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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폭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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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폭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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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6월 이전4. 폭풍전야5. 기나긴 폭염6. 가뭄7. 해외 사례8. 여담9.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d26b1dc0746ec682158b6ee6e9b11af4.jpg
파일:img_5b46021a36029.jpg
좌측 하단의 씨 발언이 인상적이다.[1]

1994년 여름을 강타했던 폭염.

2. 상세

대한민국 기준으로 20세기 최악의 폭염이자 기상학자들이 현재에도 첫순에 놓는 전설적인 가뭄이다.[2][3] 한국에서 1932년, 1939년, 1942년, 1943년 등의 아주 오래전의 폭염이 잊힐 쯤 가공할 폭염이 닥쳐 20세기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다.[4] 아직까지 이견이 있지만 일부 학계에서는 1994년을 기준으로 동아시아몬순이 변했다고 볼 정도다. 그 덕에 더위가 지속된다 싶으면 비교대상으로 항상 언급된다. 일사병 사망자가 속출했으며 아스팔트 바닥에서 계란 후라이가 가능했다.

1994년 시점으로 87년 전부터 기상 관측이 시행된 이래로 수많은 여름 폭염이 있었지만 94년 더위가 지금도 유별난 취급을 받는 이유는 옛 시절의 빈번하게 일어났던 극심한 폭염을 뒤로 하고[5] 1954년부터 1993년까지 거의 40년 동안 한여름철에 특별히 눈에 띌 만한 극심한 폭염이 관측되지 않았기 때문이다.[6] 1959년 8월 3일36.2°C를 기록한 후 19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1978년 7월에 다시 36°C를 넘겼을 정도로 이 사이의 기간은 극심한 폭염이란 찾을 수 없었다.[7] 게다가 1979년부터 1993년까지는 15년간 6번이나 폭염이 없었다. 1960~1980년대에는 지금이라면 상상할 수 없을 이론인 지구한랭화가 자주 언급되기도 했고 평균기온 상승으로 지구 한랭화가 잊혀져갈 즈음인 1993년에도 여름철에 인상적인 저온 현상이 찾아왔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찾아온 1994년의 폭염은 당시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기에 충분하였고 괜히 노인들이 "평생을 살면서 이렇게 더웠던 적은 없었다"고 증언한 것이 아니었다.

3. 6월 이전

3월에는 1994년 중 유일한 이상 저온이 찾이왔으나 3월 31일부터 기온이 매우 크게 올라 4월에는 평년 기온을 크게 웃도는 등 심상치 않은 전조를 보였다[8]. 대구는 4월 말부터 26~28도가 연일 기록되더니, 5월 1일과 9일에는 31.3도가 기록되는 등 상당히 심상치 않은 날씨를 보여왔다.

4. 폭풍전야

6월 17일에 서울에서 34.7˚C까지 오르는 등 폭염이 시작되었고 이후 어쩡쩡한 장마가 지나가고 7월이 시작되자 재차 시작된 폭염은 9월 초순까지 길게 이어졌다.[9][10]

5. 기나긴 폭염

7월 9일최저 25.5˚C[11]가 관측되었으며 그 뒤는 그야말로 헬게이트 오픈. 최저기온만 해도 7월 13일에 26.8˚C를 기록한 뒤 3일 이상 열대야가 이어졌으며[12], 17일에 잠시 열대야가 끊겼지만 귀신같이 다음날에 열대야가 복귀했고 월말인 31일까지 악착같이 열대야를 유지시키고야 마는 위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가장 더운 최저기온이 7월이 아니라 8월에 기록되었으니 그야말로 공포. 게다가 대구에서는 8월 31일 37.7°C, 9월 1일 37.5˚C를 기록해 1944년 9월 1일에 기록했던 37.2˚C를 넘어선 폭염을 보이기까지 했다.

당시 대구직할시는 7월 12일에 39.4도를 기록하면서 해방 이후 당시 기준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 심지어 7월의 대구 월 평균 기온은 관측이래 유일하게 30°C가 넘는 30.2°C였고 서울도 28.5°C로 역대 최고 기온을 기록했다. 이 때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3,384명이라는 기사가 나왔으나 이는 '초과 사망자'라는 개념을 오해한 것으로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일단 1994년 폭염 때 온열질환으로 인한 사망자는 92명이라고 한다. # 당시 전국 폭염일수는 무려 29.4일을 기록했고 서울에서는 열대야35일이나 발생했다. 몇몇 사람들은 작년에 올 더위가 올해 더위에 이자까지 얹혀서 왔다고 할 정도였다.[13] 1994년의 여름과 2018년 여름의 습도를 비교해 보면 1994년 여름의 평균습도가 10% 가량이나 더 높은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렇게 높은 습도는 불쾌지수를 높이는데 크게 일조를 하게 되었다.

