민들
암스트롱의 고향인 미국 미시간 주 힐사이드에서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장례식이 열렸으며 참석한 주민들이 그의 죽음에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그의 형제인 프랭크 암스트롱 역시 눈물을 흘리며 신디 암스트롱에게 포옹을 받고 주민들에게 위로를 받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또한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분쟁으로 인한 지역의 인적 비용과 재건 노력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도 직면 한 위험을 조명 했으며 암스트롱의 유족들은 그를 헌신적인 기술 전문가이자 자신의 업부를 통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노력하는 사람으로 기억 했다고 한 다. 테러범들이 저지른 그의 끔찍한 살인은 국제 구호 및 재건 작업자들로 구성 된 사회의 넓은 공동체에서도 막대 한 손실이였다. 그가 사망한 후에도 몇 년 동안 암스트롱의 이야기는 분쟁 지역에서 재건하고 원조를 제공하려는 노력에 내재된 위험을 침울하게 상기시켜 주었으며 그의 삶과 희생은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환경들 중 일부에서 평화와 재건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 의해 계속해서 기려하고 있다.[17]

이후 잭 헨슬리가 피살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어머니, 부인과 딸, 남동생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부인 파티 헨슬리는 여전히 남편이 살아 있을거라는 희망에 매달리며 살해 소식을 부정하기도 했고 타이 헨슬리는 눈물을 보이면서 "이 일은 하루 이틀 정도 전 세계에 파장을 주겠죠. 하지만 이 일은 우리 가족에게는 앞으로 수 세대 동안이나 파장을 줄 겁니다. 파티는 이제 과부입니다. 그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상 전부의 무게가 13살 어린 딸의 어깨에 내려 앉았습니다."라고 TV에서 성명 문을 냈으며 잭 헨슬리를 최고의 형이자 항상 크게 미소를 짓는 행복하고 선량한 사람이라며 추모했다. 헨슬리의 친구이자 같이 스포츠 클럽을 다녔던 마티 코크런은 잭 헨슬리가 매우 선하고 관대한 사람이라고 추모했으며 [18] 잭 헨슬리의 사업 동료이자 친구였던 빌 멜빈은 그가 아는 가장 선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잭 헨슬리를 묘사하며 추모했다.[19] 또 헨슬리의 가족 친구인 제이크 헤일리는 헨슬리가 자신의 딸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고 노력하며 아끼는 사람이였다고 증언 했다. 이 외에도 잭 헨슬리의 이전 동료나 친구였던 수많은 인물들이 그를 추모했으며 모두 입을 모아 헨슬리가 남을 항상 돕고 웃게 만드는 걸 좋아하고 매우 선한 사람이었으며 미국과 해외의 많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감동 시켰고 최고의 남편이자 이웃, 친구였기에 그가 이런 비극을 당한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다며 슬픔을 표했으며 헨슬리의 계획은 결정 적으로 이라크 사람들을 돕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주변인들의 증언으로 그는 샌들을 신고 골프를 치고, 목사님에게 깨끗한 이메일 농담을 보냈고, 지미 버핏 콘서트에 친구들과 여행을 계획했을 때 이틀 동안 잔디 치마를 입었다. 헨슬리는 피랍 당하기 이전, 2월에 집들이 높은 소나무와 우아한 오크 나무 아래 거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자신이 살고 있던 원래의 동네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며 파티는 기자들에게 자신의 남편이 수리 프로젝트를 평가하고 망가진 박물관들과 학교 건물을 한 데로 묶을 계획을 세웠었다고 밝혔다. 암스트롱과 헨슬리의 수습된 시신이 오열하는 그들의 유가족들에게 전달되었고 그들의 시신은 고국에 안장 되었으며 닉 버그와는 다르게 이들의 안장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헨슬리의 유족은 세상을 떠난 헨슬리를 기억하기 위해 약 800명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토요일에 모여 예배와 추모 식에 참여했다. 헨슬리의 가족들은 그가 49번째 생일인 수요일에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비록 잭 헨슬리는 살해됐지만 마지막 남은 인질인 케네스 비글리는 생환할 수 있도록 기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6. 남은 인질 비글리의 운명

자신의 동료들이었던 암스트롱과 헨슬리가 차례로 무참히 참수되는 걸 지켜본 비글리는 절망에 빠졌으며 그 다음은 비글리 자신 차례일 것이라는 극심한 공포에 빠졌다. 영국 정부는 미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테러리스트와의 협상은 없을 것이라 못박았고 영국 언론은 그의 구명을 위해 영국의 주요 정치 이슈를 케네스 비글리와 관련한 소식으로 바꾸면서 신속하게 인질 구명에 나섰다.

