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11월 괴벨스가 참석한 베를린 지역 국민돌격대 사열식 사진.[1] | 실전에서.[2] 사진은 판처파우스트를 들고 참호에 배치된 국민돌격대원들으로, 베를린 전투 당시 촬영되었다.[3] |
국민돌격대 선전 포스터 "자유와 삶을 위해(Um Freiheit und Leb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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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4년 11월 16일 촬영된 국민돌격대 사열식
Deutsche Volkssturm / 독일 국민돌격대 | 데어 도이체 폴크스슈투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의 진격에 대한 최후의 항전을 위해 선전선동부 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주도로 조직된 독일 국방군 산하 군사 조직. 비록 정규군의 일부로서 독일 국방군의 지휘를 받긴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민병대 이상의 전투력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Volk(s, s는 접미사)+Sturm. 독일어를 직역하면 그렇다는 거고, 실질적으로 '국민' 내지 '국가'의 '민병대' 정도의 뜻이 된다.[4]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 번역본에서는 향토예비군이라는 명칭으로 번역했는데, 이들은 예비군도 아닌 민방위 이하의 전투력을 가진 존재인데다 행정적으로 예비군으로 분류되지 않는 자원이므로 적절한 번역은 아니다.
제3제국의 고립이 불러온 총력전과 이를 수행해야 하는 비참한 독일 국민들의 자주국방 최후 방법론이 현실화된 것이 국민돌격대이다. 독일 국방군 산하 조직이지만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하달하는 자주국방의 자살공격명령을 일선의 상식적인 지휘관이 막을 수 없었으며, 이는 독일 국민의 피해를 극대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국민돌격대는 판처파우스트를 들고 걸을 수 있는 모든 남성을 징집하였고 그들에게 국민돌격대 완장을 채워 정규군으로 편성하였으므로 전쟁을 피해 피난을 갈 시 나치 헌병대의 독전 코만도들에겐 이들을 총살할 권리가 주어졌다. 베를린 공방전을 다루는 영화에서 가로등에 매국노 배신자라는 명패를 걸고 목메달려 죽은 독일 국민들이 바로 국민돌격대를 거부하거나 도망친 자들이다.
영국의 홈가드 같은 조직과 비교하면[5] 정말 두려움에 떨며 있는 무기 없는 무기 만들어서 지급하는 건 같았으나 연합국은 미국이라는 든든한 조력자와 바다라는 장벽, 그를 지키는 정예 홈 플릿이 있었으나 대전 말 나치 독일에게는 제2차 대전 초반까지 추축국이었던 유럽의 동맹국가들(이탈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등)도 죄다 독일과의 국교, 동맹관계를 단절하고 연합국으로 전향하거나 일찍 항복하여 떨어져나가버린 바람에 아무 것도 없었다. 나치 독일은 누가 봐도 되살아날 가망이 없는 가운데, 최후의 발악으로 국민들을 총알받이로 몰아 나치의 저승길 동무로서 데려가고자 했다. 나치의 명령을 거부하고 목매달린 국민돌격대도 수천 명에 달한다.
2. 배경
본래 나치 정권은 과거의 독일 정권 및 국가조직 전체에 대해 비판적인 국가사회주의가 기반이었으며, 이 때문에 오래 전부터 정당 내에서는 독일의 국방 조직인 국방군(정규군) 전체를 척결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애초에 나치 돌격대(SA)부터가 예전의 군대는 제국 시절의 잔재이자 부르주아 계급의 앞잡이이므로 국가사회주의 이념으로 뭉친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에 근거해서 창설된 조직이었고 무장친위대 역시 이와 같은 이념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조직이었다.나치는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이라는 정당명과 국가사회주의라는 정당 이념에서 알 수 있듯 사실 이념적 기반을 (마르크스주의와 대비되는 독일 민족적인) 사회주의에 두고 있었다.[6] 이 때문에 당내에 우파와 좌파가 공존하고 있었으며, 우파의 경우 유대자본만 기피하는 정도인 데 반해 좌파는 모든 자본가 및 구체제 엘리트 전체를 증오했다. 특히 돌격대는 후자에 가까웠고, 이런 이론적 대립은 돌격대의 수장이던 에른스트 룀의 숙청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장검의 밤으로 인해 나치 좌파는 거의 다 숙청당했으나 돌격대의 군편성에 대한 관념은 하인리히 힘러에게 어느 정도 계승되어 무장친위대의 건설에 영향을 주었고, 나치당내에 퍼진 정규상비군에 대한 혐오에 가까운 감정과 시민군에 대한 호감에 대한 연원은 19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19세기 독일 지식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시민군이라는 개념이 나치 돌격대와 무장친위대로 발현된 것이다.
- 정확히 말하면,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도 사회주의 체제가 성립되면 "스스로 무장한 노동자들의 자경단"이 "기존 국가의 군대"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근대 말~현대 초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기존 국가의 정규 상비군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이 있었다. 다만 이는 단순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발상이 아니라 당시 유럽의 정치사회적 구조로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군대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관점과는 달리 근대 유럽 국가에서 군대(특히 장교단)는 명확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정치적 압력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장교(군 수뇌부)는 전통적으로 신사 계급[7]의 직업이었고,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권위를 가진 엘리트 집단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따라서 정규 상비군의 지휘부 자체가 곧 보수적인 귀족주의를 지탱하는 핵심 세력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좌파, 또는 좌우파를 막론한 급진주의 세력들은 국가의 군대를 정치중립적인 국가기구로 보지 않고 '구체제-보수파의 무장 조직'으로 여겼기에 급진주의 세력 역시 그에 상응하는 자체적인 무장조직(자경단)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던 것. 인민군 문서에서 설명하듯, 구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의 군대가 명목상 '국군'이 아닌 '당군'의 형태였던 것 자체가 바로 이 시절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독일의 사례에 대해 좀 더 집중해보자면 퇴역 군인들로 구성되었던 우익 민병대 자유군단의 사례나 독일군 장교단의 산실 역할을 했던 융커들의 사례도 참고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군대는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되며,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 는 현대 민주주의적 문민통제 논리와는 달리 군대 자체가 정치적 세력이었던 시대의 논리이며,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의 유럽에서는 이런 군국주의 사고방식이 제법 널리 통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치 친위대' 논리의 가장 황당한 지점은, 나치당이 독일의 정규 상비군(독일 국방군)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이후에도 유지되었다는 점이라 볼 수 있다. 나치당의 활동 초기, 극단주의 정치운동 세력이던 당시에야 군대를 비롯하여 구체제 엘리트에 의해 통제되는 기존 국가 조직을 신뢰할 수 없다는 관점에 나름의 합리성이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 내 좌파를 완전히 숙청하고 아돌프 히틀러 및 당 내 우파 수뇌부가 기존 체제의 보수주의 엘리트들과 손잡아 독일이라는 국가를 완전히 장악한 이후에는 이 개념이 등장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당시 독일군(독일 국방군)은 히틀러와 나치당에게, 최소한 히틀러와 나치당이 통제하는 독일이라는 국가에 충분히 충실한 집단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굳이 슈츠슈타펠과 같은 준군사조직을 만든 것은 나치당 요인들이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사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헤르만 괴링은 공군으로 돌격대나 무장친위대와 비슷한 짓을 하려고 할 정도로, 나치 정권에서는 기존의 군부를 대체할 새로운 군을 만들 생각을 꽤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다.[8] 그리고 이런 기존 군부 세력에 대한 불신과 그간 전쟁 수행 및 군사력 확보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못했던 나치당 선전부장 겸 독일 국가계몽/선전상 요제프 괴벨스의 권력욕이 결합하여, 나치당은 1940년대 초반부터 전국민의 총동원을 근간으로 하는 제5의 군대 창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것이 국민돌격대의 창설 기반이었다.
