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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우정 梁又正 | |
<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초명 | 양창준(梁昌俊) |
호 | 우정(雨庭) |
본관 | 남원 양씨[1] |
출생 | 1907년 음력 11월 15일[2] |
경상남도 함안군 산내면 북촌리 (現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북촌리 서촌마을)[3] | |
사망 | 1975년 10월 11일 (향년 67세) |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동 자택 | |
학력 | 함안보통학교[4] (졸업) 대구고등보통학교 (제적)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학 / 중퇴)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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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시인, 언론인, 정치인.2. 생애
1907년 음력 11월 15일 경상남도 함안군 산내면 북촌리(현 함안군 함안면 북촌리 서촌마을)의 중농가에서 아버지 양한익(梁漢益, 1887. 10. 5 ~ 1946. 5. 2)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이춘(金二春, 1885. 1. 29 ~ 1943. 1. 6)[5] 사이의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일찍이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우다가 함안보통학교(현 함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4학년 재학 중 반일 학생사건에 연루되어 퇴학당했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2년간 방황하다가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으나, 이마저도 중퇴하고 곧 귀국하였다.
귀국 후 신간회에 가입하여 지방 지부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농민소작쟁의에 참여하는 등 실제 항일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26년 2월에는 동아일보 함안지국에 기자로 채용되어 잠시 동안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1927년 대산보통학교에서 1년간 교원촉탁으로서 교원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 무렵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1928년경 카프 중앙위원을 역임하는 한편, 중외일보에 수십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1920년대 후반부터는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카프 시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1930년 1월 10일 밀양 박씨 박덕련(朴德連, 1911. 12. 12 ~ ?)[6]과 결혼하였으며, 그해 9월에는 「음악(音樂)과 시(詩)」의 발행인 겸 편집인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카프 개성지부 기관지인 「군기(群旗)」 주간에 취임하기도 했다.
좌측·중간 : 1931년 12월 8일, 경성부 본정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 우측 : 1932년 1월 1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그러다가 1931년 국내공작위원회사건 및 반제동맹사건에 연루되어 그해 12월 7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같은 달 14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다시 체포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4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특히 복역 중에 조선공산당 공작위원회 조직 및 활동 혐의로 재차 기소되어 1934년 6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리고 1936년경 경남문학청년동맹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얼마간 기와 및 숯을 구워 시장에 파는 것으로 생계를 잇다가, 결국 친일로 전향하여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친일단체 녹기연맹(綠旗聯盟)의 기관지 녹기(綠旗)에 관계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우익 언론인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선전부장으로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했고, 이승만의 독립운동 경력과 정치 이념을 홍보하는 저서를 남겼다. 1949년 연합신문사(聯合新聞社)를 창립하고 연합신문을 창간, 이승만의 일민주의 홍보에 앞장섰다. 그는 조선민족청년단에서 일민주의의 체계화에 앞장서면서 "가족국가론"을 제시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함안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이범석의 족청계에 몸담았다. 자유당에서 정무국장, 국민부장, 경남도당부 위원장 등을 지냈다. 1952년 4월 20일에는 대한통신사(大韓通信社)를 인수하여 동양통신(東洋通信)을 창설했으며, 같은 해 국회 외무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953년 연합신문 주필인 정국은(鄭國殷)이 간첩혐의로 체포되자 당시 2대 국회에서 역대 최초로 체포동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구속되어 범인은닉 등으로 징역 7년형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1953년 12월에 자유당에서 다른 족청계 인사들과 더불어 제명되었으나 1954년에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이후 1954년 4월 의원직을 사퇴한 후 칩거생활을 하다가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중당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조윤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5년 10월 11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장위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경남 함안군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8,801 (19.93%) | 당선 (1위) | 초선 |
1967 | 제7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성북구 갑 | [[민중당(1967년)|]] | 905 (1.34%) | 낙선 (4위) |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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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갑 | 합천 을 | ||||
노기용 | 김명수 | ||||
* 부산 무 최원봉 사망 (1950.11.10.) * 함안 양우정 사퇴 (1954.4.3.) * 부산 병 김칠성 납북 * 창녕 신용훈 납북 * 하동 이상경 납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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