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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09:15:03

퇴폐미술

모더니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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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당시 상황3. 영향

1. 개요

Degenerate art / Entartete Kunst

나치 독일 시기인 1933년 ~ 1945년 사이에 모더니즘 예술에 대한 멸칭이자 가해진 박해.

2. 당시 상황

나치 독일 시대에 독일의 문화예술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 히틀러가 게르마니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깡그리 박살났으며 주요 문화재급 건축물들이 불도저에 아작났다.[1]

영화, 연극, 출판 분야에서 활동하던 유대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국외로 빠져나갔다. 특히나 영화산업은 1920년대에는 유럽 전체에서 제작되는 영화 수보다 독일에서 제작되는 영화가 더 많을 정도로 번성했고 미국의 할리우드에 이어 두 번째로 번성했지만, 나치 집권 이후에는 괴벨스가 영화산업을 통폐합하면서 거의 국영화시켜 몇 개 회사만 남겼고 정권 찬양적 홍보 영화나 반유대주의 영화만 찍어냈다. 연극계도 직격탄을 맞아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좌파 예술가들은 탄압받다가 망명해야했다.

문학계에서도 《서부 전선 이상 없다》로 국가공인 좌파 선고를 받은 레마르크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마스 만 등 나치당에 의해 유대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선고받은 작가들도 나치 독일을 떠났다. 유대인이었던 멘델스존의 음악도 당연히 금지당했다.[2]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러시아폴란드 작곡가의 연주도 금지당했다. 이외에 나치 독일이 학문계에 끼친 악영향은 나치 독일/학문과 문화의 손실 참조.
파일:external/file.mk.co.kr/image_readtop_2013_1216461_13859428551124413.jpg
케테 콜비츠, <부모>, 1923(#)
이와 같은 탄압은 미술 분야도 당연히 피할 수 없어서 나치당에서 자기들의 잣대로 반국가적인 요소가 들어갔다고 선언하면 탄압을 면치 못했다. 케테 콜비츠는 좌파적이고 국가 정책에 반대되는 작품을 만든다는 이유로 나치에 의해 망명해야했다.[3] 디자인 분야에서는 발터 그로피우스가 주도하던 바우하우스[4]가 유대적 바우하우스 악질 문화라는 나치의 비난을 받으며 폐쇄됐고, 함부르크의 바르부르크 예술사 연구소도 설립자가 유대계라는 이유 만으로 박해를 우려해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연구소를 영국으로 이전해버렸다.
파일:external/oaj.oxfordjournals.org/F5.large.jpg
1937년 뮌헨에서 열린 퇴폐미술전 제3전시실 모습
무엇보다도 히틀러는 모더니즘 미술을 공개적으로 탄압했다. 히틀러는 인체를 새롭게 재해석한 입체파 등의 새로운 예술 사조를 '인체공부를 게을리 한 화가가 그린 3류 작품'으로 깎아내렸으며 모더니즘 미술이 독일 국민의 정서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명목 하에 퇴폐예술로 분류하고 퇴폐미술전(Die Ausstellung "Entartete Kunst", 1937)을 열어 탄압하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가했다.(#1, #2, #3)

