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20년 11월 7일 |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 신기마을 | |
사망 | 1944년 4월 10일 (향년 23세) |
전라남도 광주부 광주형무소 | |
본관 | 행주 기씨[1][2]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04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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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독립유공자 기태룡은 그의 첫째 남동생이다.2. 생애
1920년 11월 7일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 신기마을에서 아버지 월파(月波) 기우양(奇宇洋, 1902.3.4. ~ 1976.3.21.)[3]과 어머니 하동 정씨 정덕순(鄭德順, 1898.2.9. ~ 1985.12.6.)[4] 사이에서 5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기우양은 1925년 8월 조선총독부에서 시행된 소학교 및 보통학교 교원시험에 합격했는데, 당시 제3종 조선어 및 한문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1925년 당시 조선총독부 관보에 이름이 올라가기도 했다. 이후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장성군 월평보통학교의 촉탁교원으로 근무했고, 8.15 광복 후 1952년에는 월평국민학교 교장을 역임했다.그는 1941년 3월 광주서중학교에서 재학하면서 남동생 기태룡을 비롯해 신균우·윤봉현(尹奉鉉)·박화진(朴和珍) 등과 함께 선배들이 졸업한 후 침체되었던 무등회(無等會)의 조직을 재정비하고 활동을 강화하였다. 이후 광주서중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진학한 뒤에도 계속 무등회에 관계하며 그 활동을 지원했다.
그러던 중 1943년 5월에 무등회를 중심한 광주서중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단행하자, 그는 그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경기도 경성부에서 체포되었다. 전라남도 광주부로 이송된 후에는 일본 경찰로부터 방죽에 처박히는 등 온갖 잔학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4월 10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기환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3월 9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