대구 등지에선 이 해의 폭염 때문에 다음해인 1995년 여름에도 폭염이 찾아왔는데도[14] 별다른 조명을 받지 못 했다.[15]

이후에도 한여름이 다 끝난 9월 중순~12월 말에도 어느 정도 식었지만 여전히 평년보다 높은 기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계속 더웠던 것은 아니고, 중간중간에 비가 내려서 기온이 일시적으로 내려가기도 했다.[16]

6. 가뭄

파일:img_5b46056a048c2.jpg

덤으로 폭염에 가뭄까지 겹치면서 농업용수는 물론 생활용수조차 공급에 차질을 빚었는데 7월 초에 조기 종료된 장마 탓에 전국 대부분 지방의 강수량이 평년보다 훨씬 적어 농민들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남원시는 7월 한달 간 강수량이 단 1mm에 그쳤으며 거창, 정읍에서도 10mm 미만의 강수량을 보였다(...). 폭염은 계속되고 비가 오지 않아 가뭄 피해가 심각하여, 오죽하면 태풍이 오기를 기대할 정도였으며[17] MBC에서는 타는 들녘에 사랑의 물줄기라는 특별 생방송을 편성하여 각 지역 가뭄이 극심한 지역에 양수기를 배달시키는 방송을 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7월 말에서 8월 초에 잇따라 올라왔던 7호 태풍 월트, 11호 태풍 브랜던, 13호 태풍 더그바람은 그리 강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를 뿌려줘 효자태풍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어느 정도냐면 농민들이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만세를 불렀을 정도였다 그 때문인지 보통 태풍 관련 뉴스에서는 농민들이 탄식하는 장면이 많지만 당시 뉴스의 농민들은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다들 축제 분위기였다(월트 내습 소멸 직후).[18]

이 정도로 심각했던 가뭄에도 불구하고 1994년의 벼 작황은 풍작을 기록했으며 오히려 일조량이 적고 저온이 심했던 전년보다 수확량이 양호했다고 한다.

7. 해외 사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폭염/사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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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부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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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담

공교롭게 김일성사망과도 때가 겹쳤기 때문에 항간엔 일사병으로 죽은 것 아니냐는 추측도 있었으며[19] 당시 군인들은 혹독한 폭염에 겹친 초긴장 정국 덕분에 잊지 못할 여름을 보냈다.[20]

이 해의 압도적인 폭염 때문에 1994년의 폭염은 하나의 기준점이 됨으로써 이후의 폭염은 항상 1994년과 비교를 면치 못하고 있다. 2016년 폭염과 같은 비교가 될 만한 케이스는 최고 온도는 갱신되었지만 폭염, 열대야, 가뭄이 지속된 일수는 아직도 1994년이 더 앞서고 그로인한 농작물 및 인명피해도 1994년의 기록이 아직도 더 앞선다.[21] 오히려 혹서기의 체감온도는 2010년대 이후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드물지만 여름에도 미세먼지가 오는 경우도 있다.

여론 조사에 의하면 가정용 에어컨은 1994년 폭염 사태를 기점으로 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해 2000년대 들어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인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1994년 폭염은 한국내의 에어컨 수요를 폭증시키고 에어컨을 대중화시킨 폭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22]

폭염의 메인스트림 지역이었던 대구에선 복식의 변화까지 일어날 지경이었다. 불과 1993년까지만 해도 대구 지역에는 남성의 복식이 다소 보수적이었고 때문에 장년층은 물론 청년층에까지 다리털을 노출하는 반바지가 예절에 어긋나는, 즉 집안에서나 입고 다니던 것이었다.[23] 그런데 이 때 하도 덥다 보니 스리슬쩍 허용되었다.

