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 |||
掘 | 墓 | 鞭 | 尸 |
팔 굴 | 무덤 묘 | 채찍 편 | 주검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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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미
고우영 십팔사략에서 묘사된 굴묘편시.[1]
원 뜻은 묘를 파헤쳐 시체에 매질을 한다는 뜻의 사자성어. 사전적으로 잘 알려진 의미는 통쾌한 복수와 설욕을 의미, 반대로 지나친 복수를 하는 행동을 비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2. 유래
及呉兵入郢, 伍子胥求昭王. 既不得, 乃掘楚平王墓, 出其屍, 鞭之三百, 然後已. 申包胥亡於山中, 使人謂子胥曰:「子之報讎, 其以甚乎! 吾聞之, 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 今子故平王之臣, 親北面而事之, 今至於僇死人, 此豈其無天道之極乎!」伍子胥曰:「為我謝申包胥曰, 吾日莫途遠, 吾故倒行而逆施之.」
오나라의 병사들이 영(초나라 수도)에 들어왔을 때 오자서는 소왕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초나라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을 꺼내 300번 채찍질을 한 다음 그만두었다. 산속으로 도망간 신포서가 사람을 시켜 오자서에게 말했다. “그대의 복수가 이렇게 심하다니! 내가 듣기에 사람이 많아서 하늘을 이긴다 하더라도 결국 하늘이 정한 것이 능히 사람을 물리친다고 했소. 그대는 과거 평왕의 신하로서 몸소 북쪽을 향하고는[2] 그를 섬겼거늘 지금 죽은 사람을 욕보이니 이 어찌 하늘의 도가 없는 흉악한 일이란 말인가!” 오자서가 대답했다. “신포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일러주시오. '나의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멀어서, 내 일부러 거꾸로 (하늘의 도를) 행하고 (하늘의 도를) 거슬러 시행했다’고 말이오.”
『사기』 오자서열전.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왕 초평왕은 본디 며느리가 될 진나라의 공주 맹영을 절세미인이라 하여 신하 비무기의 권유를 받아 자신이 취했다. 태자 건은 불만없이 공주의 시녀와 결혼해 자식을 보았으나 초평왕과 비무기는 태자 건이 원망하려 한다 여겨 죽이려 들었는데 태자의 스승 오사(吳奢)는 자신은 일족과 함께 죽음을 택했으나 아들 오자서는 태자일행을 모시고 도망가게 하였다. 후일 온갖 죽을 고생을 한[3] 오자서는 오나라의 대신이 되었고 손무와 함께 초나라를 쳐서 수도 영(郢)에 이르러 함락시켰으며 평왕과 진나라 공주의 아들인 초소왕은 간신히 도주한다. 그러나 오자서의 일가를 몰살시킨 초 평왕과 비무기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다.[4] 오나라의 병사들이 영(초나라 수도)에 들어왔을 때 오자서는 소왕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초나라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을 꺼내 300번 채찍질을 한 다음 그만두었다. 산속으로 도망간 신포서가 사람을 시켜 오자서에게 말했다. “그대의 복수가 이렇게 심하다니! 내가 듣기에 사람이 많아서 하늘을 이긴다 하더라도 결국 하늘이 정한 것이 능히 사람을 물리친다고 했소. 그대는 과거 평왕의 신하로서 몸소 북쪽을 향하고는[2] 그를 섬겼거늘 지금 죽은 사람을 욕보이니 이 어찌 하늘의 도가 없는 흉악한 일이란 말인가!” 오자서가 대답했다. “신포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일러주시오. '나의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멀어서, 내 일부러 거꾸로 (하늘의 도를) 행하고 (하늘의 도를) 거슬러 시행했다’고 말이오.”
『사기』 오자서열전.
