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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8-13 06:16:37

나정련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나주 나씨
출생 1882년 9월 17일
전라도 낙안군 남상면 금곡리
(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사망 1943년 8월 18일
목단강성 목단강시 한양특별분구 액하감옥[1]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위패 48판-8면-118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나정문은 그의 남동생이다.

2. 생애

나정련은 1882년 9월 17일 전라도 낙안군 남상면 금곡리(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대종교 창시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나철과 어머니 여산 송씨 송주원(宋柱元)의 딸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상경하여 나철이 1909년에 대종교를 창시했을 때 가담했으며, 1914년 아버지와 함께 길림성 연길현 지인사(志仁社) 의란구둔(依蘭溝屯)[2]으로 이주해 한인 교포들에게 대종교 전도에 힘썼다. 그리고 1920년에 의란구둔 구룡평(九龍坪)[3]에 있던 구룡학교 교장에 임명되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주입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22년 길림성 밀산현(密山縣) 당벽진(當壁鎭)[4]으로 이주한 나정련은 북로군정서 기밀참모를 맡아 군자금 조달, 군량미 보급, 독립군 모집 등에 힘을 기울였고, 이후엔 대종교 교단에서 시교원(施敎員)을 역임하며 일반 대종교인들을 인도하는 일에 힘썼다. 1941년에는 대종교 총본사가 있던 길림성 영안현(寧安縣) 동경성가(東京城街) 발해촌(渤海村)[5]으로 이주해 경의원(經議院) 참의 등 총본사의 중책을 맡아 활동했다.

그러나 1942년 11월 19일 '임오교변' 당시 교주 윤세복을 비롯해 김영숙(金永肅), 윤정현(尹珽鉉)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된 그는 목단강성 목단강시 한양특별분구(漢陽特別分區) 액하감옥(掖河監獄)에 투옥되었다가,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1943년 8월 18일 그곳에서 옥사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나정련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 12월 1일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1]중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양밍구(陽明區) 후루지에(護路街) 톄링허진(鐵嶺河鎭)에 있었다. 2015년 7월 무단장시위원회와 무단장시인민정부에서 톄링허감옥(鐵嶺河監獄)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여 보존 중에 있다.#[2]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 이란진(依蘭鎭).[3]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 이란진(依蘭鎭) 지우룽핑촌(九龍坪村).[4]중국 헤이룽장성 지시시 당비진(當壁鎭).[5]중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닝안시(寧安市) 보하이진(渤海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