잭 헨슬리가 살해되고 24시간 이후 케네스 비글리도 바로 참수될 예정이었으나 어떤 까닭인지[20] 유일신과 성전은 비글리의 참수를 미루고 대신 김선일 사건 당시 이용했던 사이버 여론전을 그대로 답습하기로 결정했다. 9월 22일 유일신과 성전은 참수 직전 인질들이 착용하는 오렌지색 죄수복을 입은 케네스 비글리가 의자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토니 블레어 총리를 직접 지목하며 구명을 요청하며 자신은 살고 싶으며 죽고 싶지 않다면서 절규하는 내용의 11분 길이의 호소 영상을 공개했다.
파일:652124581357.jpg
수 차례 흐느끼며 절규하는 비글리
<케네스 비글리의 1차 호소 영상 중 발언 전문>

I am Ken Bigley from Liverpool in the Walton district. I am here in Iraq and I think this is possibly my last chance to speak to someone who will listen from Europe.
저는 리버풀 월튼에서 온 켄 비글리입니다. 저는 현재 이라크에 있고 이건 제 말을 듣게 될 유럽의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제 마지막 기회일 것 같습니다.

I need you to be as compassionate as you have always said you are and help me, help me to live so I can see my wife and my son and my mother and my brothers again.
여러분들이 항상 그래왔다고 말했던 것처럼 동정심을 가지고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가 살 수 있도록 도와서 제가 제 아내, 아들 그리고 어머니와 제 형제들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I don't want to die, I don't deserve it and neither do those women held in the Iraqi prisons.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죽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고 이라크의 감옥에 수감된 이라크 여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Please, please release the female prisoners who are held in Iraqi prisons. Please help them, I need you to help, Mr Blair You are now the only person on God's earth that I can speak to.
제발, 제발 이라크 감옥에 수감된 이라크 여성 죄수들을 석방해 주십시오. 부디 그들을 도와주십시오. 저는 블레어 총리,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지금 당신이 유일하게 제가 호소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Please, please help me to see my wife who cannot go on without me. She really can't. And my son. Please help me .....please help me.
제발, 제발 제가 제 아내를 다시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녀는 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로 그녀는 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 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눈물을 흘리며 절규하기 시작한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제발...

I also now realise how much the Iraqi people have suffered. The Iraqis have suffered, the Iraqi children who haven't got their mothers, it's not fair.
저는 또한 이라크인들이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깨달았습니다. 이라크인들은 고통받고 있으며 이라크 어린이들은 곁에 어머니를 두지 못합니다, 이는 온당한 일이 아닙니다.

A child wants his mother, it's of no use keeping a mother in prison, no use whatsoever ever. Let the mothers go back to their children, give these people a chance. Please I beg you.
아이가 어머니를 곁에 두길 원하는 건 당연합니다. 아이의 어머니를 감옥에 가두는 건 어떤 소용도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요. 어머니들이 그들의 아이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이렇게 간청합니다.(흐느끼며)

My wife, she can't even speak very good English. She doesn't know anything, she rings Paul and asks, 'Where's Ken ?'.
제 아내는 영어를 잘하지도 못합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를 겁니다. 그녀는 폴에게 전화를 걸어 "켄은 어디 있나요?"라고 물을 겁니다.

Mr Blair, I am nothing to you, it's just one person in the whole of the United Kingdom that's all. With a family like you've got a family, with children, like your children, your boys, your wife.
블레어 총리, 저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국 전국에서 단 한 명의 시민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당신과 같이 저는 가족이 있고, 자녀와 아내가 있습니다.

Please you can help, I know you can. These people are not asking for the world, they're asking for their wives and the mothers of their children.
제발, 저는 블레어 총리 당신이 저를 도울 수 있다는 걸 압니다. 이 사람들은(납치범들) 세상 전체를 내놓으라 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의 어머니를 원할 뿐입니다.

Please Mr Blair, please show some of the compassion you say you have. Please, I don't know what I can say. Please I wish you could talk back to me, I wish you could tell me what I've got to do. I'm nothing, am only a small man. I'm nothing, I have no political gains. I have no ambitions of grandeur. I made the mistake in coming here, but I've worked a long time in the Emirates.
제발 블레어 총리, 제발 당신이 가지고 있다는 동정심을 약간이라도 보여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저는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제게 답을 해주길 바랍니다. 제가 뭘 해야 하는지 말해주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저는 정치적 힘도 없고, 대단한 야망도 없습니다. 저는 여기(이라크)에 오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저는 UAE에서 오랫동안 근무했습니다.

I just didn't have real fear, not like I have, today. Please, please help me Mr Blair. You know you can, you know you can. Thank you, thank you.
그때만 해도 저는 단지 여기에 오는 것에 대해 지금과 같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제발, 제발 도와주십시오 블레어 총리. 당신이 저를 충분히 도울 힘이 있다는 건 당신도 알 겁니다. 미리 감사하다는 말부터 드립니다.

And....also if there's anyone else that can can help me within the British political world, the Liberal party or the Conservative Party, if you can talk with Mr Blair and assist him.
그리고... 또 영국 정계에서 혹시라도 저를 도울 수 있는 분이 있다면, 보수당이든 자유당이든 간에, 당신이 블레어 총리와 대화할 수 있고 그를 도울 수 있다면, 저를 도와주십시오.