3. 발등에 불이 떨어지다
그리고 이런 국민돌격대의 수요가 실제로 제기된 것이 1944년 말이다. 1944년 11월까지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총 누적 영구손실 500만을 입어, 이때까지 동원한 전 남성 인구의 1/3 가까이가 죽거나 부상당하는 비참한 상태에 이르렀다. 일단 1944년 11월까지 독일이 동원한 총 인구는 약 1,200~1300만으로 추산된다. 그리고 전체 독일인 사망자 중에 군인 전사자, 기타 사망자[9]와 실종자만 270만여 명에 달했으며[10] 영구장애를 가진 사람과 부상자를 합하면 650만 명. 이 중 100만 이상이 아직 동원 상태에 있었는데 그 중에는 심각하지 않은 영구 장애를 가진 사람들까지도 포함됐다. 사실 상 이제는 군을 제대로 유지하는 것은 고사하고 한 나라의 남자 씨가 마르기 직전에 이른 셈이었다. 현재 동원이 유지되고 있는 인원은 이렇게 해서 사망, 실종자, 심각한 영구장애인과 중상자 빼고 650만이었으나, 이중 군인으로서 동원 가능한 인구는 이제 300만 이하였다. 그나마도 계속 빠른 속도로 전 전선에서 병력이 소모되어 1945년 즈음에는 대부분이 사상자가 되어 사실상 병력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다.[11] 이 상태에서 괴벨스 이하 일부 급진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이 바로 모든 남성을 총동원해서 전쟁터에 내보낸다는 것이었다.당시 이미 독일은 전체 남성 인구 3,500만 중 1,300만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고 있거나 참여했다가 손실된 상태였다. 독일의 고령화 비중이 7%였고, 유소년 비중은 대부분의 국가가 이 때 20~23% 안팎이니까 3,500만 명 중 생산가능인구는 3분의 2 조금 넘는 2,500만 명. 이는 성인이 된 독일 청년들 중 30세까지의 청년층 중에 30% 안팎의 병역부적합자를 제외한 인원이 당연히 전부 포함됐고 그 외에도 30세 이상 장년층 중에 상당수가 들어가 있었다. 수적으로는 1939년 기준 남성 청장년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었다. 나머지는 산업현장 등에서 일 시켜야 하거나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여 전후복구로 써먹거나 해야 할 인력이었는데, 전체 청장년의 70% 정도가 징집 혹은 산업현장 징용대상이었고, 나머지는 국가가 멸망해도 동원할 수 없는 병역 부적합자들이라 애초에 히틀러나 괴벨스조차도 징집대상자에서 논외로 취급했다.
즉 독일이라는 국가가 멸망할 생각이 없으면 동원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라, 동부전선이 펑펑 터지는데도 동원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국가가 망하거나 지속불가능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동원 가능한 청년은 다 동원된 상태였다는 말이다. 이런 상태인데도 전선의 병력은 부족하고 국가는 사실상 패전 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1944년 10월 18일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국민돌격대 창설 명령이 떨어졌다. 소집 대상은 16세~60세 모든 남성이었으며, 공식적으로는 독일국방군의 일원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돌격대 비슷한 준군사조직이었다. 훈련은 소집지역 인근의 국방군이나 SS, 경찰 등에서 맡았다. 기준은 말 그대로 총을 쏠 수 있는가로, 면제받으려면 진짜 팔다리가 하나 없거나 시각장애/청각장애가 있거나 아니면 병역 자체를 수행할 수 없는 부적합 수준의 정신질환이 있거나 지병을 갖고 있어야 했다. 병역판정검사 기준으로 보면 보충역까지 해당된다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국민돌격대는 예비군조차 아니다. 예비군은 이미 20대 남성들 및 30대 중 일부 군복무 경험자들, 그 중에 현역 판정자들로 따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예비군들은 이미 1940년 5월 시점에서 거의 전원 동원된 상태였다. 1944년 말 시점이면 독소전쟁으로 이미 30대 중에서 군복무 경험이 없는 사람들까지 40세 아래이고, 산업현장 노동 등에 필수적인 인력이 아니고, 병역판정검사에서 현역판정이 난 사람들은 싹 다 군에 끌려간 뒤다. 산업 유지를 위해 나머지는 괴벨스가 아무리 정신상태가 이상하다 해도 도저히 징집할 수 없으니까 이제는 40~60대 중에 현역이 가능한 사람들 보고 싸우라는 소리다. 1945년 독일군 보병의 평균연령이 40세인 게 다 이유가 있다. 물론 괴벨스도 처음부터 현역이 가능한 사람만 뽑았으니까 건강상태만 따지면 대부분 현역병들과 큰 차이가 없긴 한데, 왜 이 사람들을 총력전 와중에도 가능한 징집에서 빼는지 생각해보자. 이들까지 죽으면 전쟁 끝나고 나서 국가 산업 돌릴 인력이 없으니까 빼는 것이다.
