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고치범(高致範) |
이명 | 고제만(高濟萬) |
본관 | 제주 고씨[1] |
생몰 | 1849년 4월 8일 ~ 1914년 |
출생지 | 전라도 흥덕현 이동면 월산리 (현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
사망지 | 서대문형무소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고치범은 1849년 4월 8일 전라도 흥덕현 이동면 월산리(현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최익현의 문인으로, 1906년 초 최익현의 명을 받들어 팔도사민 창의포고문(八道士民倡義布告文)을 작성하여 전국에 살포했다. 이후 최익현이 태인 일대를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태인으로 향하자, 그는 4월 16일 고석진, 노병희 등과 함께 종성리까지 나아가 최익현을 맞이했다. 최익현이 무성서원에서 유생들을 모아 의거를 결의했을 때, 고치범은 수하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합진하여 그 휘하에 들어갔으며, 의병대가 순창으로 진군할 때 함께 했다. 그러나 최익현이 관군과 싸울 수 없다는 이유로 의병을 해산한 뒤 대마도로 유배되자, 고치범은 그를 기리며 시 한수를 지어 보냈다.정성스럽고 효도하고 충성됨이 자청(紫淸)에 맞으니
자청(紫淸)이야 응당 대명(大明)의 소리 감동시키리
높은 물결 돛대를 바람 순한 날에 돌이키니
마둘가리 다듬어 중생(衆生)건지려고 애썼네
자청(紫淸)이야 응당 대명(大明)의 소리 감동시키리
높은 물결 돛대를 바람 순한 날에 돌이키니
마둘가리 다듬어 중생(衆生)건지려고 애썼네
이후 자택에서 은거하던 고치범은 1914년 임병찬으로부터 고종이 자신에게 독립의군부 총무국 종사관 직을 하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임병찬의 국권회복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경찰에게 발각되었고, 그는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곧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고치범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장흥백파 20세 제(濟)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