I know things aren't easy, I know things aren't black and white, white and black, but we can overcome this. We can overcome it, I need to live. I need to see my family and these people here need to see their mothers and their wives back in their homes, they do.
상황이 쉽지 않다는 걸 압니다. 상황이 마치 흑백 논리처럼 간단하지 않은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함께 우리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린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살아야만 합니다. 저는 제 가족을 다시 봐야만 하며 여기 이라크인들도 그들의 어머니와 아내가 집에 돌아오길 원합니다. 그들도 정말로 그걸 원합니다.

I've been here a week and they've taken good care of me. They have, under the circumstances, they've taken very good care of me so please anybody, anybody in England, anybody at all that can talk to you Mr Blair and convince Mr Blair to help me and help the Iraqi people.
저는 여기에 일주일 동안 있었고 그들은 저를 잘 보살펴주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그들은 저를 매우 잘 보살펴주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부탁드립니다, 영국의 누구라도, 블레어 총리에게 말할 수 있는 누구든지간에, 그를 설득하여 저와 이라크인들을 돕도록 해주십시오.

This is not only helping me, this is helping the Iraqi people who need help, they don't need bully boys, they need help, they need care and they need compassion - the things you say you are Mr Blair. Please, anyone at all who can help and also to the British people, you are going to be watching because it is on TV I presume.
이건 저만을 돕는 게 아닙니다. 이건 도움이 필요한 이라크인들을 돕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필요한 건 깡패[21]가 아니라 도움입니다. 그들은 보살핌과 동정심이 필요합니다 - 블레어 총리 당신이 갖고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던 것들입니다. 저를 도울 수 있는 누구든지, 그리고 영국 국민에게,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영국 국민 여러분은 TV에 이게 나올 테니 아마 이걸 보고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You look at yourselves and think of your wife or think of your husband not being home, not because they committed a crime but because they just get arrested and are guilty by association, just thrown inside a jail and the families want these people home like you would want your family, your mothers, your wives, your husbands home.
여러분이 같은 상황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이 집에 있지 않은데, 범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단지 그러한 것에 연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고,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혀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가족이라면 당연히 그 사람들이 집에 돌아오길 바랄 겁니다. 당신이라면 당신의 가족, 어머니, 아내, 남편이 집에 돌아오길 바랄 겁니다.

Please, please lobby Mr Blair. Please lobby all of the political parties that you are involved with and ask them to stop and have a look at the Iraqi's plight.
제발, 블레어 총리가 행동하도록 촉구해 주십시오. 제발 여러분과 연관되어 있는 모든 정치적 정당에 촉구해서 정치 활동을 멈추고 이라크인들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해주십시오.

Iraq is suffering and has been suffering too long and it needs its country like you. Would you like the Germans or any other country walking down the street with a gun, in England, in Scotland, I don't think so. And the Iraqis don't like foreign troops on their soil walking down the street with guns, it's not right and it's not fair. We need to pull the troops out and let the Iraqis run their own country, their own destiny.
이라크는 고통받고 있으며 너무 오랫동안 고통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라크는 우리처럼 자주성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은 독일이나 외국의 군인들이 총을 들고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의 길거리를 활보하는 걸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이라크인들도 마찬가지로 외국 군대가 그들의 땅에서 총을 들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건 옳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습니다. 우린 군대를 철수시켜야 하고 이라크인들이 이라크와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이끌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And I ask you all, of course I need help, of course I do, that goes without saying but the Iraqis also need help, they need to be left alone to rebuild their country and their own futures at the speed they want to do it and not be pushed and shoved.
여러분 모두에게 부탁합니다, 당연히 저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라크인들 역시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자주적으로 그들의 국가와 미래를 그들이 원하는 속도로 재건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고 누구에 의해 등 떠밀려서는 안 됩니다.

Pack your bags and get out and let's hope we can come back and visit the country as a guest, as a guest of the Iraqis.
이라크의 외국 군인들은 짐을 싸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라크의 손님으로써 다시 이라크에 방문할 수 있는 상황이 오길 바라봅니다.

Please, especially all the people of Liverpool, we all know how important, how special Liverpool is to everybody, people who speak the truth. I'm not afraid to speak the truth, I never have been, that's probably why all the Liverpudlians have suffered over the years.
특히 리버풀의 시민 여러분,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리버풀이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지 압니다. 리버풀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이죠. 저도 진실을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그걸 단 한 번도 두려워한 적이 없습니다. 이게 아마 리버풀인들이 다년간 여태껏 고초를 겪은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I'm begging you, please, please talk to MPs, talk to the Government, talk to anyone. Please, please look at Iraq and help. Me, yes, I want to live, yes I want to live, but please look and help Iraq, Iraqi women and children, women and children.
제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제발 의회, 정부, 누구에게라도 호소해 주십시오. 제발, 제발 이라크에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저는 살고 싶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라크, 이라크의 여성, 어린아이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십시오.