현대 한국식으로 비유하면 국민돌격대는 민방위까지 전부 동원된(국민척탄병) 상태에서 민방위까지 끝난 사람들 중 60세 이하와 중고등학생들까지 신체검사한 뒤 4급 이상 판정이 나온 남성들 전원을 끌어다가 군복도 제대로 안 주고[12] K2 소총이나 M16A1도 아닌 사냥용 엽총이나 M1 개런드, M1 카빈 같은 총을 주고 탄창 두세개에 실탄 좀 채워서 가서 적과 싸우다 죽으라고 닥치고 내몬 거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13] 물론 싸울 수는 있지만, 어차피 개죽음인 건 물론이고 전쟁 끝나고 나서 공장 하나 돌릴 인력이 남지 않으면 그게 바로 국가 막장 테크 직행길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농담도 나왔다고 한다.
국민돌격대가 60세 이하 중장년들도 전선에 내보내자 중장년층 사이에서 이런 소문이 돌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전선에서 적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시 돌격대 면제!
급기야는 독일 국민은 전원 전투병이란 정신나간 선언까지 나와버린다.[14] 여기에 후퇴하면 적전도망으로 사살한다는 명령까지 내린지라, 피난민=탈영병이 되어 피난민이 되면 아군에게 사살당하고 전쟁터에선 적군에게 죽는 상황이 되고 만다. 동부전선의 국민돌격대원들은 자기가 항복하면 남성을 비롯한 어린 자식들은 학살당하고 아내와 딸, 누이 등 독일 여성들은 강간당할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당시 독일 상층부는 Sieg oder Sibirien(승리 아니면 시베리아다.)'라는 극단적인 구호까지 내세워서 소련군과의 전투를 독려하는 판이었고, 연일 날아오는 소련군의 만행에 대한 소식을 접했기에 정규군이나 무장SS와 함께 필사적으로 싸웠다. 소련군 역시 봐주지 않고 독일 정규군 및 SS와 함께 국민돌격대들도 인정사정 없이 쓸어버렸다. 나중에는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하는 말이 나오긴 했다고 한다.
물론 서부전선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히틀러 유겐트를 비롯한 몇몇 광신자들이 "패배주의자는 사형"이라며 사람들을 목매다는 일도 벌어졌지만, 대다수는 별로 싸우지도 않고 미군이나 영국군에 항복하거나 그냥 탈영해서 민간인으로 돌아가버리는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사기가 떨어진 소년병들을 즉결처분하려는 광신자들인 그라이프 코만도들의 행태에 분개하여 국민돌격대 대원들이 그들을 죽이고 소년들을 구출하는 일도 있었다.
방금 전까지 총쏘면서 미군들을 사살한 사람이, 총알이 다 떨어지니까 그 자리에서 완장 버리고 민간인인 척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연합군 또한 이런 수작은 참아줄 수 없었기에 이런 경우는 바로 보복을 받았다.[15] 헤이그 협약상 교전권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식별가능한 표식이 있어야 하는데, 방금까지 총질하다 완장을 떼버리고 민간인인 척 하면 정당한 전쟁 포로가 아니라 전쟁범죄자 내지는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게 되므로, 그 자리에서 사살해버려도 전쟁범죄가 되지 않는다. 정규군조차 "항복하는 걸 못봤다" 내지는 "수류탄 던지는 줄 알았다" 하면서 쏴죽여버리고 면피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런 수작질을 받아주는 경우는 드물다. 이 때문에 아무리 나치가 막장이라도 군복만큼은 가능한 한 입혀보내려고 애를 썼으며, 국제법상으로도 항복하고 포로가 되어 목숨을 부지하려면 완장을 패용한 상태여야 했다.
연합군과 싸운, 군복조차 입지 못한 국민돌격대는 포로로 잡히더라도 상당수가 병기와 완장 등만 빼앗기고 풀려나는 경우가 다반사였는데, 그런 이들까지 일일히 죽여버리면 연합국이 그토록 증오하는 나치와 다를 게 없게 되고, 일선 부대에선 포로가 너무 많아서 항복하는 정규군에게도 '그냥 무기만 버리고 꺼지라'며 쫓아내는 일이 생길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이가 들었어도 현역 못지않은 신체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없진 않았는데, 이들 역시 미군에게 항복하는 비중이 정규군보다 더 높긴 했지만 대부분 집안의 가장이었던 그들이 항복한 이유는 싸울 수 없어서가 아니라 무장상태나 동료들 꼴, 보태서 지금 맞서는 미군의 무장을 보니까 어차피 필사적으로 싸워봐야 미군 십여명 죽이는 대신 자신과 동료들이 속한 소대, 중대가 전부 개죽음당하는 게 눈에 보이고, 그렇게 자신이 싸우다 죽거나 장애인이 되면 생계수단이 없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굶어죽을 게 뻔히 보이기 때문이었다.
4. 초라한 실상
물론 총력전 상황에서 나라가 곧 망할 판에[16] 청년만 부족하다면야 다소 나이가 있는 중년층에게 싸우라고 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문제는 그만한 조건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4.1. 무장
제일 큰 문제는 무기였다. 일단 무기가 있어야 싸울 수라도 있는데 당시에는 일선의 보병사단 조차 제대로 장비 보급을 받지 못하는 있는 상황이었으니 당연히 장비 보급은 형편없어서 정규군 쓰기도 부족한 MG42나 MG34는 사실상 지급할 계획 자체가 없었고[17] 대부분은 폭격기용으로 생산되었으나 폭격기가 쓸모가 없어진 상황이라 놀리게 된 항공기용 기관총 MG15나 과거 제1차 세계 대전때 쓰던 수랭식 MG08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도 제대로 지급할 계획이 없었다.[18][19]소총과 기관단총 역시도 부족해서 Kar98k, StG44, 게베어 43, MP40, MP35 등의 제식 총기는 정규군 수요도 맞추기 턱없이 부족한 양이어서 노획한 총기나, 과거 1차 대전과 전간기 때에나 쓰이던 구식 Gew98, MP18과 MP28[20], 한참 전에 성능이 별로라 사용하지 않았던 게베어 1888, 그리고 또 그 전에 사용했던 단발식인 게베어 1871까지 등장했다. 심지어 9×19mm 파라벨룸탄이나 22구경 탄환 등을 사용하는 민간용 엽총과 산탄총도 징발 혹은 소유자가 소집시 자체 구비하여 사용하였으나, 이것도 턱없이 부족하여 품질이 조악한 각종 국민돌격대 소총(VolkssturmGewehr, VG)이라는 국민돌격대용 급조 병기가 만들어졌다.
