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홍원표 (洪元杓) |
출생 | 1909년 6월 2일 |
전라남도 제주군 구우면 귀덕리 (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1] | |
사망 | 1939년 2월 7일 (향년 29세) |
일본 제국 오사카 | |
본관 | 남양 홍씨[2]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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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2. 생애
홍원표는 1909년 6월 2일 전라남도 제주군 구우면(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인 1929년 6월에 동교생 조길룡, 김남철 등 20여명과 함께 무등산에 모여 조국독립과 사회과학 연구를 목적한 항일학생결사 광주농업학교 독서회를 조직했다. 독서회는 당시 광주지역의 중심적 항일결사였던 성진회(醒進會)가 1927년 3월에 형식상 해체된 후, 이를 확대 개편하여 결성한「독서회중앙본부」의 하부조직이었다. 동회의 운영은 전회원을 4개조로 나누어 조별로 연구활동을 하는 한편 별도로 학년별 조직도 구성했다.홍원표는 독서회를 통해 배일의식을 고양하던 중 광주학생항일운동에 가담했다가 독서회가 발각되면서 1930년 1월에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광주농업학교에서 퇴학당했고,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에 불복해 항소하여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 일본에 건너가 1934년 11월 오사카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관서지방협의회(關西地方協議會), 재건준비위원회(再建準備委員會) 등을 조직하고 한국인 400여 명과 함께 항일운동을 준비했다가 1935년 12월 하순에 또다시 체포되어 1936년 7월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9년 2월 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홍원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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