I've been in Iraq some months now, believe me they have nothing, they have nothing only their pride. They're kind people, please talk to, talk to everybody that you know who can influence people, can talk to politicians, can talk to anybody who can let the decision makers know, people who are close to the Government, who are close to the opposition, Amnesty International, the Red Cross, the Red Crescent, everybody.
저는 몇 달 동안 이라크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부심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이라크인들은 선한 사람들입니다. 제발 여러분이 아는 그 누구라도 사람들을 움직일 영향력이 있거나, 정치인들과 소통할 수 있고, 정책 입안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 정부, 야당, 국제앰네스티, 적십자사, 적신월사에 가까운(접촉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제발 그 사람들에게 호소해 주십시오.

And the Asian community, the Asian community in England, please, please open your mouths and be listened to and speak up for the freedom of Iraq.
그리고 잉글랜드의 아시아인[22] 사회에 호소드립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입과 귀를 열고 이라크의 자유를 위해 목소리를 내주십시오.

이후 검은 화면으로 바뀌어 유일신과 성전이 삽입한 영어와 아랍어로 된 자막 세 개가 차례로 나타난다.

Does a British worth anything to Blair.
한 명의 영국인 시민이 블레어에게 어떤 가치가 있기는 한가?

Will he try to save the hostage or will he not care?
그는 인질을 구하려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신경 쓰지 않을 것인가?

Do leaders really care about their people?
(서방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국민을 정말로 신경 쓰고 있는가?

비글리가 눈물로 호소하며 살고 싶으며 토니 블레어 총리를 지목하며 도와달라고 절규하는 동영상이 공개되자 영국 전역이 충격에 빠져 술렁였으며 가족들 역시 비글리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졌으나 그가 아직 살해되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안도했다. 비글리의 무사 생환을 바라는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조성되었으며 영국 정부 역시 비글리의 구명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약속하기도 했으나 여전히 테러리스트와의 협상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확고히 했다. 영국 내부에서도 여론이 나뉘었는데 테러리스트와 협상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으므로 정부의 입장이 옳다는 측과 명분도 없는 외국의 전쟁 때문에 자국민의 죽음을 방조할 수는 없다는 측이 첨예하게 대립했으며 비글리의 가족들 역시 각자의 입장이 달랐다. 가장 강경한 입장을 가졌던 비글리의 남동생 폴은 토니 블레어를 저격하며 호화 휴가를 즐길 시간은 있으면서 자국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시간은 아까운가?라고 물으며 분노를 터뜨리기도 했다. [23]

그의 태국인 아내 솜밧도 남편의 석방을 눈물로 호소하고 무사 생환을 간절하게 기도했으며 촛불을 켜고 비글리의 무사 생환을 기도하는 모습을 TV에 내보내기도 했다. 비글리의 형제와 아들을 포함한 고국의 가족들도 비글리의 석방을 호소하는 성명문을 냈고 비글리의 어머니는 눈물로 아들의 석방을 간절히 호소하다가 실신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영국 각지에서도 비글리의 무사 생환을 기도하는 촛불 집회가 열렸다.

영국 내의 술렁이는 여론을 의식한 유일신과 성전은 시한을 더 연장하고 비글리의 두 번째 호소 영상을 공개했다. 영상 속 비글리는 좁은 철창에 갇혀 손과 발이 모두 묶여있었으며 가혹한 인질 생활과 희망 고문에 지친 듯 첫 번째 영상에서의 모습보다도 더욱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영상 속에서 첫 번째 영상 속 모습보다도 더욱 처절하게 절규하며 눈물로 호소했으며 한이 맺힌 듯 협상에 임하지 않는 토니 블레어 총리를 저격하며 원망하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24]
파일:bigley1.jpg
당시 한국 언론에도 보도된 비글리의 호소 장면
<케네스 비글리의 2차 호소 영상 중 발언 전문>

I want to tell my fellow Britons that there is no progress, no negotiations to save my life. And no negotiations to end the humiliation of female prisoners in Iraq.
고국의 영국 시민들에게 저는 어떤 진전도 없음을 알리고 싶습니다.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한 협상도 없습니다. 이라크의 여성 수감자들의 굴욕을 끝내기 위한 협상도 없습니다. (눈물에 목이 메)

Tony Blair is lying, lying when he says he’s negotiating. My life is cheap. He doesn’t care about me.
토니 블레어는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협상하고 있다고 거짓말합니다. 제 목숨은 보잘것없습니다. 토니 블레어는 저를 신경 쓰지 않습니다.(원망과 절망이 섞인 듯 절규하며)

Please, please help me and the Iraqi mothers.
제발, 제발 저와 이라크인 어머니들을 도와주십시오. (절규하며)

Mr Blair says he doesn’t negotiate with terrorists. The French are negotiating with these people to release hostages.
블레어 총리는 테러리스트들과는 협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프랑스인들은 테러리스트들과 협상해서 인질들을 구했는데 말이죠.[25]

I’m begging you, I’m begging you to push, push Blair to help me.
제발 이렇게 간청합니다. 이렇게 빕니다. 블레어에게 압력을 넣어서 저를 돕도록 해주십시오.