폭염이 찾아오기 1달여 전인 1994년 여름 날씨 전망에서는 올해 여름도 서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1993년 여름이 1980년, 1987년, 2003년과 함께 한반도 기상관측 역사상 광복 이후 최저 여름 기온을 모조리 쓸어담은 이상 저온 현상을 보였기 때문에[24], 1994년은 1993년보다는 덜하지만 서늘할 거라고 대부분 전망했지만 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25]

그리고 24년 뒤 한반도에 이 해를 뛰어넘는 역대 최악의 폭염이 찾아왔다. 물론 더위가 찾아온 시점은 2018년이 1994년보다 한발 늦었다.[26] 2018년 기온이 조금 더 높긴 했어도 에어컨 보급 비율을 생각하면 1994년 여름이 더 고통스러워서 오래 기억되고 있다.[27] 다만 7월의 열대야 일수(1994년은 8.9일, 2018년은 7.8일)와 폭염일수(1994년은 18.3일, 2018년은 15.5일)는 아직도 1994년이 1위다.[28][29] 또한 전국 여름 3개월 평균기온은 1994년이 2018년보다도 0.1도 높다.[30] 최고기온은 갱신을 수차례 했어도 평균기온은 2018년조차 한수 접는다는 것은 그만큼 1994년 폭염이 기간이 길고 광범위했다는 것으로 정말 지독했던 폭염 그자체였다. 다만 서울의 여름 평균기온은 2018년이 더 높다. 그리고 아직 7월의 기온은 1994년이 더 높다. 게다가 서울 기준 2018년 7월은 1994년 이후 최악의 7월 수도권 폭염인 2021년 7월에 평균기온이 경신된다.[31] 그렇지만 그 2021년 7월도 1994년 7월을 0.4℃ 차이로 따라잡지 못해[32] 1994년 7월이 아직도 본좌 중의 본좌임을 입증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9. 관련 문서



