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004년 2월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 이승연이 일본군 위안부를 주제로 누드집을 촬영한 후 일어난 사건.2. 사건
이승연은 1990년대에는 황금기를 누린 배우였으나[1] 1998년에 운전면허 불법 취득 사실이 공개된 것을 비롯해 이런 저런 이유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2] 그러던 와중인 2004년에 이승연은 누드 화보를 촬영했다.[3]문제는 누드집이 다룬 주제가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것. 화보집에서 위안부로 분장한 이승연은 욱일기와 일본군 등을 배경으로 한복을 입고 있었다. 언론에는 수위가 낮은 사진 몇 컷이 공개되었다.
당연하게도 화보는 전국적인 공분을 샀다. 피해자 할머니들은 눈물을 쏟으며 제작 중단을 요구했다.
“이승연 씨 우리 맘 아픈 거 알아요? 일본놈들한테 당한 거 어디다 말도 못 해. 누구한테 말할까? 부모, 자슥(자식)한테도 몬 하는 이야기를 이승연 씨가 왜… 일본놈들한테 사죄도 못 받고 보상도 못 받는데 우리 2세들이 이러면 돼. 일본놈들이 그러면 못 하게 해야지. 이승연 씨 빚지고 할머니들 팔아서 돈 갚으려다가 탄로 나니까 ‘할머니들 위해서 했다’ 그러는 줄 모를 줄 알아요. 할머니들이 바보가 아니야. 우린 그런 추잡스런 돈 안 받아요. 그러니까 사진하고 원본 다 갖고 와서 불태워요. 지금 서울 갈 것도 없어. 전화해서 대표 오라고 해. 이승연 씨 혼자 한 일이 아니잖아. 그 사람들 싸고 돈다고 해결되는 게 아냐. 다 오라고 해. 사진 다 불태우기 전에는 우리 사죄 못 받으니까 그렇게 알아요.”
이승연이 사죄하러 찾아갔을 때 피해 할머니께 들은 말.
이승연이 사죄하러 찾아갔을 때 피해 할머니께 들은 말.
이승연과 기획사 네띠앙 엔터테인먼트는 그야말로 비난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이전부터 크고 작은 물의를 빚던 이승연은 이 사건이 결정타가 되어 연예계에서 거진 쫓겨났다. 네띠앙 엔터테인먼트의 박지우 이사[4]는 머리까지 삭발하면서 억울함을 주장했으나 공개 시사회를 제안하는 등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는 발언을 해 사태를 더 심화시켰다.
이승연의 영상 프로젝트 '여인' 촬영부터 폐기까지
ETN '쏜데이 서울' 김구라, 황봉알, 노숙자가 정리하는 이승연 누드 사건
국민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끓어오르자 이승연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아가 무릎을 끓고 공개 사과했지만(당시 기사) '퍼포먼스'라는 비아냥을 들었고, 이후 해당 기획사 대표 명의로 정대협 측에 영상자료 폐기 약정서를 공문으로 보내 위안부 할머니들 앞에서 사과와 함께 촬영 원본 필름 전부를 소각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때 박지우 이사는 2월 19일 필름을 소각하는 현장에서 두고두고 까일 실언을 했으며 그 발언의 포스가 워낙 강력해서 MBC의 프로그램이었던 코미디하우스의 10분 토론 코너에서 성대모사 패러디까지 했을 정도였다.[5] 영상 보기(9분 46초부터) 실제 인터뷰를 본 시청자들은 박지우 이사가 연기를 하거나 심지어 정서불안 장애가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할머니들: 역사를 왜 태우려고 하냐. 태우지 마라.
박지우: 할머님들이 싫다고 하셨잖아요. 놓으세요. 진짜로!! (몸부림치며 울부짖음)
기자: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박지우: 그쪽이 더 잘 아시잖아요.
기자: 웹상으로 유출이 안 됐는지, 그리고 후에 위안부에 대한 다른 계획이 있으신가요?
박지우: 지금 저랑 장난하세요?
기자: 아니, 만약에...
