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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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Degenerate art / Entartete Kunst나치 독일 시기인 1933년 ~ 1945년 사이에 모더니즘 예술에 대한 멸칭이자 가해진 박해.
2. 당시 상황
나치 독일 시대에 독일의 문화예술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 히틀러가 게르마니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깡그리 박살났으며 주요 문화재급 건축물들이 불도저에 아작났다.[1]영화, 연극, 출판 분야에서 활동하던 유대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국외로 빠져나갔다. 특히나 영화산업은 1920년대에는 유럽 전체에서 제작되는 영화 수보다 독일에서 제작되는 영화가 더 많을 정도로 번성했고 미국의 할리우드에 이어 두 번째로 번성했지만, 나치 집권 이후에는 괴벨스가 영화산업을 통폐합하면서 거의 국영화시켜 몇 개 회사만 남겼고 정권 찬양적 홍보 영화나 반유대주의 영화만 찍어냈다. 연극계도 직격탄을 맞아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좌파 예술가들은 탄압받다가 망명해야했다.
문학계에서도 《서부 전선 이상 없다》로 국가공인 좌파 선고를 받은 레마르크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마스 만 등 나치당에 의해 유대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선고받은 작가들도 나치 독일을 떠났다. 유대인이었던 멘델스존의 음악도 당연히 금지당했다.[2]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러시아와 폴란드 작곡가의 연주도 금지당했다. 이외에 나치 독일이 학문계에 끼친 악영향은 나치 독일/학문과 문화의 손실 참조.
케테 콜비츠, <부모>, 1923(#) |
1937년 뮌헨에서 열린 퇴폐미술전 제3전시실 모습 |
퇴폐미술전에서는 퇴폐미술로 규정된 작품들이 벽에도 걸리지 못한 채 버려지다시피 방치되거나 추상화 작품들이 정신병동에 수감된 환자들이 그린 그림과 같이 걸리는 식으로 조롱당했고, 더 나아가 퇴폐미술로 규정된 작가들의 작품을 쌓아놓고 공개적으로 소각하는 반달리즘도 자행됐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화가들이 추방당하거나 온갖 수모를 당했음은 물론이다. 대표적 표현주의자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는 자살을 택했고, 다다이스트인 쿠르트 슈비터스 역시 망명을 택했다. 아직도 이따금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이 약탈했던 모더니즘 미술들이 공개되기도 한다.(#)
히틀러가 1910년 그린 수채화 |
아돌프 지글러, 《네 개의 요소》, 1937 히틀러가 사랑한 그림으로 알려져있다.(#) |
아르노 브레커, 《승리자》, 1939(#1, #2) |
3. 영향
이후의 예술계, 특히나 예술비평 쪽에서는 미적으로 겉보기에 좋은 것이 반드시 윤리적으로 올바르게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해 작품을 평가하는 관습이 생겨나면서 현대미술은 이상화(idealization)를 경계한다. 근대 이전의 진부한 예술 형식을 따라 작품을 만들면 권력을 선전하고 피지배자를 세뇌시키는 예술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극도로 경계를 보내게 되었다. 대다수의 대중이 이미 알 정도로 유명한 예술은 대중영합주의에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 그 예술이 영웅주의나 선정주의에 호소할 경우 특히 더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현대미술에서 국가권력을 칭송하거나 가부장 중심의 가정질서 등 전통적 가치를 강조하는 예술이 적은 이유이기도 하다.그럴 바에는 차라리 보기에 딱 좋은 느낌은 주지 못하더라도 관람자가 개념적·철학적으로 좀 생각하게 만드는 예술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예술계 종사자들이 많다. 겉보기에는 심심하고 재미없지만 그 이면에 심오하고 생각해 볼 만한 내용을 담은 예술이 차라리 더 낫다는 경향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현대미술이나 평론은 점점 눈에 보이는 작품 자체보다 그 작품의 맥락이나 작가의 의도를 따지는 경향이 생겼다. 작품 자체보다 썰이 길어지고 어려워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나치 독일이 오늘날 현대미술계를 관념적으로 만든 계기 중 하나인 셈이다.[6]
다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던 공산권은 예술의 역사를 달리한다. 하지만 동유럽 혁명 및 자본주의화된 이후에는 북한 정도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 히틀러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무솔리니도 로마 시절 건물들을 복원한답시고 마찬가지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중세나 르네상스 시절 건물들을 밀어버렸다.[2] 동상 철거에 반대한 라이프치히 시장 카를 괴를데러는 시장직에서 짤렸고 나중에 발키리 작전에 가담했다가 발각돼 처형당한다.[3] 콜비츠의 판화는 한국의 민중미술에도 영향을 줬다고 알려져있다.[4] Bauhaus, 바이마르 공예학교.[5] 엄한 아버지와 부드러운 어머니.[6] 한편으로는 이러한 태도도 현실의 문제를 표현하는 것을 회피한다는 비판도 나왔는데 민중예술은 그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