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38:08

맹철호

성명 맹철호(孟喆鎬)
이명 맹공유(孟公有), 맹성호(孟性浩)
해사(海史)
생몰 1889년 3월 15일 ~ 1959년 2월 17일
출생지 경기도 용인시 김량장리
사망지 경상남도 밀양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맹철호는 1889년 3월 15일 경기도 용인시 김량장리(金良場里)에 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용인 일대에서 3.1 운동에 참가한 후 만주로 망명했고, 1919년 4월 15일 박장호, 조병준 등 대표자 500여 명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결성했을 때 여기에 참가하여 집안, 환인 일대의 총지단장으로 선임되었다. 1920년 5월에는 집안현 지사에게 청원서를 제출해 한인 교민의 생활 대책을 강구해줄 것을 호소했다.

1921년, 맹철호는 집안현에서 무장독립군을 조직하고 부하 200여 명을 이끌고 압록강 중류, 하류 일대로 남하해 국내 진입을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23년 12월에는 통의부 군수국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일제를 상대로 무장 투쟁을 벌이면서 부하를 평북 일대에 파견해 국내지단 조직 및 군자금 모집활동을 했다.

1925년 정월 길림에서 남만주 및 북만주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정의부로 결집하자, 그는 여기에 가담해 정의부 자치분과위원으로 선임되어 이진산(李震山), 최명수와 함께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이 벌어지자 주녕현 산간지대에 피신해 한동안 농사를 지으며 연명하다가 다시 상하이로 피신했고, 중일전쟁 도중엔 충칭으로 피신했다. 8.15 광복 후 국내로 귀환한 그는 밀양시로 이주했고 1959년 2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맹철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또한 그의 유해는 1988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