박지우: 저 미치는 거 보고 싶으세요? 예? 저 미치는 거 보고 싶으시냐고요? 건드리지 마세요, 저도 참을 만큼 참았거든요? 할머니들한테 죄송하다고요!!
(필름 소각 후)
박지우: 시원하세요? 마음들 편하세요? 저도 마음이 후련합니다. 이게 다예요. 절대 유포된 거 없고요.
박지우: 할머님들이 싫다고 하셨잖아요. 놓으세요. 진짜로!! (몸부림치며 울부짖음)
기자: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박지우: 그쪽이 더 잘 아시잖아요.
기자: 웹상으로 유출이 안 됐는지, 그리고 후에 위안부에 대한 다른 계획이 있으신가요?
박지우: 지금 저랑 장난하세요?
기자: 아니, 만약에...
박지우: 저 미치는 거 보고 싶으세요? 예? 저 미치는 거 보고 싶으시냐고요? 건드리지 마세요, 저도 참을 만큼 참았거든요? 할머니들한테 죄송하다고요!!
(필름 소각 후)
박지우: 시원하세요? 마음들 편하세요? 저도 마음이 후련합니다. 이게 다예요. 절대 유포된 거 없고요.
아울러 해당 기획사는 누드집 출판을 포기한다고 말하면서 뒤로는 일본에서 몰래 출판하려던 것이 알려져 다시 비난을 샀다.[6] 이 사건으로 네띠앙은 친일 인사와 관련이 있다는 루머까지 퍼졌고 네티즌도 네띠앙 탈퇴 운동을 전개하면서 많은 네띠앙 사용자가 빠져나갔다.[7] 그 와중에 네띠앙 홈페이지에서는 '네띠앙 엔터테인먼트와 포털사이트 네띠앙은 관계가 없습니다'라는 되도 않는 소리가 공지로 올라왔다.
박지우 이사는 이승연에게는 사진 찍힌 죄밖에 없다면서 비난하려면 자신에게 하라고 이승연을 감쌌는데, 이 때문에 항간에서는 이승연이 기획사의 희생양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이승연 본인의 잘못이 없을 리야 없겠지만 어쨌든 화보집을 기획하고 생산한 회사 측보다는 단지 이승연 개인에게만 비난이 쏟아졌다는 것. 어찌되었든 간에 이 사건은 한국 연예계의 역사에 길이남을 흑역사이자 오점이 되었다.
3. 여담
사건 당시 '위안부 피해 할머니 한 분께서 이승연에게 써 보낸 편지'로 알려진 글이 인터넷 상에 널리 퍼지기도 했다. 관련 중앙일보 기사(인터넷판)얘야.. 나는 너 같은 손녀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니가 나의 썩고 있는 육신을 보지 않았으니, 그렇게 말짱한 입술로 맹랑한 생각을 하였는지 몰라도, 난 그래도 너 같은 손녀라도 있었으면 좋겠단다. 한때 나도 너만큼이나 뽀얀 속살로 벌판을 누비며, 홍조 띈 얼굴로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면서 재잘거리던 너만큼이나 철없던 계집아이 시절이 있었단다. 부자집은 아니어도 건장한 청년 만나서 초가 삼간에 살아도 이쁜 아이 낳아 옥수수 심고 고추심어 나즈막하게 살아가는 것이 소원이었던 사람이었다. 처음엔 무서웠어. 조금 지나니 고통스럽더라. 그래도 세월이라고 시간이 흐르고 차라리 죽을 수 있는 건 행운이라고 여길 즈음 난 고향으로 돌아왔단다. 살아 있다는 것이 악몽이라는 걸 니가 지금 느끼느냐? 나는 수십년을 그렇게 지옥속에서 살았단다. 나는 나를 놓아 버린 것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나는 여자 였던 것도 오래 전의 일이다. 너는 마음만 먹으면 너처럼 고양이 눈을 하고 있는 딸아이를 얻을 것이다. 하지만 내 속에는 아이를 만들 수 있는 땅이 없어. 그들이 다 파서 먹었으니. 