[1] 김일성 사망 당시 박보희씨가 북으로 월북했다 돌아온 과정.[2] 기온이 아니라 가뭄 일수 기준, 21세기 지구온난화가 제대로 두각을 보이기 전의 기록이라서 더 특이할 만하다.[3] 단 2018년의 7-8월을 관통하는 폭염이 발생한 후에는 2018년을 첫순에 놓는 학자들이 많아졌다.[4] 1970~1980년대부터는 한국에서 본격적인 도시화가 진행되고 세계적으로 지구 온난화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기존의 열대야 기록까지 갈아치워 한반도의 열대야는 1994년이 관측 역사상 최대이다.[5] 일일이 열거해 보면 정말 쟁쟁하다. 1917년 6월 36.7°C와 7, 8월 36.6°C, 1919년 8월 37.5°C, 1922년 8월 36.3°C, 1929년 8월 36.7°C, 1930년 8월 37.4°C, 1932년 8월 37.2°C, 1939년 7월과 8월 각각 37.7°C38.2°C, 1943년 8월 38.2°C, 1945년 8월 37.0°C, 1946년 7월 36.7°C, 1949년 8월 37.7°C, 1950년 8월 36.9°C, 1958년 6월 37.2°C. 게다가 36°C를 턱걸이한 1918년 7월, 1921년 8월, 1931년 8월, 1942년 7월, 1944년 8월, 간발의 차로 턱걸이에 실패한 1923년 8월, 1933년 8월도 있다. 게다가 나머지 해들도 1913년처럼 어지간히 저온이 심하지 않은 이상 33~35°C는 꼭 기록한 해가 더이상 열거하기 곤란할 정도로 많다. 그러나 극값이 이렇게 높아도 최저기온은 비교적 양호했고 정작 1994년 여름처럼 더위가 길고 늦게 이어지는 경우는 정말 손꼽히게 드물었다.[6] 1958년 6월같은 특수한 경우는 논외. 나머지는 몇몇 해를 제외하고 전부 한여름인 7~8월에 33~35°C가 한계였다.[7] 1978년 이후 다시 36°C를 넘긴 시기가 서울 올림픽 직전인 1988년 8월이며 다시 넘긴 것이 이 1994년 여름이다. 이후 1997년 7월(36.1℃), 2004년 8월(36.2℃), 2012년 8월(36.7℃), 2015년 7월(36.0℃), 2016년 8월(36.6℃), 2018년 7월(38.3℃)과 8월(39.6℃), 2019년 7월(36.1℃)과 8월(36.8℃), 2021년 7월(36.5℃), 2022년 7월(36.1℃) 등 36도를 넘어섰다.[8] 서울 기준 4월 평균 기온이 15.2°C. 1998년 4월에 0.4˚C 차이로 갱신되긴 했으나 저온일수가 0일이었고(그 1998년 4월도 월초에 저온이 있었다.) 2022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2위이다. 4월 상순 평균기온은 13.8˚C로 역대 2위이며 이것도 2021년 4월 상순이 14.1도를 기록하기 전까지는 1위었다.[9] 물론 9월 초 단독으로 놓고 보면 1997년 등 더 높은 기록도 존재한다.[10] 8월도 태풍이나 강수 덕에 폭염이 좀 덜했던 것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2018년마저 능가했을 것이다.[11] 역대 최초 7월 초순 열대야지만 이후 2022년과 2023년에는 아예 2년 연속 6월에 열대야가 발생했고 2022년은 이보다 이르게 발생한 날이 7일이다.[12] 워낙 튀는 기록인지라 뒷날이라도 이런 현상이 다시 재현되는 날이 오지 않을 줄 알았으나 2021년 7월이 1994년 7월처럼 13일에 26˚C를 기록한 뒤로 3일 이상 열대야가 유지되어 1994년 폭염의 악몽을 떠오르게 하고 있고 2022년에는 아예 1년도 멀다는 듯 7월 상순에 4일 연속 26도 이상의 열대야를 기록했다.[13] 반대로 전 년도였던 1993년 여름은 되려 7월과 8월이 평년 6월과 비슷한 수준에서 그쳤고 서울 기준으로 아무리 더워도 31.2도를 넘지 못 했을 정도였다. 오히려 최고 극값을 5월말에 기록했을 정도다.[14] 8월 14일 대구에서 39.2도를 기록했다. 1994년 최고 극값인 39.4도와 별 차이가 없다.[15] 서울과 수도권, 강원영서 사람에겐 의아하게 들릴 수 있을텐데 1995년은 위도형 더위의 전형으로 서울과 수도권, 강원영서는 그닥 기억에 남을만한 폭염은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8년 여름 때문에 2019년 여름에 21세기 중 두번째로 높은 극값을 기록했고 2020년 기준으로 사상 7번째로 더운 여름이었으며 수원은 아예 1994년 8월과 엇비슷한 평균을 기록했는데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것과 비슷하다.[16] 성수대교 사고가 일어난 10월 21일에는 폭우와 이상 저온이 왔다.[17] 동월 25일 신경민 당시 MBC 뉴스데스크 임시 앵커'이렇게 태풍을 손꼽아 기다려 본 적이 있을까'라는 말을 한 바 있었다. 반면 KBS 뉴스 9에선 오프닝 타이틀마저 가뭄 장면으로 채웠고 이윤성 앵커는 FM대로 멘트를 내보냈다.[18] 참고로 태풍 월트는 일본을 지나면서 약해진 채로 얌전히 비구름을 몰고 오면서 비만 좀 세차게 뿌리다가 생을 마감했다. 진정한 효자 태풍[19] 사실 김일성이 숨진 7월 8일 당시에도 이미 경기도 안성 이남 지방에서는 6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폭염이 시작되었던 터라 중북부 지방은 장마가 지속되던 북한 영향으로 덜 더웠을 뿐이다. 아직 7월 초니 일시적으로 폭염이 왔다가 지나갈 거란 예측도 있었지만 7월 9일부터 서울을 포함한 중북부지방도 얄짤없이 폭염 시작, 이 날 기상청에서도 전국적으로 폭염이 오래 갈 것이란 예보를 하였다. 