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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7 04:58:30

소휘천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4년 8월 23일[1]
전라도 낙안군 고하면 벌교리
(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 부용마을 650번지)
사망 1969년 2월 10일 (향년 74세)
본관 진주 소씨[2]
이명 소몽열(蘇夢悅)
춘화(春化)
상훈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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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 생애

소휘천은 1880년경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서 소준술(蘇準述)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8년 2월 안규홍이 보성 동소산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그는 여기에 가담해 유격장(遊擊將) 겸 한후장(捍後將)에 임명되어 유격전의 선봉에 섰다. 이후 안규홍의 의병대를 종군한 그는 중군장으로서 1908년 2월 파청(巴靑) 전투에서 승리했고, 일본군 수호(水戶), 평정(平井)의 부대와 진산(眞山)에서 전투를 벌여 적을 맹렬히 공격한 뒤 전멸상태로 만들어 패배시켰으며, 이때 많은 무기류와 기밀문서 다수를 노획하였다.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고 무기류와 기밀문서 다수를 노획했다. 그 외에도 원봉산, 흥양, 순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했다. 일본군 수비대 병사를 습격해 일본군 50여 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군수품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1909년경 묵석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선두에서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3]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소휘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진주소씨족보에는 1890년 9월 5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능성공파(綾城公派) 42세 휘(輝) 항렬.[3]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소휘천이 만주로 망명하여 광복 때까지 구국의 대의를 지니고 살았고 1969년 2월 10일에 사망했다고 기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