And my mother is in hospital. They tell me my mother is sick in hospital. You helped her, you want to help her … Have the same compassion for the female Iraqi prisoners.
그리고 제 어머니가 병원에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납치범들) 제게 제 어머니가 병원에서 편찮은신 상태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녀를 도왔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녀를 돕길 원합니다. 똑같은 동정심을 이라크 여성 죄수들에게도 가져주십시오.

All these people want is the female Iraqi prisoners free.
이 사람들이 원하는 건 이라크 여성 죄수들의 석방이 전부입니다.

They don’t want to kill me. They could have killed me a week, two, three weeks ago – whatever.
(괴로운 듯 절규하며) 그들은 저를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은 저를 진작에 죽일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 전이든, 2주 전이든, 3주 전이든, 언제라도요.

All they want is their sisters out of prison and back with their families where they belong.
그들이 원하는 건 그들의 누이가 감옥에서 나와 원래의 가족들과 재회하는 것뿐입니다.

I want to go home. I want to go home. Please, Mr Blair, don't leave me here.
저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 집에 가고 싶어요. 제발, 블레어 총리 저를 여기에 버려두지 말아 주십시오.

And Tony Blair. I’m begging for my life, I’m begging for my life.
그리고 토니 블레어 총리. 저는 제 목숨을 위해 이렇게 간청합니다. 이렇게 빕니다.

Have some compassion please.
제발 연민을 가져 주십시오.
비글리의 두 번째 호소 영상이 공개된 이후 영국 내 여론은 더욱 더 격화되었다. 테러리스트와 협상을 해서라도 비글리를 구출해야 한다는 여론 역시 강하게 일었다. 그럼에도 토니 블레어의 영국 정부는 어떠한 협상도 없을 것임을 다시 재확인했으며 대신 이라크 내 미군과 중동의 이슬람 유력 지도자들과 협력하여 비글리를 구출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26] 이라크의 미군들도 비글리의 위치를 파악하고 구출하기 위해 비밀리에 분주하게 움직였으며 이라크 저항 세력들 중 일부는 케네스의 납치가 정당하지 않다며 그의 석방을 호소하기도 했다. [27] 그 사이에 비글리가 유일신과 성전에서 돈을 노리는 온건한 무장 집단으로 넘겨졌다든가[28], 곧 비글리가 석방될 것이라든가, 특정 여성 죄수가 석방될 것이라든가, 근거 없는 소문들이 떠돌아다니면서 비글리의 생환을 애타게 바라던 유가족들은 희망고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파일:569b814ed130d2d1645d3ff640f8a2bb.jpg
참수당하기 직전 유언을 발언하는 비글리

그러나 비글리의 무사 생환을 간절히 바라던 가족과 영국인들의 눈물겨운 호소와 영국 정부와 이슬람 유력세력들의 노력과 석방 호소에도 불구하고 끝내 협상이 결렬되어 10월 7일 케네스 비글리도 참수를 당하면서 동료들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유일신과 성전은 잔혹한 참수 장면과 비글리의 유언 장면이 담긴 영상 역시 인터넷에 공개했다. 비글리는 참수 직전까지도 여전히 삶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듯 떨리는 목소리로 구명을 호소했으며 자신의 목숨이 위협에 처한 상황에서도 협상에 끝내 임하지 않은 토니 블레어 총리를 저격하며 "당신은 나를 위해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은 걸로 보인다."라고 원망을 드러냈다.
<케네스 비글리의 참수 직전 유언>

Here I am again, Mr Blair and your government, very, very close to the end of my life.
다시 저는 이렇게 블레어 총리와 당신의 정부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제 목숨은 이제 경각에 달려있습니다.

You don't appear to have done anything at all to help me.
블레어 총리 당신은 저를 돕기 위해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I'm not a difficult person. I am a simple man who just wants to live a simple life with his family.
저는 까다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가족과 소박한 삶을 살고 싶은 소박한 사람일 뿐입니다.

These people, their patience is wearing very, very thin and they are very serious people.
이 사람들(납치범들)의 인내심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 심각한 사람들입니다.

Please, please give them what they require, the freedom of the women in Abu Ghraib prison. If you do this the problem is solved, I beg you.
제발, 제발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 주십시오.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의 여성 죄수들을 석방해 주십시오. 당신이 이걸 해주기만 한다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제발 이렇게 빕니다.

To the British people: more than ever I need your help, more than ever I need your voices, to go out into the streets and demand a better life for the females and women who are in prison in Abu Ghraib, in Baghdad.
영국 국민에게: 어느 때보다도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느때보다도 여러분의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길거리로 나가 바그다드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 수감된 여성들의 더 나은 처우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어 주십시오.

I can't say a great deal more. I've said so many things to you at so many different times.
저는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이미 많은 것을 얘기했고 그걸 여러 번 얘기했습니다.