수십명의 개 떼들에게 내 몸 하나 먹힌건 그래도 별거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고향이라고 돌아와 발을 디딜 곳 하나 없이 만들어 놓고 개 떼들의 습격이 마치 내 의지였던 것처럼 나를 죄인 취급하던 내 사랑하는 조국이 나의 숨통을 더 조여왔던 것 같다. 내가 너를 미워한다면 그건 네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가 여자이기때문이다. 니가 나를 모른다고 말하지마라.. 나는 그저 너를 대신하여 개 떼들에게 끌려간 것일 뿐이다. 너덜 너덜한 육신을 안고서 돌아와서. 온전한 햇볕 한번 못보고 살아온 내가 지금와서 너에게 사진의 모델이나 되라고 하니까. 내 살아온 것이 오늘 이 꼴을 보려고 했던 것이구나. 나를 동정하지 마라. 내 조국이 나를 버리던 그때부터, 나는 누구의 동정 따위를 원하며 살아온 것이 아니다. 나에게 카메라를 비추지 마라. 내 육신이 비록 너덜너덜하지만 너희들이 아무 곳에나 들이대며 플래쉬를 터트릴 그런 삶은 아니었다. 애야.. 어떤 때에는 네가 무슨 죄가 있을까 싶었다. 동물원 구경 오는 심정 이었을지도 모를 너에게 나를 고스란히 옮겨 놓으려는 내 욕심이 어리석은 것이라 여겼다. 너처럼 부푼 젖가슴을 나도 가졌었단다. 너처럼 고운 등을 나도 가졌었단다. 개 한마리 세워놓고 니가 얼굴에 숯을 바른다고 정녕 네가 내가 될 수 있겠느냐? 네가 그 고운 등을 들이대고 풀어 헤친 저고리 고름 사이로 하얀 젖 가슴을 내민 것은, 사치였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냥 살아도 조국속에 묻힐 것이다. 아마도 내 눈감을 그날까지 나는 그저 개 떼들의 습격 속에서 다행히도 살아온 병들고 썩고 있는 늙은 할머니로 기억될 것이다. 그것이 안타까워, 나인 것처럼 하지마라. 정녕 너는 내가 아니다. 고양이 눈을 하고 있는 얘야 들끓는 사람들을 미워하지마라. 그들이 나였다. 왜 진심을 이해해주지 않냐고 원망하지 마라. 수십년을 소외된 채 사회와 단절된 나도 살아온 땅이다. 내가 언제 너에게 많은 것을 바랬던 적이 있었느냐. 내가 언제 너에게 손을 벌린 적이 있었느냐. 정녕 네가 내가 되기를 원한다면, 조용히 눈감고 기도해다오. 내 젊은 시절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게 평안하게 잠들도록. 그리고 내 힘없는 조국을 그래도 안고 갈 수 있도록. |
사건이 벌어졌을 시기 MBC 신인 개그맨이었던 전환규는 박지우 이사를 패러디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때마침 삭발을고수하던 탓에 외모상의 싱크로율도 컸다.
이외수의 소설 장외인간에서도 이 사건이 언급되었는데 작중에서 친일파에 대해 극단적인 적개심을 가진 한대규란 인물은 이 사건을 "나는 사람들이 자궁암을 놔두고 생리통을 가지고 난리법석을 떠는 것 같았소!"라고 평가했다. 진짜 악질인 친일파 잔당들을 소탕하는 데는 조용하면서 하찮은 여자 탤런트 누드사진 가지고 발광하는 꼴이 우습다는 의미였다.
이승연 사건이 크게 회자된 것뿐이지 사실 대한민국에서는 90년대 초까지도 '위안부'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세간의 인식이 미미했고 매체에서는 '위안부' 출신의 여성들을 피해자라기보다 마치 기지촌의 유엔마담 내지 양공주처럼 그리기도 했다. 심지어 위안부를 소재로 한 에로 영화까지 제작된 적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91년작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지영호 감독)가 있다. 형편없는 망작인데 감독부터가 3류 에로 영화 전문 감독이었다.
