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한국언(韓國彦) |
생몰 | 생년월일 미상 ~ 1936년 12월 18일 |
출생지 | 평안남도 성천군 |
사망지 | 경성형무소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한국언은 평안남도 성천군 출신이지만 출생년도는 알 수 없다. 그는 1919년 11월 주기정(朱基鼎), 조기수(趙基洙), 이창해(李昌海), 최태준(崔泰俊) 등과 함께 김영란(金永蘭)의 권유로 공성단(共成團)에 가입, 평남 성천 등지로 다니며 군자금을 모집했다. 공성단은 군자금을 모집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할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였다. 1919년 12월 27일, 그는 김영란, 조기수, 최태준 등과 함께 평남 성천군 삼덕면 문원리에 거주하는 정현조(鄭炫祚)를 찾아가 군자금 기부를 요청했다. 그러나 정현조가 관할 경찰서에 신고하면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여야 했고, 그는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동지 주기정과 김병항(金炳恒) 등은 체포되었다.1920년 1월 1일, 한국언은 최태준의 집에서 김영란, 조기수 등과 만나 정현조를 응징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그날 밤 함께 정현조의 집에 방화했다. 이후 어린 시절의 학우였던 이치범의 집에서 약 1달간 머물면서 김영란과 함께 평안남도 순천군 신창면 신이리에 거주하는 최홍주(崔洪柱)를 찾아가 군자금을 거둬들이고 평안남도 난산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지들이 검거되자, 그는 만주로 피신했다. 1921년 9월 9일 평양지방법원 궐석재판에서 강도 방화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10여 년간 만주에서 숨어지내다 1934년 2월 일제 관헌에 체포되어 살인 및 방화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6년 12월 18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한국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