All I can tell you now is that I have very short time left.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이제 제게 남은 시간이 정말로 없다는 것뿐입니다.
[이미지 펼치기・접기]
파일:Kidnapping_and_murder_of_Kenneth_Bigley.png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 휘하 유일신과 성전에 의해 참수되기 직전의 영국인 케네스 비글리
비글리의 유언이 끝난 직후에는[29] 유일신과 성전 대원들이 성명문을 낭독하면서 "시한을 넘겨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누이들이 석방되지 않아 이 인질에게 신의 형벌을 집행 하겠다. 영국 정부는 오만하게도 거짓말만 해왔으며 영국 정부는 국민의 목숨을 별로 심각하게 여기는 것 같지가 않다. 이 사악한 영국인에게 돌아갈 것은 칼 뿐이다." 라고 하면서 주저앉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비글리의 머리를 붙잡고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참수를 시행했다.[30]

각고의 노력과 호소에도 불구하고 비글리마저 참수 당했다는 소식에 영국 전역은 경악과 비탄에 빠졌으며 비글리의 가족들도 그동안의 노력과 눈물의 호소가 모두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극심한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케네스 비글리의 어머니 릴 비글리는 충격으로 인해 실신하였고 비글리의 형제는 "그들은 우리를 완전히 갖고 놀았다. 케네스 비글리가 죽은 방식도 끔찍하지만 우리가 제일 몸서리 쳐지는 건 그들이 우리와 케네스의 희망을 갖고 놀았다는 점이다."라며 분노를 드러냈고 형제들은 각기 비글리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그를 추모했으며 그와 가장 친했던 형제인 폴 비글리는 그의 추도식에 참석한 후 눈물을 흘리면서 "켄은 항상 재밌는 농담으로 모두를 웃겼습니다. 켄은 정직하고, 충실하고, 진중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켄은 잘못된 이유[31]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우리의 켄이 없는 삶은 절대 예전과 같지 않을 겁니다."라며 진심으로 그의 형을 추모했다. 잭 스트로 당시 영국 외무장관은 충격에 빠진 비글리의 아들 크레이그를 직접 찾아 위로하기도 했다. 비글리의 고향인 리버풀에서는 기독교이슬람의 합동 기자 회견이 열렸다. 리버풀 대성당에서는 그를 위한 추도식이 열렸으며 토니 블레어 총리도 해당 추도식에 직접 참석하여 기도문을 읽었다.

영국 정부에서는 확증을 거부한 사안이나 이라크인 현지 목격자와 익명으로 조직의 대변인 역할을 하던 유일신과 성전 대원의 보고에 따르면 비글리는 영국 비밀정보국에서 파견되어 유일신과 성전 조직망에 침투한 이라크인 대원 시리아인 대원의 매수를 받은 유일신과 성전 대원 2명의 도움으로 철창에서 빠져나와 탈출을 시도했다. 비글리와 두 명의 유일신과 성전 대원들은 모두 이라크인 현지인 복장을 하고 헤드스카프로 얼굴을 가려 위장한 채 차량에 타 유일신과 성전의 통제를 받는 마을을 빠져나가 미군의 통제를 받는 구역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안타깝게도 5분만에 발각되어 비글리는 다시 붙잡혔고 그 날 바로 참수가 결정되어 몇 시간 뒤 참수되었다. 그리고 비글리의 탈출을 도운 두 명의 유일신과 성전 대원은 배신자로 몰려 총살되었다.[32][33]

살해 직후 시신이 발견되어 본국으로 송환된 암스트롱과 헨슬리와는 달리 가족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글리의 시신은 현재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비글리의 시신을 본국으로 송환하는데 2억이 넘는 노후 자금을 모두 써버리고 10년이 넘는 시간을 들인 그와 생전 가장 절친했던 동생 폴 비글리는 영국 외무·영연방 및 개발부미군이 비글리의 시신을 찾는 데 거의 도움을 주지 않았으며 사건 이후 영국의 정치인들도 형의 시신을 찾는데 거의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원망했으며 형의 시신을 고향으로 데려오지 못해 형이 여전히 편히 쉬지 못하는 것 같다고 괴로움을 호소했다.

