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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0:38:52

안숙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공위(公威) / 위당(韋堂)
본관 순흥 안씨
출생 1863년[1] 7월 9일
충청도 괴산군 동상면 학동
(현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율원리 학동마을)
사망 1910년 10월 4일
충청북도 괴산군 동상면 오랑강[2]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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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안숙은 1863년 7월 9일 충청도 괴산군 동상면 학동(현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율원리 학동마을)에서 1874년(고종 11) 증광시 생원시에 2등 3위로 급제한# 안우량(安友良)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 형 안왕(安汪)이 있었다.

그는 1894년(고종 31)에 식년시 진사시(進士試)에 3등 900위로 급제했고# 곧 종5품 성균관 직강(直講)에 보임되었다. 그는 이상설과 친하게 지내며 대한제국을 지킬 방안을 모색했고, 전통 학문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학문에도 관심을 가지며 일제의 침략이 가시화 되던 무렵 급변하는 정세 변화에 한국이 대처해야 할 방도를 4편의 '병제론(兵制論)'으로 남겼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 프로이센 왕국의 신식 군대와 징병 제도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불랑서(佛郞西, 프랑스) 사리왕 제7(査里王 제7, 샤를 7세)은 상비병을 창건할 때 불랑서 궁대(弓隊)를 나누어 32공반니(公班尼 컴퍼니, 중대)로 하고 공반니마다 500인을 두었는데 지금 천하가 모두 이 제도를 보존한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후 민영환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안숙은 민영환을 기리는 제문(祭文)을 썼다. 이후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그는 절망하여 다음과 같은 절명시(絶命詩)를 남겼다.
오호라! 사람의 태어남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는데,
그 죽음이 진실로 마땅히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면
그 죽음은 도리어 사는 것보다 현명한 것이니,
이는 서슬이 시퍼런 칼날을 밟고서도
자신의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던 이유인 것이다

1910년 10월 4일, 안숙은 괴산의 오랑강에 투신하기로 했다. 이때 주위로부터 "국록(國祿)을 먹는 벼슬아치도 아니면서 자결 순국의 길을 가려고 하느냐”는 만류를 받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가 오백 년이 지났는데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여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없다는 말인가? 또한 국록을 먹는 공경(公卿)들 가운데 죽는 이가 없다고 하여 어찌 선비가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후 그는 강물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48세.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안숙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6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010년 안숙이 남긴 '위당유고'를 정리한 그의 유고집 <선비 안숙일지>가 김영사에서 출간되었다.


[1] 안숙의 사마방목에는 1874년으로 기재되어 있다.[2] 달천(疸川)을 말하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