- VG-1 소총은 10연발 탄창이 달려있어서 얼핏 보기에는 반자동 소총으로 보일 수 있지만 밑의 VG-5과 같이 볼트액션 소총이다. 탄창은 게베어 43에서 쓰이던 탄창으로써, 어디까지나 재고로 쌓여있던 G43 소총의 탄창을 재활용하는 것이다. 또한 VG-3은 StG44 탄창을 재활용한 볼트액션 소총이다. 그리고 상단 사진의 하부에 있는 VK-98은 다른 이름으로는 VG-5인데, Gew98의 극단적인 간략화 버전으로 탄창 따위는 없고 그냥 1발 쏘고 장전하는 식이었다.[21] 불량 부품까지 때려넣은 것도 모자라, 가늠자-가늠쇠도 소총이 아니라 권총 수준이다.
- MP3008은 스텐 기관단총을 강하게 참고해서 만든 기관단총으로 생산성 향상을 위해 오히려 더 개악한 물건이었다. MP3008은 그래도 '강하게 참고해서' 만든 수준이지만, '포츠담 장비'라고 해서 대놓고 스텐을 거의 그대로 베낀 장비도 있었다. 얼마나 똑같이 베꼈는지, 독일이 패망한 뒤 연합군이 '포츠담 장비'들도 다 똑같은 스텐 기관단총인 줄 알고 회수해 버렸고 남은 건 생산 직원이 가지고 있다가 공개한 1정이 전부이다.
- VG 1-5은 다른 급조병기와는 달리 반자동 소총으로 다른 물건들 보다는 확실히 괜찮은 무기였다. StG44용의 탄약과 탄창을 사용하였지만 국민돌격대가 30발이 넘을 만큼 탄약을 지급받을 일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대부분의 국민돌격소총들은 남아도는 공군용 기관총 총열[22]을 사용해 만들었다. 이 과정 역시 크나큰 병크가 아닐 수 없는데, 총기에서 가장 비싼 부속은 총열이고 그 중에서도 기관총 총열은 더욱 비싸고 성능이 뛰어나다. 이런 물건을 갖고 장난감 같은 싸구려 볼트액션 소총을 만들 게 아니라 나머지 부속은 급조해서라도[23] 기관총(자동 화기)을 한 정이라도 더 만들 생각을 하는 게 정상이다.
- 여기에 더불어 아예 부무장마저도 저가형으로 생산하려 했는지 국민권총이라는 물건도 만들어냈다.
더구나 국민돌격대 전용의 저가형 총기들 역시 생산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이권 다툼이 발생하는 바람에, 대량 생산이 가능한 상황에서도 지방 나치당 지도자와 그 당수가 후원하는 기업체들끼리 자재를 사이에 두고 싸우고, 독일 국방군을 위한 생산 시설을 멋대로 뜯어가는 등의 실책과 온갖 병크를 연발한 끝에 제대로 생산조차 못 하고 국방군을 위한 무기 생산까지 차질을 빚게 만들었다.
제식도 아닌 온갖 외국제 노획, 약탈 무기들도 지급했다.
Forgotten Weapons의 리뷰 |
- 이탈리아군을 무장해제하면서 얻은 카르카노 소총 등을 독일의 7.92mm탄을 쓸 수 있게 개조하기도 했는데, 약 15,000정이라는 꽤 많은 숫자가 개조되었으나 기존 엔블록 클립에 7.92mm 탄이 맞지 않아서 클립을 쓸 수가 없었고[24] 총열을 억지로 넓히고 반동이 강해지면서 명중율은 극악으로 떨어진 단발총이 돼버렸다.
- 기타 여러 점령지에서 징발한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대로 조달했으며, 그 중에는 덴마크군의 크라그-에르겐센과 폴란드군의 RKM wz. 1928, 프랑스군의 르벨 M1886 또한 있었다. 당시 일부 북유럽 국가들은 독일의 7.92mm 마우저탄을 사용했기 때문에 손쉽게 노획하여 무장할 수 있었다. 물론 탄약을 날릴 수 있는 물건이라면 뭐든 써야 했기에 8mm 르벨 탄을 쓰는 프랑스제 소총처럼 마우저탄이 아닌 물건들도 많이 노획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런 노획 무기도 보급 1순위는 정규군이었는데다 이미 많은 숫자를 손망실해버려 실제 지급은 개미 눈물만큼 이뤄졌다.
덕분에 국민돌격대는 무장 자체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나마 판처파우스트 같은 대전차화기는 비교적 충분히 지급되었다. 말하지만 비교적이다. 이것도 선전사진 찍을 때는 근처 군 부대에 빌려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만 판처파우스트를 들어서 그 숫자가 많게 보이는 훼이크를 썼다고 한다. 물론 촬영 끝나면 반납. 잘 보면 사진 뒤편의 잘 안보이는 군중들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는 것이 보인다. 그래도 국민돌격대보다도 가치가 낮게 평가되던 히틀러 유겐트조차 이거 들고 베를린 전투 때 소련군 전차에 잘만 쏴댄 걸 감안하면 지급은 된 것 맞다.
다만 소련군을 조금이라도 더 막아내야 하는 동부전선의 상황은 나은 편이어서 국민돌격대 인원들도 멀쩡한 Kar98K 소총이나 MG42 등 그들 기준으로 꽤나 중무장한 사진도 종종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부전선에서 소모되는 병력수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이것도 사망한 정규군의 무기를 쥐어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육군도 모자라 국민돌격대를 태워 연합국 공군을 물리친다는 계획하에 국민전투기라는 발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제트기 He 162로. 시제기가 나오고 전투비행단도 하나 꾸렸지만, 정작 이 기체는 국민돌격대가 몰기엔 난이도가 너무나도 높았기 때문에, 일부 유소년기에 항공 클럽 등에 가입했던 일종의 예비 조종자원인 소년병 몇을 빼면 그냥 정규 공군에서 운용했다. 국민전투기에 대한 자세한 내역은 불타는 하늘 - 그레이트 워 플레인 - 독일공군 항목의 He162 항목을 참조하도록 하자.
