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4d3b7,#e4d3b7><colcolor=#362f26,#362f26> 오토 딕스 Otto Dix | |
본명 | 빌헬름 하인리히 오토 딕스 (Wilhelm Heinrich Otto Dix) |
출생 | 1891년 12월 2일 |
독일 제국 로이스게라 후국 운테름하우스 | |
사망 | 1969년 7월 25일 (향년 77세) |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 징겐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화가, 판화가 |
학력 | 드레스덴 미술학교 |
배우자 | 마르타 딕스(1923년 결혼)[1] |
자녀 | 넬리 딕스 (딸, 1923~1955) 우르수스 딕스 (아들, 1927~2002) 얀 딕스 (아들, 1928~2019) |
사조 | 신즉물주의, 표현주의, 다다이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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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화가이자 판화가. 제1차 세계 대전과 독일 제국의 몰락, 바이마르 공화국의 성립과 붕괴, 나치 독일의 등장과 제2차 세계 대전, 그리고 종전 후 동서 분단까지 독일의 격동기를 겪음으로써 혼란스러운 독일 근현대사의 잔혹한 실상과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이면서도 기괴하게 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조지 그로스, 막스 베크만과 함께 표현주의에서 파생된 미술사조이자 미술운동인 '신즉물주의'[2]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2. 생애
1891년 12월, 주철 공장 직원인 아버지 프란츠 딕스와 재봉사인 어머니 루이즈 딕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그는 자신의 사촌이자 화가인 프리츠 아만의 작업실에서 거의 하루를 보냈고 그로 인해 자연스레 화가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1910년 오토 딕스는 드레스덴 미술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미술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사실주의에 입각한 풍경화와 자화상을 주로 그렸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독일 제국의 군인으로 입대했는데, 드레스덴의 야전 포병대에 배치되었다. 이후 1915년엔 서부전선 기관총 부대의 부사관으로 임명되어 솜 전투에 참전했으며 1918년엔 벨기에의 플란데런 서부전선에 배치되어 루덴도르프 공세에 뛰어들었다. 그는 전쟁에 대한 공로로 철십자 훈장 2급을 수여받았으며 1918년 12월에 군 복무를 마쳤다. 약 4년 간의 참전 경험으로 인해 전쟁의 참상을 뼈저리게 체감했던 그는 끊임없이 전쟁에 관련된 악몽에 시달려야 했고, 이때부터 향후 그의 작품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제대하자마자 그는 자신의 고향인 게라로 돌아가지만, 이듬해 1919년엔 드레스덴으로 옮겼다. 1921년엔 당시 금속 세공사였던 마르타 코흐를 만났고, 2년 뒤 1923년에 둘은 결혼을 했다.
1925년엔 조지 그로스, 막스 베크만, 하인리히 다브링하우젠 등 독일의 여러 화가들과 함께 '신즉물주의' 전시회를 열어 새로운 미술 사조의 탄생을 알렸다.
나치가 정권을 잡았던 시기가 도래하자 나치 측에선 오토 딕스의 작품들을 퇴폐미술로 취급해 당시 드레스덴 미술학교의 교수였던 그를 강제 파면했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1937년 뮌헨의 퇴폐미술전[3]에 걸려 공개적으로 조롱당하고 파괴되었다.
나치 독일 시기에 그는 나치 정부의 압력으로 인해 제국미술원에 가입했다. 당시 나치 독일의 모든 미술가들은 제국미술원 가입이 의무였다. 오토 딕스는 '국민 정서에 부정적이지 않는' 풍경화들만 그린다는 조건하에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정부의 허가를 받았으나, 그는 뒤에서 나치를 풍자하고 비판하는 작품들을 몰래 그렸다.
1939년 그는 게오르크 엘저의 아돌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지만, 이후 풀려났다. 실상 오토 딕스는 해당 사건과 연관이 없었으나, 나치의 눈엣가시에 든 인물들에게 누명을 씌워 취조를 함으로써 이들을 탄압을 하려는 의도로 억울하게 잡힌 것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국민돌격대로 강제 징집되어 전쟁에 참전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후 그는 프랑스 부대에 잡혀 포로로 지냈고, 1946년에 풀려났다.
