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한스 프리체 Hans Fritzsche | |
본명 | August Franz Anton Hans Fritzsche 아우구스트 프란츠 안톤 한스 프리체 |
출생 | 1900년 4월 21일 |
사망 | 1953년 9월 27일 (향년 53세)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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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스 프리체(1900년 ~ 1953년)는 나치 독일의 관료이자 성우[1]이다.2. 생애
루르 지방의 보훔에서 태어난 프리체는 1917년에 육군에 입대했고 전후 베를린과 그라이프스발트의 대학에 재학하다 중퇴했다. 1923년 후겐베르크 출판사의 기자가 되었고 1932년 정부의 무선 뉴스 기관에서 일일 프로그램을 시작했다.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단지 파울 요제프 괴벨스와 목소리가 똑같다는 이유로 징발되어 국민계몽선전부에 배치되었다. 징발된 이후에는 고도의 훈련을 거쳐 괴벨스의 말투를 완벽하게 흉내낼 수 있게 되었으며 괴벨스가 써 준 대본을 괴벨스와 똑같은 말투로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읽는 역할만 전담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사망할 때 베를린 총통엄폐호에 있었으며 거기서 소련군에 항복했다. 이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종이에 적힌 글만 읽었을 뿐이라는 혐의로 훈방되었다. 이는 얄마르 샤흐트, 프란츠 폰 파펜과 더불어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훈방된 단 3명 뿐인 사례로 한스 프리체 등 이 3명 이외의 피고들은 다만 몇 년이라도 실형을 복역하고 가석방 되는 처벌 이상의 처벌을 받았다.
얼마나 괴벨스 연기를 잘했는지 이 사람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나타나자 헤르만 괴링 등 나치 독일의 고위 인사였던 피고들도 "저 사람은 누구지?" 하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벌도 안 받은 것은 아니며 서독에서 따로 치러진 슈투트가르트 재판으로 9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으나 암이 발병해서 병보석으로 가석방 되었다. 그리고 가석방 된 지 얼마 못 가 사망했다.
목소리만 빌려줬는데 옥살이를 한 것이 억울해 보인다면 억울해보일 수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자발적으로 나치당과 돌격대에 가입한 것도 모자라 나치 법률 연구기관의 회원으로 있었고, 전쟁 말기에는 대중계몽선전성 국장 자리까지 맡았기에[2] 완전히 무고하다고 보기엔 어렵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