상황이 이 지경까지 된 데는 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의 전쟁 실패에 따른 패착이 누적된 것이 가장 컸다. 특히 앞에서 언급했듯 나라가 다 망한 시점에서도 지방 정당 지도자(가우라이터 Gauleiter)와 군수기업체, 지방 유지들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갖은 실책을 거듭한 탓에 생산 가능한 무기조차 제대로 생산하지 못해 국민돌격대의 무장 자체가 실현되지 못했던 것. 어떤 의미로는 덕분에 독일인이 훨씬 덜 죽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한심한 일이었다.
만약 국민돌격대에 충분한 무기가 주어졌다면 도망칠 명분조차 없으니 계속 싸워 경험을 쌓아 나가야 했을 테고, 반대로 조직도 엉망이고 수적으로도 적에 밀리는 상황이라면 적에게 피해를 주기보다는 아군의 군수 지원 능력에만 부담을 주어 독일 국방군 전체의 몰락을 몇 달은 더 앞당기는 한편, '훨씬 많은 전사자와 더불어 멀쩡한 독일인 민간인 대부분과 독일 국가를 나치의 만행으로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소련군과 연합군 및 유럽인들의 훨씬 더 가혹한 처분에 넘겨주었을 가능성조차 충분하다. 물론 무장이 잘되어 있었다면 민간인의 퇴로 확보에는 문제 없었을것이다. 국민돌격대도 일단 투입되면 적군에게 희생을 강요할 능력은 됐지만[25], 상술된 대로 미군 10명 죽이고 국민돌격대 중대 전멸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참고로 이 때 희생되지 않고 살아서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조기 석방된 서방 지역 억류 독일군 포로들[26] 및 종전으로 포로가 되지 않고 그냥 군대 해산과 함께 전역한 이들과 더불어 전후 독일 사회의 주축이 되었고, 나중에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내게 된다.
4.2. 피복
또다른 큰 문제는 군복이었다. 만약 총기만 없다면 동부전선은 몰라도 서부전선에서는 포로수용소로 가서 거기서 일 좀 하고 전쟁 끝나면 나오면 그만이였다. 그러나 만약 군복이 없이 잡히면 그 사람은 군인이 아니므로 제네바 협약에 의한 포로로서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심하면 테러리스트로 간주되어 즉결처형되어도 군말할 수 없다는 소리다.흔히 국민돌격대 하면 정장에 완장 찬 노인들을 상상하지만, 국민돌격대가 전혀 군복을 지급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나치가 막장이었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군인인데 군복은 입혀 줘야 하지 않겠냐?"라는 목소리가 높았고, 실제로 소수지만 군복을 지급받은 인원들도 있다. 다만, 정말 소수만이 지급받았고 그 조달 방식도 실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새 군복은 앞서 말했듯 정규 군인들 주기에도 모자랐으므로, 우선 정부는 민간에게서 군복류를 기증받았다. 당시 민간에는 전사한 가족의 유품이나 전상으로 군복무가 불가능해 퇴역한 군인들이 집에 갈 때 입고 온 군복, 혹은 폐지되어 더 이상 입지 않은 군복[27], 제1차 세계 대전 시기나 바이마르 공화국 때의 구형 군복 등을 보관하고 있는 경우가 제법 됐고, 이것들을 기증받아 동네 아줌마들을 동원해 부착물들을 제거하는 등의 개량을 하여 지급했다.
물론 이 피복들도 수요에 비해 한참 모자랐으므로, 최소 분대장 이상의 계급장이 있는 간부 대원[28]들에게 지급했고, 나머지는 그냥 위와 같이 완장만 주고 땡이었기에 대부분은 대충 입고 총들고 싸워야 했다. 그나마 지급한 군복들도 시기나 소속 등에 따라 차이가 커서 누구는 회색 누구는 황색 같은 식으로 뒤섞여 있었다. 심지어 사진 중에는 오래전에 숙청당한 나치 SA 유니폼을 입고 나온 경우도 있다. 아주 운 좋은 극소수는 지급 중단으로 창고에 쌓여있던 육군 병사용 정복에서 부착물을 제거하고 주머니를 다는 개조를 한, 대전 말기 물자 부족으로 재질이 구려진 정규 전투복보다 훨씬 좋은 원단으로 된 군복을 입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또한 공군 부대에서 훈련받은 소수의 인원들에게 공군의 작업복용 검은색 커버올[29]#이 지급된 사례도 있다.
폐지됐던 육군 사병용 예복 상의를 개량해 만든 국민돌격대 대대장의 전투복의 모습. 본래 예복에 없던 가슴 주머니 등을 추가로 재봉한 것이라 주머니 원단 색이 다른 부분들과 다르다. | 코트를 입은 국민돌격대 중대장 | 오른쪽 제복 입은 사람은 이들을 인솔하는 소방경찰관[30]이다. |
물론 대부분의 대원들은 군복 제복이고 계급장이고 그런 것 자체가 없었다. 결국 아무리 군복을 긁어모아도 답이 없자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바로 사복 소매에 패용하는 완장이었다.
독일어로 '국민돌격대 국방군'이라는 뜻의 문구와 육군의 국가수리가 새겨져 있다. 대다수가 사복 차림이라는 것을 감안, 표시를 용이케 하기 위해 1인당 2개씩 지급해 양팔에 모두 두르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
그나마 이 완장의 장점이라면,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의 눈을 피하려면 번거롭게 군복을 벗을 필요없이 완장만 팔에서 쏙 빼서 주머니에 숨겨버리면 될 정도로 간편했다는 정도다. 독일 정부 입장에서가 아니라, 국민돌격대원들에게 있어 장점으로 작용한 부분이다.
하지만 동부전선의 소련군에겐 군복이건 완장이건 무의미한 조치였는데, 독일군의 전쟁범죄로 인해 워낙 쌓인 게 많다보니 일단 조질 생각부터 하고 이유를 찾았기 때문이다. 즉 소련군은 포로를 일단 죽이고 나서 독일군 표식이 없으면 제네바 협약 위반이라서 조졌다고 했고 독일군 표식이 있으면 독일군이니까 조졌다고 했다.
