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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내의 외교공관 | ||
주한프랑스공사관 駐韓法國公使館 | légation de France en Corée | ||
국기[1] | 문장 | |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22 | |
상급기관 | 프랑스 제3공화국 외무부 | |
설치 | 1889년 | |
폐쇄 | 1905년 |
<colbgcolor=#002395> 프랑스공사관[2] |
[clearfix]
1. 개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창덕여자중학교 자리에 있었던 프랑스 제3공화국의 옛 공사관이다.2. 역사
1886년(고종 23년) 6월에 조불수호통상조약[3]을 체결하면서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프랑스 정부는 1888년(고종 25년) 6월 한성에 외교공관을 개설했다.<colbgcolor=#002395> 건립 공사 중인 프랑스공사관[4] | <colbgcolor=#002395> 프랑스공사관 모형[5] |
<colbgcolor=#002395> 프랑스공사관과 한양도성 |
1910년(융희 4년) 8월에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겼고, 그해 10월에 프랑스영사관은 청사를 지금의 서대문구 서소문로 43-12[7]에 있는 민영환 옛 집터로 옮겼다. 참고로 프랑스영사관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주한프랑스대사관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그 자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매입한 옛 공사관 영역을 매입했고, 1914년 서대문소학교가 들어서면서 건물은 운동장 한복판에 놓이게 되었다. 다만, 건물 자체는 서대문소학교가 아니라 조선교육회, 구매조합, 수양단 조선지부, 동민회 등 여러 일제 관변 단체에서 사용했다. 그러다 노후화 및 학교 확장 등의 이유로 1935년에 헐렸다.#
서대문소학교는 8.15 광복 이후 서울서대문국민학교로 바뀌었다가 1973년에 문을 닫았고 그해 2월에 종로구 재동에 있던 창덕여자중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해와 현재까지 있다.#
3. 역대 공사 / 총영사 (1887 ~ 1906)
이름 | 임기 시작일 | 임기 종료일 | 지위 | 비고 |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Victor Collin De Plancy) | 1887년 11월 9일 | 1890년 7월 12일 | 공사 |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 |
이폴리트 프랑댕 (Hippolyte Frandin) | 1890년 7월 12일 | 1895년 12월 23일 | 공사 | |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Victor Collin De Plancy) | 1895년 12월 23일 | 1906년 1월 | 공사 겸 총영사 | 마지막 주한 프랑스 공사 |
4. 건물
5. 여담
- 공사관 바로 남쪽으로 한양도성이 지나갔다.
- 2010년 10월에 창덕여자중학교에서 학교 신축하려 교내 운동장을 조사하던 중에 옛 프랑스공사관의 자하실 유구와 한양도성 성벽의 기단부를 발견했다. 발굴 조사를 진행한 고려문화재연구원 측은 이밖에도 포도주병, 양식 그릇 조각, 타일 조각 등 유물들도 나왔다고 밝혔다.#
5.1. 고종의 불관파천(佛館播遷) 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러일전쟁 발발 직전인 1904년(광무 8년) 1월에 고종은 프랑스공사관으로 파천할 계획을 세웠었다. 1934년 1월 19일 자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고종은 러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대한제국이 휘말릴 것을 우려해 독일의 조계지였던 칭다오나 러시아 영토인 블라디보스토크[8]에 저택을 장만하려는 등 파천 준비를 꾀했지만 외국으로 나가기가 곤란해 최종적으로 (고종이 머물렀던 경운궁과 가까이 있는) 프랑스공사관으로 가기로 결정했고, 시종 조남익[9]을 통해 은밀하게 프랑스 공사 플랑시[10]와 교섭했으나 사전에 발각당해 실패했다고 한다.6. 같이보기
[1] 현재 프랑스 국기보다 조금 더 색이 어둡다.[2]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3] '불(佛)'은 프랑스를 한자로 쓴 '불란서(佛蘭西)'의 앞글자이다. 즉 조선과 프랑스가 맺은 조약이란 뜻이다. 수교 과정과 이 이전 역사에 대해서는 한국-프랑스 관계 문서 참조.[4]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5]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6] 사진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7] 지번주소: 합동 30번지.[8] 기사 원문에는 한역(漢譯)한 이름 해삼위(海蔘威)로 적혀있다.[9] 조남승의 동생. 흥선대원군의 외손자이자 고종의 외조카이다.[10] 기사 원문에는 한역(漢譯)한 이름 갈림덕(葛林德)으로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