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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6 10:46:53

강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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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강한수(姜漢秀)
생몰 1921년 8월 10일 ~ 1944년 4월 30일
출생지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향교리
사망지 광주형무소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한수는 1921년 8월 10일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향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 서중학교에 재학하던 1938년 동교생 주만우(朱萬尤)·유몽룡(劉夢龍) 등과 함께 항일학생결사 서중독서회(西中讀書會)를 조직했다. 서중독서회는 1940년 3월에 그 명칭을 무등회(無等會)로 바꾸고 조직을 확대 개편했다. 1941년 3월 광주서중을 졸업한 그는 담양제재주식회사의 사무원으로 근무하면서 계속 유몽룡·주만우 등과 연락을 가지며 무등회의 활동을 지원했다. 그러다가 1942년 1월 무등회 조직이 발각되면서 주만우, 유몽룡, 남정준(南廷埈) 등과 함께 체포되어 1년여 간 미결수 신분으로 고문당하다가 무죄 방면되었다.

이 시기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단행한 후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민족 말살을 꾀했다. 이때 강한수를 대신해 무등회를 이끌고 있던 주하준(朱夏俊)·기환도·기원흥(奇源興) 등은 학병 지원 반대, 창씨개명 반대, 일어 상용 반대, 징병제도 반대 등을 강령으로 삼고 1943년 5월 21일에 일제히 동맹휴학에 돌입하여 6월까지 항쟁했다. 그는 이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다시 경찰에 체포되었고, 취조 과정에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944년 4월 30일 광주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강한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9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