나중에는 소련군도 국민돌격대가 최소한의 훈련도 못 받고 전장으로 내몰렸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는 몰라도 이들에게 정규군 대우를 해야되지 않느냐는 의견이 독일이 항복한 후에 나오기는 했다. 감정적인 문제 외에도, 포로란 존재는 빈약하나마 피복과 급식, 주거를 제공하고 통제를 위한 인원 등 유지비가 막대하게 들기 때문에, 강제노동에도 못 써먹을 노인네나 애들까지 굳이 자비 들여가며 떠안는 건 경제적으로 타산이 안 맞는다는 점도 있었다. 소련군은 국민돌격대 뿐 아니라 베를린 전투 때 우체부나 철도원, 일반행정직 공무원[32] 등 제복 입은 사람은 닥치는대로 다 잡았다가 결국 군인이 아닌 사람들은 실제 군인처럼 굴려졌던 경찰 정도를 제외하곤 금방 풀어줬다. 소련이 포로사냥에 광분한 것은 보복의 의미도 있지만, 전선에 나섰던 소련인 장정들이 너무나 많이 전사하여[33] 전후복구에 쓸 노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소련에게 잡힌 추축국 포로들은 10년간 전후복구 노역에 종사하다가 복구가 마무리된 1955년에야 석방되었다.
4.3. 여성 부대원
심지어 여성들도 징집되어 국민돌격대에 배속된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일부 광신적인 지휘관들이 자신의 직권으로 벌인 일로, 당시 독일은 아무리 상황이 막장이었어도 여성들까지 공식적으로 징집하지는 않았다.국민돌격대에 배속된 여성들은 대부분 의무병이나 보급병, 대공포병 등으로 동원되었을 뿐이다. 소총을 들고 전투병으로써 직접 전투에 투입한 경우는 드물다.
이대영의 알기 쉬운 세계 제2차대전사를 비롯해 국민돌격대 여성부대원들이 '히틀러의 젖소'로써 위안부 성노예로 굴려졌다는 의혹이 제기되지만, 일단은 독일군은 국민돌격대 내부에 여성들을 위안부로 삼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폴란드나 소련 등지에서 납치하거나 강제/반강제로 끌고 온 여성들을 성노예로 삼은 경우는 많았다.
5. 국민척탄병과의 차이
자세한 내용은 국민척탄병 문서 참고하십시오.쉽게 설명하자면 국민척탄병은 예비군+예비군 나이를 조금 초과하거나(40대-50대) 그에 조금 미달되는 남성들(주로 17세)를 끌어모아 만든 조직이고, 국민돌격대는 그걸 넘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중학생들까지 다 동원했다고 보면 된다. 또한 국민척탄병은 평균적인 전투 경험이 있으며, 최소한의 기본 편제와 돌격 소총을 지급 받았는데, 국민돌격대는 그런것도 거의 없었다.
6. 미디어
- 다운폴 - 베를린 전투 때 국민돌격대의 비참함이 등장하는 영화. 투입되자마자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소련군에게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보다 못한 정부구역 방어사령관 빌헬름 몽케가 지휘권자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 이 문제를 제기하며 항의하자, 괴벨스는 그 유명한 "그들은 우리에게 위임했지. 그리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야"라는 잔인한 대사로 화답한다.
- 인리스티드 - 베를린 공방전 캠페인의 추축국 진영에 제1,2,3 국민돌격중대 소속 분대가 등장한다. 게임상 구분을 위해 분대원들은 다들 독일군복 비슷한 옷을 입고 있다. 상술한 국민돌격대 완장을 찬 모습도 볼 수 있는데, 실제 완장과 달리 글귀 양옆의 국가수리는 생략되어있다.
- 조조 래빗 - 마지막 전투신에서 베어마흐트 잔당, 히틀러 유겐트와 함께 연합군을 저지하는 역할로 나온다. 보다보면 그야말로 오합지졸 그 자체로 군복은커녕 철모와 완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로 할머니(?)들까지 동원해서 맞서 싸우지만 이내 털려나간다.
- 지옥의 영웅들 - 비무장한 국민돌격대 노인들이 히틀러 초상화와 피켓을 들고 미군 주인공 분대 앞을 가로막는다. 그들은 셋 셀 때까지 해산하지 않으면 쏘겠다는 미군의 경고에도 아랑곳않고 히틀러 만세를 외친다. 하지만 빡쳐버린 미군의 경고 사격에 그들은 그대로 굴복하며 해산한다.
-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 모드인 블리츠크리크에선 국방군 진영 테러 정책의 주요 보병 유닛으로 등장한다. 적절한 무장은 커녕,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민간인들이라는 실제 역사를 반영하여 적은 자원으로 빠르게 배치할 수 있지만, 전투능력이 공병분대보다도 약한 유닛으로 구현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게임인 만큼, 피복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못한 실제 역사와는 달리 분대원 전원이 통일 된 군복과 Kar98k 소총을 들고 등장하며, 지휘관 스킬 중에는 이들에게 MP40과 판처파우스트를 지급하는 것도 있어서 실제 역사보다는 사정이 그나마 나은 편이다.
-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 모델링까지 만들어진 상태였으나 최종 발매 버전에서는 삭제되어 등장하지 않으며, Eviction 미션 인트로, 빅토르 레즈노프의 대사[34]로 언급된다. 정작 이들 대신 등장하는 건 나치 독일 최정예부대 SS 의장대, 제국 의사당까지 소련군이 처들어 왔음에도 항복은 커녕 죽어라 저항한다.[35]
7. 유사 사례
독소전쟁 때 소련군은 모스크바가 함락 위기로 몰리는 등 막장 상황 때 10대 청소년과 노인들까지 동원해 노동 사단을 편성했으나, 이름부터 노동사단이었으므로 독일군 앞에 총알받이로 내몬 것이 아니라 참호 건설이나 물자 운반 등의 작업을 시켰고, 이후 전황이 나아진 후에는 대부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청년~장년 남자인구가 징집되어 전쟁터에서 갈리는 동안 후방의 산업 일선에서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가 징집연령이 되면 다시 징집되었다.영국군은 독일의 프랑스 침공 이후 영국 본토가 침공 위기에 몰렸을 때 40대 이상 중년 및 입대 불가 판정된 젊은 남성 자원자들로 이루어진 민병대 성격인 홈가드를 조직한 적이 있다. 물론 강제 징집은 아니었고 대부분 자발적으로 지원한 조직이었으며, 오히려 나라를 지키겠다는 열의가 지나쳐 소소한 사고를 일으켰을 정도[36]로 애국심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영국 정부도 "Home guard" 라는 이름 그대로, 후방 방어의 일부를 맡겼을 뿐이지[37] 총알받이로 전장에 몰아세운 적은 절대 없고 동남아시아 지방의 홈가드들은 정규군의 만류도 뿌리치고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일본 제국 역시 2차대전 말기에, 결호작전에 대비해 10대 청소년과 노인, 여성까지 긁어모아 '국민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만든 적이 있다. 국민돌격대는 그나마 진짜 인력이 부족해서 만들었다는 핑계라도 있지만, 이쪽은 인력이 충분한데도 그 짓을 했다.[38] 이쪽은 국민돌격대보다도 사정이 훨씬 안 좋아서 국민돌격대는 적어도 발사는 제대로 되는 총과 부족한 수량이나마 대전차무기를 지급받았지만,[39] 이쪽은 무라타 소총 같은 구식 소총조차 지급하지 않았고[40] 무기는 징집자들이 자체 구비해 사용해야 했는데, 일본도 같은 도검류를 챙길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고 낫 같은 농기구, 심지어 죽창까지도 동원되었다. 애초에 일본 군부가 민간인들을 동원한 의도가 국가가 망하면 국민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나라가 망하니 국민들도 다 죽어야 한다[41]였다. 그러나 징집된 이들로써는 다행히, 일본은 본토 결전 없이 핵폭탄 맞고 항복해버려서 실제로 전투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8. 기타
- 화가 오토 딕스도 국민돌격대로 징집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만 53세였다.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혀 이듬해 석방됐다.