7. 관련 인물


[1] 이후 조지아 주 콥 카운티 애틀랜타 마리에타로 이동 했다.[2] 헨슬리는 미국에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 우편 배달부, 기간제 교사 일을 하며 스포츠 클럽을 운영하고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며 컴퓨터 경영자까지 담당 했으나 투잡, 쓰리잡까지 마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사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헨슬리는 미국 내에서는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움을 깨달았고 이는 그가 이라크행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3] 헨슬리는 딸을 매우 아끼고 사랑했으며 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6월에 휴가 비를 모으기도 했으며 딸인 사라의 중학교에서도 파트타임으로 기간제 교사 일을 맡기도 했다. 2002~2003년 년도에 헨슬리는 기간 제 교사로 일하였다.[4] 잭 헨슬리는 이라크에 온 이후로 거의 매일 남동생인 타이 헨슬리와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연락했으며 타이 헨슬리는 갑자기 형으로부터 연락이 끊겼을 때 불안함을 느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두 형제가 매우 우애가 좋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5] 참고로 이 사진은 유일신과 성전 영상에서도 나오는 데 케네스 비글리가 호소를 하는 영상과 비글리를 참수하기 직전 영상에서도 오프닝에 배경으로 띄우면서 종종 등장한다. 해당 사진을 유일신과 성전이 어떻게 입수했는지는 불명이나 인질들의 자택이나 소지품에서 해당 사진을 입수했을 가능성이 있다.[6] 비록 이라크 내 외국인 근무자들이 미군처럼 직접 총을 들고 이라크인들을 살상하지는 않았으나 미군 관련 업무를 보았기에 이라크인들 입장에서는 이들이 간접적으로 이라크인을 죽이는 데 기여하고 미군과 협조한다고 볼 여지가 있었으며 유일신과 성전 역시 지역 주민들에게 외국인 근무자들을 밀고할 것을 종용했다. 또한 유일신과 성전 같은 극단주의 세력뿐만 아니라 외국인을 납치하면 몸값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단순 무장 강도단도 외국인 납치에 매우 열심이었다.[7] 그러나 이라크에서의 일 자리는 보수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이라크를 찾아오는 외국인 근무자들의 비율도 적지 않았다.[8] 잭 헨슬리의 동료가 남긴 추모 방명록에 따르면 위 사진에서 잭 헨슬리가 입고 있는 땡땡이 패턴의 잠옷 바지는 그의 딸인 사라가 그에게 준 것이었으며 그가 각별하게 생각해서 매일 입었던 바지였다고 한다. 잭 헨슬리가 그 만큼 자신의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9] 이슬람 문화에서는 외간 남자와 현지인 무슬림 여성이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금기시하는 데 미군이 이라크 내에 진입한 이래로 이라크 여성을 상대로 성폭행을 저지르거나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이라크인 여성 수감자를 상대로 집단 강간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폭로 되는 등, 테러 단체에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 되고 있었다. 그것이 위와 같은 석방 조건을 내건 것에 대한 배경이었다.[10] In her last broadcast appeal, Mrs Hensley passed on a message from their daughter: "Daddy I miss you and I love you, please come home."[11] 잭 헨슬리의 동생 타이 헨슬리 역시 형의 죽음에 대해 매우 가슴이 아팠다고 토로했지만 테러리스트와 협상하는 것은 자신의 형 같은 사람이 앞으로 더 나오는 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협상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원망하지 않는다고 밝혔으며 알 자르카위가 사망했다는 소식에는 정의가 실현됐으며 그가 죽어 마땅하다고 말했으나 크게 기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12] 유일신과 성전은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를 참수하기 직전에 두 인질에게 모두 안대와 오렌지색 죄수복을 강제로 착용시켰으며 닉 버그, 폴 존슨, 김선일, 코다 쇼세이, 그리고 케네스 비글리와는 다르게 이들에게는 참수 직전 유언을 발언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13] 알라[14] 유진 암스트롱을 참수하는 영상이 유일신과 성전의 역대 인질 영상들 중에서 제일 극악 무도하고 잔인한 영상 중 하나로 꼽힌다.[15] 현재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유진 암스트롱의 처형 영상의 경우, 자르카위가 연설을 하는 부분은 삭제 된 채로 편집한 버전이 돌아다니고 있으며 풀 버전의 경우에는 유진 암스트롱을 참수하기 직전에 성명문 낭독이 무려 6분 이상이나 지속 된다. 또한 테러범들이 연설 문을 낭독하는 중에는 유진이 흐느끼고 있는 소리도 들린 다. 다른 인질들의 경우에는 보통 성명문 낭독이 1분이나 2분 반이 지나면 바로 처형 개시이나 유진 암스트롱은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성명문을 낭독 하였다.[16] 어째서 인지 처형 영상에서는 잭 헨슬리의 이름이 "Jack Kensley"라고 잘못 써져 있다.[17] 다만 헨슬리와 비글리의 유족들은 적극적으로 미디어와 언론과 소통하며 인질의 사연을 나누고 구명을 호소한 것과는 달리 암스트롱의 유족은 언론과의 접촉을 극구 피해왔으며 유진 암스트롱의 형제인 프랭크 암스트롱과 다른 유족들 역시 언론과의 공개 인터뷰를 모두 거부하고 조용히 유진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태도만 보였으며 암스트롱 가와 결혼으로 맺어진 사촌인 민타 데이버스 (Minnta Davis)만이 오직 인터뷰에 응했다. 