후대에 김일성의 죽음과 폭염을 연결시켜 이야기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실제로는 그때 김일성의 지병이 있는 상태였는데 그 상황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다고 무리하게 활동하다가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20] 공군교육사령부에서 훈련 및 교육을 받던 장병들은 예외였다. 7월 첫 주 외박을 나가서 김일성 사망 소식을 듣고 일요일에 복귀한 후 영내대기가 이어지겠지 하고 망연자실해하던 그 다음주에 대사건이 벌어졌다. 보통 토요일 일과 후에 외박을 나가는게 정상인데, 교육사 장병을 하루 일찍 내 보내면 진주 부근 논 수만평에 물을 댈 수 있다는 소문이 돌더니 2주 연속으로 금요일 일과 후 외박을 내보냈다. 조종사와 방공포병만이 전투병과이고 다른 특기를 가진 장병들은 지원인력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교육 중이었기도 하고.[21] 게다가 1993년에는 5월 말에 이른 더위가 찾아왔지만, 여름은 서늘했고, 9월 초의 늦더위를 제외하면 10월까지 저온이었다. 자세한 것은 후술.[22] 지금이야 언제든 집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있지만 1994년 당시의 에어컨은 스텐드 20∼25평형을 기준으로 1대 당 가격이 당시 직장인 한 달 월급을 상회하는 200만 원대에 판매했던 고가의 가전제품이었다. (<시장물가> 에어컨가격 작년보다 10∼15% 올라(1994. 05. 25 연합뉴스)) 현재는 지하철과 버스에는 냉방기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1994년에는 그렇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하철 역사에는 스크린도어는 물론 펜스조차도 없어서 전동차가 내뿜는 열기에 그대로 노출되어야 했다. 그나마 에어컨이 많이 대중화된 상황이었던 2018년과는 달리 당시에는 에어컨의 예상수요 자체가 적다보니 물량 자체가 적었던 상황이라 에어컨 물량대란은 이 때가 더 심했다. 가정용 에어컨은 물론 차량용 에어컨에도 변화가 왔는데 바로 1995년부터 도시형 버스의 냉방화가 시작된 것이다. 냉방화와 함께 버스 이용객들이 더 이상 여름에 불편을 겪지 않게 되었다.[23] 물론 1993년에 20~30대라고 해도 현재 50~60대다.[24] 어느 정도냐면 서울은 5월 29일에 31.9°C를 기록한 이후, 5월 29일보다 높은 최고기온을 기록한 날이 없었을 정도였다. 그 7~8월에도! 결국 기록이 깨지지 않아서 그해 최고 기온 1위를 달성하였다. 이 점은 1980년 여름하고도 비슷하다. 심지어 1980년은 6월 동쪽 지역 이상 고온 현상 때문에 폭염일수는 있었으나 1993년은 폭염, 열대야일수 모두 0일이다. 단 6월에 대구에서 폭염이 있긴 했다. 1980년은 북태고도 남부지방에 약하게 간접 영향을 줬으나 1993년은 완전히 전무했다.[25] 여담으로 2018년에도 1월 말~2월의 기록적 한파와 봄철 일부에 이상 저온이 찾아와서[33] 2017년[34]처럼 여름이 평년과 비슷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5월 말부터 저온 거의 없이 다시 올라서 7월 중순부터는 큰 폭염이 찾아왔다.[26] 2018년은 7월 초에는 한때 선선했던 적도 있다.[27] 게다가 이전해인 1993년 여름은 역대급 이상저온으로 한여름에도 가을날씨의 기온일 정도로 선선했기 때문에 이 해 체감상 폭염 정도는 역대급으로 기억될수 밖에 없다.[28] 비교해 보면 2018년과 1994년 모두 빨리 끝난 장마로 폭염의 배경은 비슷하였으나 2018년 여름은 7월 13일~8월 16일경이 무자비하게 더웠고 1994년 여름은 7월 초~8월 17일경까지 더위가 이어져서 좀 더 길었다.[29] 게다가 처서 이후 확연히 더위가 누그러진 2018년과는 다르게 1994년에는 9월 1일에 대구가 37.5°C 까지 오르며 9월 전국 역대 최고기록을 다시썼고 9월 중순 이후로도 연말까지 이상 고온이 이어졌다.(물론 2018년 11월부터 다시 올라 2019년 대부분이 이상 고온을 기록했고 2020년 초에 초이상 고온으로 매우 길게 이어지기도 했지만) 이 기록은 20년 뒤인 2014년 5월 31일에 근접하게 되는데 아마 이 때에도 관측 장소가 변경되지 않았다면(대구는 2013년 10월에 관측 장소를 옮겼다.) 아예 이 때 기록을 넘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위의 기간면에서는 2018년과 결을 달리한다. 그리고 9~12월도 평년보다 높았다. 1939년도 늦더위가 강력하게 이어졌으나 9월 하순이 저온이었고 열섬 현상이 없는 일제 시대인 만큼 최고기온은 높아도 최저 기온이 낮아서 평균기온은 별로 높지는 않았다. 그래도 서울 기준 21.3°C로 평년보다 높았다. 한마디로 평균기온은 1994년이 탑이다. 다만 중부지방은 8월 하순에는 심하지는 않았고, 9월은 평년 수준, 10~12월만 높았다. 그러나 사실 1994년 자체가 3월만 제외하고 모두 평년 이상을 기록했다. 그리고 2018년이 폭염의 세기는 더욱 강력했다. 40도를 넘겼을 정도니 게다가 초열대야까지...[30] 7~8월로만 따져도 1994년 7월 27.7도, 8월 26.7도, 2018년 7월 26.6도, 8월 27.1도. 6월까지 포함하면 2018년 6월 22.0도, 1994년 6월 21.4도이다.[31] 2018년 7월 27.8℃, 2021년 7월 28.1℃[32] 극값도 1994년 7월에 비해 1.9℃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