9. 관련 문서
[1] 사람들이 들고있는 무기는 MG34, 판처파우스트, Kar98k. 참고로 유심히 잘 보면 후술하듯이 선전 목적으로 과장된 사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2] 사진 속 장면은 독일영화 몰락에서도 나온다.[3] 참고로 이들이 쓰고 있는 모자는 독일 공군(나치 독일)의 사병용 전투모이다. 이런 식으로 해군이나 공군의 쓸모없어진 피복들이 국민돌격대원들에게 일부 지급되었는데(본격적으로 투입된 1944년이면 대부분의 독일 공군과 독일 해군(나치 독일)은 이미 궤멸 수준으로 피해를 입어 전쟁 후반에는 군복을 국민돌격대로 보냈다.), 그나마 이들은 군복 비스무레한 거라도 받은 운 좋은 혹은 나쁜 축에 속한다. 사실 운이 좋다는 것도 케바케인데, 군복이 없으면 테러리스트 취급 받아 그냥 살해당해도 할 말이 없기에 평범한 군복이라도 지급 받으면 항복시 전쟁포로로 대우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SS 군복을 받는다면 군복을 입었어도 즉결처형이었다.[4] 흑기사 이야기에서는 바우어가 이를 두고 "민족의 폭풍?"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Volkssturm은 해석하기에 따라 정말 '민족의 폭풍'으로도 읽힐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한 중의적 표현이다. 실제로 독일어로 sturm, 영어로 storm은 폭풍이란 뜻과 '휘몰아치다', 즉 돌격도 의미한다. Sturmgewehr가 '돌격소총'으로 번역되는 바와 같다. 근현대에 들어서야 '돌격'의 단어로 charge가 자리잡은 것이다.[5] 사실 비교가 불가능한 게 국민돌격대와 달리 홈가드는 고향을 지키겠다며 자발적으로 참여한 자원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시절 무장을 쓰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소한 육군 군복만큼은 제대로 지급받았다.[6] 우파 파시즘으로 분류되는 집단이지만 사실 나치당에는 전직 공산주의자들이 여럿 있었다. 요제프 괴벨스, 롤란트 프라이슬러는 한때 공산주의자였다가 우파로 전향한 인물이었다.[7] 귀족+지주나 자본가 등 부유한 계급.[8] 물론 여기에는 이념적 이유 이상으로 각 분야의 수장들(괴링, 힘러, 룀 등등)이 자신의 권력기반을 충실히 하려는 목적이 컸다. 이념적 이유는 사실은 핑계에 불과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9] 소련군 포로가 되었다가 티푸스에 걸려 죽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포로 8만여 명도 당연히 여기 포함된다. 참고로 연합국 포로가 된 뒤 사망한 독일군은 1950년대 중반 석방이 완료될 때까지 3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 중 4분의 3이 소련군 포로 사망자들이다.[10] 2차대전 전체 사망자는 43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독일 본토의 민간인 사망자는 주로 폭격 사망자 위주로 50만 안팎이다. 군 사망자와 실종자. 포로 사망자는 전쟁 전체를 통틀어 320만여 명. 그리고 나머지 60만 명은 해외 거주 독일인들이 점령지역의 전쟁통에 피살되거나 현지인들의 보복으로 학살당한 것이다.[11] 실제 1945년까지 독일군은 무리한 전투 와중에 동서 양쪽에서 연합군에 추가 인명 손실을 꽤나 강요했지만 그 대가로 50만여 명의 전사자를 더 냈는데, 부상자 비율까지 감안하면 남는 병력이 없게 된다. 1945년 4~5월 시점에 연합군이 상대한 독일군 대다수가 국민돌격대와 이미 장년층이 된 30대 후반 예비역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게 그 증거다.[12] 준다 해도 우드랜드패턴이 아닌 옛날에 쓰던 민무늬 군복이나 교련복을, 그것도 대~분대장 직책 보직자만 줬다고 보면 된다.[13] 일본의 결호작전에 동원될 국민의용대는 엽총도 아니고(그런 건 1,2,3차병비동원으로 동원한 병력에게 쥐어주기도 모자라서) 쇠파이프에 식칼 묶어서 창이라고 주거나 죽창을 주는 레벨이라고 생각하면 되었다고 한다.[14] 우연히도 동방의 모 나라도 죽창운운하며 비슷한 말을 했다.[15] 웰컴 GI 어쩌구 했다는 말은 실제로는 국민돌격대원이 미군들을 사살하다가 총탄이 떨어지자 원래 끌려나온 민간인이었고 살기 위해 싸운 것이니까 정규군 장병과 사정이 다르니 봐달라고 항복의사를 밝힌 것이 진짜 민간인이 총들고 미군 사살한 것으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즉 자기 나름으로는 군인으로 항복한 것이지, 민간인으로써 갑자기 미군을 환영하는 짓을 한 것은 아니라는 말.[16] 독일은 실제 무조건 항복할 경우 연합국이 아예 전면적인 농업국가화와 완전한 국가 해체,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영토의 전면적인 회수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었다. 그나마 연합국 중에 가장 목소리가 큰 미국이 국가 해체의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고 봐서 끝까지 반대했기에 좌절된 것. 여기에 더해서 소련이 정부 차원에서는 생각보다 상황 파악을 이성적으로 하고 전후 독일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오데르-나이세 선의 영토조정만 하는 선에서 청산을 끝내버렸다. 