그러다가 1991년 8월 14일 김학순이 위안부 생존자 중 최초로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했고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방영되면서 위안부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새롭게 정립했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원작소설 역시 위안부에 대한 성학대가 거의 포르노처럼 소비되었다. 명작인 드라마만 생각하고 원작을 읽어 보면 충공깽 수준으로 저질스러운 묘사가 판을 친다. 21세기 같으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생매장당했을 것이지만 당시에는 인기 소설이었다. 한마디로 약 10여년 사이에 급격하게 대중들의 인식이 바뀌었을 뿐 지난 수십년간 한국 문화 속의 위안부에 대한 시각은 무척 나빴다.[8]
예를 들어 본 문서에도 김구라, 황봉알, 노숙자(나도야) 세 사람이 진행하던 연예정보 프로그램 '쏜데이 서울'에서 이승연과 박지우에게 욕설을 퍼붓는 영상의 링크가 삽입되어 있지만 정작 당시로부터 2년 전에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놓고 창녀라고 모욕한 것이 같은 세 사람이 진행하던 인터넷 방송 '김구라 황봉알의 시사대담'이었다.[9] 네띠앙 엔터테인먼트와 이승연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동시에 해당 사건은 단지 사회적 인식의 전환기에 시범 케이스로 걸려 크게 이슈화되어 철저히 비판받은 것이고 정작 전후의 맥락인 사회적인 인식과 책임에 대한 문제는 제대로 제기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면 이 역시 일리 있는 주장인 것. 심지어 이 사건 못지 않게 심각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도 얼굴에 철판 깔고 비판하는 쪽에 말 없이 합류하지 않았느냐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4. 관련 문서
[1] 1994년 사랑을 그대 품안에로 데뷔 후 대한민국 드라마 역사상 최고 시청률을 찍은 1996~1997년 KBS 주말드라마 첫사랑 하나로 설명 끝.[2] 당시 SBS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 프로그램 '이승연의 세이 세이 세이'가 종영된 것도 이 때였다. 1997년 외환 위기로 공영성 강화 차원에서 지상파의 예능프로그램들이 대부분 종영되던 시기에 방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주연으로 등장했던 KBS 주말드라마 웨딩드레스가 조기종영된 시기였기도 했는데 그것은 세이 세이 세이가 첫 방영되기 약 3주 전의 일이다.[3] 누드 화보 촬영 자체는 2001~2004년 한국 연예계의 유행이었다.[4] '시후'라는 예명으로 가수 활동을 한 적이 있다. 은경표 PD의 비리를 까발린 장본인.[5] 이때 박지우 이사는 전환규, 이승연은 전영미가 연기했다.[6] 과연 일본에서 이런 누드집이 음란물 이상의 가치가 있을까? 오히려 위안부를 성적인 대상으로 한국인 스스로 제공하는 꼴이 되었다.[7] 안 그래도 네띠앙은 당시 유행하던 블로그 운영이 활성화되면서 계속된 유저 이탈로 인하여 적자가 심해지고 있었고, 이 사건 이후 경영난을 겪게 되다가 2년 뒤인 2006년에 파산하여 삐삐 업체로 인수된 뒤 삐삐 사이트로 변경되었다.[8] 이는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이 판을 치던 시기에 연재되었던 것도 한몫했다. 이 소설은 신문에 연재되었는데 당시에는 신문 편집부에서 판매부수를 올리기 위해(야할수록 많이 보면 신문 판매 수입이 올라가니까) 소설이나 만화를 연재하는 작가들에게 강도 높은 수위를 주문하는 경우가 많았다.[9] 김구라는 시사대담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공권력의 과도한 진압에 대한 항의를 비꼬면서 "80여명의 창녀들이 경찰에 인권 관련 고소를 하고 전세 버스를 나눠 타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하러 갔다. 창녀들이 전세 버스에 나눠 탄 것은 옛날 정신대 이후 최초일 것"이라는 위안부 희생자들을 윤락녀로 모는 망언을 한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