이 때문에 유진 암스트롱의 경우 다른 인질들인 헨슬리와 비글리와는 달리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었는지, 사건 이전에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 알려진 정보가 매우 부족하며 CNN이 공개한 사진과 두 가지 흑백 사진을 제외하면 공개된 사진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18] He'd give you the shirt off his back.[19] Overall, Jack was one of the kindest souls I've ever known.[20] 여러 추측이 있다. 유일신과 성전이 미국보다는 영국에게서 더 협상의 가능성을 보았을 수도 있으며 또한 케네스 비글리가 인질들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환갑이 넘은 연장자였다는 점도 기인했을 가능성이 있다.[21] 문맥상 영국-미국 등 이라크를 압제하는 서방 국가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22] 문맥상 한중일의 동아시아인 사회가 아닌 영국내 중동 또는 남아시아 출신의 무슬림 사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23] 그는 이후 알 자르카위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그의 단체에 살해된 유족들의 인터뷰를 진행했을 때 가장 격하게 반응하기도 하며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그 자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고 죽어 마땅한 인간이었죠. 그는 지옥에서 썩을겁니다. 세상은 매우 사악한 사람 하나를 없앤 셈이죠. 그는 그가 천국에 갈거라 생각하겠지만 저는 그가 지옥에 갔을거라 확신합니다."[24] 이후 미군에 의해 팔루자에서 케네스 비글리가 억류됐던 장소로 추정되는 가옥이 발견되었는데 그곳에서 유일신과 성전의 휘장, 테러범들이 착용한 복면, 비글리가 갇혀 있던 철창, 피묻은 단검, 족쇄 그리고 각종 고문 기구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해당 가옥은 비글리 이외에 여러 다른 인질들도 수용됐던 장소로 추정되어 비글리 역시 고문당했는지의 여부는 그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으면서 알 수 없게 되었다. 김선일의 경우에는 구타와 같은 육체적 고문은 당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25] 케네스 비글리의 호소 영상이 공개된 시점 이전 이라크에서 무장 세력의 인질이 된 프랑스인 기자들이 몸값을 조건으로 석방된 사건을 가리킨 것이다.[26] 이후에 밝혀진 사실이나 영국 정부는 유일신과 성전과 그 어떠한 교신도 하지 않은 미국 정부와는 다르게 물밑으로 유일신과 성전의 연락책과 접촉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들이 완강하게 석방 조건을 수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고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또한 영국 비밀정보국은 비글리를 억류하던 두 명의 유일신과 성전 대원을 매수하여 그의 탈출을 돕도록 종용하기도 했다.[27] 당시 이라크에서는 미군과 전투하기는 했으나 외국인 인질 납치나 참수에는 관여하지 않고 해당 행위를 비판한 무장단체도 많았으며 유일신과 성전이 외국인 민간인을 납치하고 참수하는 것을 잔인하고 무익하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김선일이 참수된 직후 해당 행위를 비인간적이라고 비판한 이라크 무장 세력들도 존재했다.[28] 케네스 비글리가 적어도 유일신과 성전 밑의 또다른 하부 조직으로 넘겨진 것은 확실해보인다. 암스트롱과 헨슬리를 참수한 조직과 비글리를 참수한 조직의 기장이 다르며 영상이 촬영된 장소 역시 상이하다. 비글리가 다른 하부조직으로 넘겨진 시점은 그의 첫 번째 호소 영상이 공개된 이후로 추정되며 그가 왜 다른 하부 조직으로 넘겨졌는지는 그 이유가 불명이다.[29] 비글리는 유언을 마치고 침묵하다가 고개를 숙이고 부동 자세로 있는다.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와는 다르게 케네스 비글리는 안대를 안 쓴 상태로 참수 당했다.[30] 참고로 헨슬리와 비글리는 참수를 당하기 직전에도 그냥 무감정 같이 부동 자세로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만 보여주나 유진 암스트롱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겨 날 위험을 직감한 듯이 몸을 앞 뒤로 움직이면서 공포에 벌벌 떠는 모습을 보여주며 비명도 제일 처절하게 질렀다. 이 때문에 헨슬리와 비글리는 살해를 당하기 직전에 이미 고문을 받아서 정신이 황폐해져 있었거나 아니면 운명을 이미 담담하게 받아들인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31] 비글리가 납치 살해되어 전세계에 그의 모습이 방영된 것을 가리킨다.[32]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주장이나 아부 아미르라는 가명의 유일신과 성전 대변인은 비글리가 다른 인질들과는 다르게 매우 협조적이었고 대원들의 신뢰를 샀으며 영국 내에서의 협상 가능성을 유일신과 성전 역시 높게 보았기에 그를 계속해서 살려둘 계획이었으나 그가 탈출을 시도했고 해당 소식을 들은 자르카위가 인질을 참수하라는 지시를 내려 어쩔 수 없이 참수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비글리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그를 죽이게 되어 유감이었다는 매우 이례적인 사실까지 밝히기도 했다. 해당 주장이 사실이라면 비글리는 탈출을 감행하기 직전까지 최대한 납치범들의 동정을 사고 대화를 시도하려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33] https://www.smh.com.au/world/middle-east/bigley-tried-to-escape-20041011-gdjwa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