퇴폐미술전에서는 퇴폐미술로 규정된 작품들이 벽에도 걸리지 못한 채 버려지다시피 방치되거나 추상화 작품들이 정신병동에 수감된 환자들이 그린 그림과 같이 걸리는 식으로 조롱당했고, 더 나아가 퇴폐미술로 규정된 작가들의 작품을 쌓아놓고 공개적으로 소각하는 반달리즘도 자행됐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화가들이 추방당하거나 온갖 수모를 당했음은 물론이다. 대표적 표현주의자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자살을 택했고, 다다이스트쿠르트 슈비터스 역시 망명을 택했다. 아직도 이따금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이 약탈했던 모더니즘 미술들이 공개되기도 한다.(#)
파일:external/img.khan.co.kr/20090425.01100121000009.01M.jpg
히틀러가 1910년 그린 수채화
대중매체에서는 당대 미술계 코드와 맞지 않는 구시대 예술을 선호했던 히틀러가 모더니즘 예술을 증오했다는 설을 내놓기도 한다.(#) 히틀러가 미술가 지망생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있다. 히틀러가 그린 수채화가 공개되어 경매로 팔린 사례도 있다.(#) 히틀러가 그린 그림은 대체로 '뭔가 칙칙하고 음울하다'는 평가가 많다.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능력은 그럭저럭 되지만 예술적 감흥이나 독창성은 없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인상주의처럼 색채나 소재가 산뜻한 것도 아니고 야수주의입체주의처럼 뭔가 파격적이지도 않다. 아카데미즘 화가가 되어 벌어먹고 살 정도로 기교가 뛰어난 그림도 아니고, 산업 디자인으로 먹고 살 정도로 뭔가 필이 딱 오는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더니즘 미술처럼 독창적이지도 않은 그냥 평범한 그림이다. 아마 히틀러도 자신이 예술가로서 가망이 없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여담이지만 히틀러의 그림을 역이용해 그의 수채화에 무지개를 그려놓은 작가도 있다.(#)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4070600946_1.jpg
아돌프 지글러, 《네 개의 요소》, 1937 히틀러가 사랑한 그림으로 알려져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rno_Breker_Der_Sieger_%281939%29.jpg
아르노 브레커, 《승리자》, 1939(#1, #2)
히틀러는 누구나 이해하기 쉽지만 표현이나 창의력이 다소 제한된 신고전주의를 우대했다. 아돌프 지그럴이나 아르노 브레커같은 예술가들이 대표적으로, 이들의 작품은 겉으로 보기에는 좋지만 나치 독일의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를 선전하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우람한 남성과 우아한 여성을 표현한 누드는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게르만 민족의 우월한 혈통을 강조하고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가정과 이를 바탕으로 한 국가주의를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정치적으로는 영웅주의를 강조하면서도 개인이 국가를 위해서 희생해야 마땅하다는 논리를 깔고 있는 데다 그 과정에서 성인 여성이나 어린이들이 성인 남성에 복종해야한다는 권위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나치 시대의 예술에서는 이상적인 가정[5]을 주제로 그려진 그림을 긍정적으로 봤다.

3. 영향

이후의 예술계, 특히나 예술비평 쪽에서는 미적으로 겉보기에 좋은 것이 반드시 윤리적으로 올바르게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해 작품을 평가하는 관습이 생겨나면서 현대미술은 이상화(idealization)를 경계한다. 근대 이전의 진부한 예술 형식을 따라 작품을 만들면 권력을 선전하고 피지배자를 세뇌시키는 예술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극도로 경계를 보내게 되었다. 대다수의 대중이 이미 알 정도로 유명한 예술은 대중영합주의에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 그 예술이 영웅주의나 선정주의에 호소할 경우 특히 더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현대미술에서 국가권력을 칭송하거나 가부장 중심의 가정질서 등 전통적 가치를 강조하는 예술이 적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보기에 딱 좋은 느낌은 주지 못하더라도 관람자가 개념적·철학적으로 좀 생각하게 만드는 예술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예술계 종사자들이 많다. 겉보기에는 심심하고 재미없지만 그 이면에 심오하고 생각해 볼 만한 내용을 담은 예술이 차라리 더 낫다는 경향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현대미술이나 평론은 점점 눈에 보이는 작품 자체보다 그 작품의 맥락이나 작가의 의도를 따지는 경향이 생겼다. 작품 자체보다 썰이 길어지고 어려워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나치 독일이 오늘날 현대미술계를 관념적으로 만든 계기 중 하나인 셈이다.[6]

다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던 공산권은 예술의 역사를 달리한다. 하지만 동유럽 혁명 및 자본주의화된 이후에는 북한 정도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 히틀러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무솔리니도 로마 시절 건물들을 복원한답시고 마찬가지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중세나 르네상스 시절 건물들을 밀어버렸다.[2] 동상 철거에 반대한 라이프치히 시장 카를 괴를데러는 시장직에서 짤렸고 나중에 발키리 작전에 가담했다가 발각돼 처형당한다.[3] 콜비츠의 판화는 한국의 민중미술에도 영향을 줬다고 알려져있다.[4] Bauhaus, 바이마르 공예학교.[5] 엄한 아버지와 부드러운 어머니.[6] 한편으로는 이러한 태도도 현실의 문제를 표현하는 것을 회피한다는 비판도 나왔는데 민중예술은 그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