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군종(君從) / 소운(蘇雲) |
본관 | 여흥 민씨[1] |
출생 | 1884년 5월 22일 |
충청도 온양군 읍내면 좌부리 (현 충청남도 아산시 좌부동) | |
사망 | 1942년 10월 19일[2] |
중화민국 충칭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70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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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민병길은 1884년 5월 22일 충청도 온양군 읍내면 좌부리(현 충청남도 아산시 좌부동)에서 아버지 민형식(閔亨植)과 어머니 해평 윤씨 사이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그는 1923년 중화민국 난징으로 망명했으며, 1929년 윤기섭, 신익희, 연병호, 최용덕, 안재환, 김홍일, 성주식(成周寔) 등과 함께 난징에 모여서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을 조직했다. 이들은 사상의 정화와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도모하는 동시에 무력행동을 목표로 하는 철혈단(鐵血團)을 창단하여 안재환을 단장으로 추대하고, 김창화(金昌華), 나월환, 이건호(李健浩), 이영희(李英熙), 최경수(崔景洙) 등을 중견 단원으로 하여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했다. 또한 당기관지 <우리 길>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며, 동지들을 훈련시켜 대일항쟁에 적극 참여하도록 했다.
1933년 초에는 이세호(李世鎬), 이동초(李東初)와 함께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에 선출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1935년에는 지청천, 연원명(延圓明) 등과 함께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간부로 활약하기도 했다. 1936년에는 이동녕, 이시영, 김구, 차이석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새로이 창당하고, 그는 상임위원이 되어 활동했다. 한국국민당은 우익진영인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과 함께 미국 하와이 멕시코 등지에 있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동지회(同志會), 국민회(國民會), 부인애국단 단합회, 애국단 등과 연합하여 1937년 7월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여 임시정부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1937년 10월 16일, 민병길은 엄항섭, 안공근과 함께 제29회 의정원 회의에서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상임위원회는 의정원 정기회의 휴회기간을 임기로 하고 그 동안 3인의 상임위원이 회계 검사와 신도(新到)의원 자격심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대일 항전대책을 세우고, 또 광복진선(光復陣線)을 결성하여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과 임진태세의 확립을 꾀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기세가 워낙 맹렬해 장교 양성이 매우 어려웠고 임정 요원 가족들이 피난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는 임시정부의 피난 행렬을 따라가다가 1939년에야 기강에 정착했고, 10월 3일부터 12월 5일까지 개최된 제3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해 의정원 의원에 피임되었다. 이 의회에서는 이 해로 3년 임기가 끝나는 국무위원을 개선하고 대한민국 20, 21년도의 결산안과 22년도의 예산안을 심의 통과하며, 참모부 증설안을 동의하고, 순국선열 공동기념일을 매해 11월 17일로 결정하였다.
민병길은 이후에도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의원으로 활동했으나 1942년 10월 19일 충칭에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민병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3년 10월 13일에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