즉 독일인들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전례로 항복할 경우 독일 국가 자체가 파멸할 거라 여겼던 것은 적어도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17] 문서 맨 윗사진에 나온 국민돌격대원들 중엔 MG34를 든 남성도 여럿 보이는데, 시기가 44년 11월이라 이건 국민 돌격대 차출 초기이기도 하고, 괴벨스가 직접 사열한 거라 선전상 무장을 좀더 충실히 쥐어줬던 것 같다.[18] 이때까지는 MG08의 면허생산형인 24식 중기관총이나 같은 맥심 계열인 PM M1910, 빅커스 기관총 등이 여전히 군용으로 쓰였으므로 이런 거라도 지급받으면 그나마 좀 나았다.[19] 다만 기록으로 남은 사진 중 MG34를 들고 있는 사진들도 간간히 보인다. 죽은 독일군 시체나 방기된 참호 혹은 군수창고에서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20] 여기까진 그나마 헌병이나 경찰, 해군 육전대 등 후방 주둔 정규군 일부도 쓰던 물건이거나 정규군의 물건에 비해 성능은 별 차이가 없으므로 차라리 나았다.[21] 단 VG-5는 그 짧은 시간에 만든 물건 주제 바리에이션이 좀 있어서 외형상으론 단발형과 동일한데 내부에 5발 들이 탄창이 있는 물건도 존재한다.[22] 전쟁 후기에 루프트바페는 사실상 사라졌다. 기관총을 달 항공기가 없으므로 이 총열들은 그저 재고 물자에 불과했다.[23] 신뢰성만 어느 정도 확보한다면 편의성은 희생할 수 있는 상황이니만큼.[24] 클립도 7.92mm에 맞춰 새로 생산하려는 계획이 있긴 했으나 1945년의 독일에게 그런 개발 및 생산은 사치였다.[25] 다만 장비 면에서 뒤지니 전투력 같은 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이쪽은 소대단위로 판처파우스트 한두 개 들고 있는데 미군은 보병 소대에 전차 두세 대, 많으면 5대이상씩 배속되어 합동작전을 펼치니 죽일 수는 있는데, 피해 교환비가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다.[26] 실제로 서방 측은 전쟁범죄자만 아니면 독일군 포로들을 의외로 쉽게 풀어줬다. 물론 프랑스나 덴마크처럼 독일 포로들을 전후 복구에 적극 동원하여 이거 저거 건설한 사례도 있긴 하다.[27] 개전 직전부터 육군은 중사 이하 군인에게 정복 착용 및 지급을 중단시켜 피복비 절감을 추진했는데, 이전에 받은 사람들 혹은 민간 행사에서 꼬까복으로 입으려고 자비로 맞춘 군인들이 가진 정복류도 꽤 많이 있었다.[28] 주로 장교나 부사관 등 군 장기 복무 경험자들 중에 선발했다.[29] 공군에선 항공기 정비 특기들이 많이 입었으나, 육상 전투 훈련 등을 할 때에도 많이 착용했다.[30] 당시 독일에선 독립된 소방 조직이 없고, 경찰 내에 소방경찰이 존재했다. 이같은 체계는 과거 어느 나라에든 많이 채택되던 방식이며, 치안/경찰기구로부터 독립한 전문적인 소방/구조를 위한 기구를 창설 및 운영한 역사는 세계적으로도 최근이다. 당장 한국도 소방방재청(현 소방청) 창설 전에는 치안본부 산하에 소방과를 두었다.[31] 같은 이유로, 일본이 조직한 국민의용대도 완장을 사용했다.[32] 제3제국 정부는 타국에선 사복 근무했을 행정 공무원들에게까지 제복을 지급했다.[33] 소련 남성중 1910-20년대생이 전쟁에서 떼죽음을 당하여, 1970년대까지 성비복구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34] "적들은 이제 노인, 어린아이, 허약한 자까지 나오고 있다!"[35] 다만 이전 미션 까지는 다르게 대부분의 병사들이 몸이나 머리에 붕대를 둘러서 등장한다. 즉 부상을 입어도 끝까지 싸우는 모습이긴한데 결국엔 스킨이라 싸우는 실력은 다 똑같다.[36] 독일군 첩보원인줄 알고 등산하던 사진가를 때려눕혔다던가 아니면 영국 본토 항공전 도중 격추당한 자유 폴란드군 조종사를 영어를 못 한다며 독일군 공수부대원 내지는 조종사로 생각하고 잡아 팼다던가. 심지어 미국 영어를 하는 미군 조종사나 자유 프랑스군 조종사를 억양이 이상하다면서 두들겨팬 사례도 있고, 군에서 '경계 강화'인 크롬웰 1단계만 내렸는데 그걸 독일군이 본토를 지금 침공한다고 생각해 주요 교량을 폭파하고 가축들을 쏴 죽이기도 했다.[37] 도버 해협을 건너오는 독일군 항공기를 감시하는 견시라든지. 그나마도 본격적인 전투임무는 어지간해서는 맡기지 않았다.[38] 2차대전 당시 일본은 아시아 국가답게 출산율이 높아서 고령화 비율은 4% 안팎으로 매우 낮은 편이었고, 유소년 인구의 비중도 높았으며, 국가가 전반적으로 젊은 축이었다. 출산율이 높아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도 독일이나 러시아와는 달리 인구 구조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39] 게다가 이쪽은 악성재고로 남은 부품들이 많아서 무기생산은 그나마 가능한 수준이고 최소 연합군이나 동맹국의 총기들을 카피할 수 있는 기술이라도 있다.[40] 독일군은 적어도 국민돌격대에게 소총 정도는 쥐어줄 수 있었던 반면, 일본은 전쟁 말 급조된 정규군 사단조차 급조한 화승총을 지급받은 예가 있었을 정도였다. 상기한 무라타 소총도 창고에서 꺼내서 급조 사단에게 지급하기는 했지만 그것조차도 부족했다.[41] 오키나와 전투 및 태평양 전투에서 민간인들에게 가해진 수많은 자살강요 참극이 악명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