포로에서 해방되자 그는 드레스덴으로 돌아가 1966년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는 그간의 전쟁 경험과 억압된 사회 속에서 보냈던 삶을 바탕으로 종교적 알레고리와 전쟁 PTSD에 관련된 작품들을 만들었다. 비록 그는 서독에서 여생을 보내며 미술계 평단으로부터의 인정을 받으며 화가 활동을 이어갔으나 동독에서도 그를 독일 최고의 화가 중 하나로 인정받았을 정도로 잘 알려졌다.
1969년 7월 그는 바덴뷔르템베르크의 남단 도시인 징겐에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떴다.
3. 대표작
스카트 하는 사람들 (Die Skatspieler) 독일 신 국립 미술관 |
돌격대원들 가스 공격을 받자 진격하다 (Sturmtruppe geht vor unter Gas) 독일 역사 박물관, 미국 뉴욕 MoMA 등 |
무희 아니타 베르버의 초상 (Porträt der Tänzerin Anita Berber)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립 은행[4] |
저널리스트 실비아 폰 하르덴의 초상 (Bildnis der Journalistin Sylvia von Harden) 프랑스 파리 국립 근대 미술관[5] |
전쟁 (Der Krieg) 독일 드레스덴 갤러리 노이에 마이스터 |
[1] 혼전 성명은 '마르타 코흐'[2] 표현주의가 지나치게 주관적인 나머지 대상의 실재 파악을 벗어나 비합리주의적 경향으로 치우치는 데에 반대하여 실제 대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해 실재감의 회복을 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3] 독일 국민들의 정서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명목으로 퇴폐미술로 분류된 당시 모더니즘 미술가들의 작품들을 걸어 이들을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전시회였다.[4] 슈투트가르트 예술 박물관으로부터 장기 대여. 이 초상화의 주인공인 아니타 베르버(Anita Berber)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명성을 떨쳤던 인물로, 오토 딕스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나치 치하에서는 퇴폐 문화라 하여 금기시되었다. 아니타는 카바레 무대에서 나체 공연을 펼쳤는데, 죽음, 질병, 중독 등, 세상의 어두운 면을 주제로 한 안무를 직접 짜서 무대에 올릴 정도로 예술성을 추구하는 인물이었으나, 당시에는 알몸이란 점만 부각되어 결국 나치에 의해 퇴폐로 낙인찍혔던 것이다. 또한 본인이 양성애자이고, 약물에 중독되어 기행을 벌인 점[6]도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요인이었다. 하지만, 나치 청산 이후에는 예술가로서의 면모가 재평가되고 있다. 링크 이 초상화는 1925년 작품으로, 그녀의 26세 때 모습을 담고 있는데, 사진을 검색해 보면 초상화와는 달리, 미인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인물을 예쁘게 표현하지 않는 것이 오토 딕스의 특징이다. 다만 붉은 머리는 의도적으로 과장해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실제 머리색이라고 한다. 이처럼 패션에서도 앞서 가는 인물이라, 그 시대의 레이디 가가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아니타 베르버는 이 초상화가 그려진 후 3년 후엔 세 번째 남편의 도움으로 중독을 치료했지만, 오랫동안 건강을 해친 탓에 결핵으로 요절했다. 아니타는 생전에 마취제인 클로로포름과 에테르 연기를 흡입하면서 장미꽃을 먹는 것을 즐겼는데, 그중 클로로포름은 폐 손상을 유발하는 발암 물질로 밝혀져 현재 사용이 금지되었다. 그런 이유로 정확한 사인이 결핵인지, 약물중독의 후유증인지 불분명하다고 한다.[5] 딕스는 그녀에게 모델을 제안하며 “당신의 모든 게 이 시대를 대변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에 몰두하여 외모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커리어 우먼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란 시각이 있다.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