하지만 영성을 함락시킨 오자서는 원한을 결코 잊지않아 평왕의 무덤을 찾아가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찾아낸 뒤 구리 채찍으로 수백 대[5]를 쳐 시체가 형체조차 찾을 수 없게 박살내고서야[6] 겨우 매질을 그쳤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굴묘편시(掘墓鞭尸)의 고사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기껏 무덤을 찾았더니 도굴 방지용 가짜 무덤이라 오자서는 이를 갈며 분통해했는데, 소문을 듣고 어느 노인이 찾아와 진짜 평왕의 무덤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병사들을 시켜 무덤을 파내고 시체를 아주 박살낸 오자서가 비로소 노인에게 '노인장은 어찌하여 무덤 위치를 아는 거요?' 질문하자 자신은 노역으로 끌려와 무덤을 만들던 장인인데 무덤을 다 만들고 나니 낌새가 안 좋아 겨우 달아나 목숨은 구했지만 친구와 이웃, 동료들 대다수 무덤 노역에 동원된 이들은 무덤의 비밀을 지키고자 학살당했다는 것이었다. 늙은이 주제에 큰 보물은 필요없고 억울하게 죽어간 그들을 기리는 작은 사당이라도 짓고 싶다면서 그 부탁할 겸 찾아와 무덤 위치를 가르쳐주었다고 하자 오자서는 한숨을 쉬며 '평왕 그놈이 여기에도 원한을 남겼구나!' 탄식하였고 노인에게 후한 재물로 보답했다고 한다.[7]
이때,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는 산속에서 피난 중 오자서가 초 평왕의 시체에 채찍질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아무리 복수라지만 한때 왕을 모셨던 신하로서 시체 훼손은 차마 못할 짓이 아니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 말에 오자서는 '날은 저무는데 길이 멀어서(일모도원; 日暮途遠), 거꾸로 걸으며 거꾸로 일을 하였소이다(도행역시; 倒行逆施)'라고 변명한다. 오자서의 답변을 듣고 실망한 신포서는 진애공(영성) 앞에서 일주일간 먹지도 자지도 않고 울면서 애공과 신하들을 감동시켜서 원군을 청해 결국 오자서를 초나라 땅에서 몰아내어 버린다.[8] 본래 오자서는 함께 망명하였던 태자 건[9]의 아들 왕손 승을 초의 왕위에 앉히고, 자신이 초의 재상에 취임하여 초를 오의 속국으로서 재건하려 했으나, 초의 부귀에 맛을 들인 오왕 합려는 초의 본토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기에 시간을 질질 끌다 반격을 허용한 것이다. 결국 초가 오에 막대한 영토를 할양하고, 왕손 승을 백공(白公)으로 세워 맞아들이는 것으로 화의를 맺게 되었다.[10]
3. 여담
이 일 때문에 초나라에는 시신을 포함해 왕의 몸에 해를 끼치면 처형하는 법이 생겼고, 후일 오기가 최후의 승부수를 띄우는 데도 일조하였다.후대에도 굴묘편시가 있었는데 남조의 진나라를 세운 무제 진패선의 무덤인 만안릉 사건이다. 남조의 양나라가 후경의 난으로 거의 몰락하자 한족 출신 장군 진패선과 선비족 출신 장군 왕승변은 각각 군대를 이끌고 후경을 박살내고 권력을 잡는다. 이 둘은 겉으로는 서로 겹사돈을 맺고 의기양양했으나, 속으로는 서로를 해치려고 했다. 그런데 당시 황제였던 원제 소역이 서위의 군대에게 잡혀 죽자 후계를 두고 대립하게 된다. 진패선은 원제의 아홉 번째 아들 소방지를 밀었다. 한편, 왕승변은 예전에 동위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사로잡혔던 무제 소연의 조카 소연명, 즉 소방지의 육촌 아저씨를 밀었는데 결국 세력이 더 강한 진패선은 소방지를 즉위시키니 그가 경제가 되었다. 그러자 왕승변은 북제의 군사를 끌어들이려다가 진패선에게 살해당하고 북제의 군대는 양나라의 백성들의 열렬한 지원에 힘입어 패퇴하고 말았다. 정해진 형식에 따라 소방지는 진패선에게 선양하니 진패선은 진나라를 세웠다.
일단 진패선은 559년에 재위 3년 만에 병사하고 만안릉에 안장된다. 그러다가 정확히 30년 후인 589년에 일이 터진다. 원래 죽은 왕승변의 가솔은 북제에 투항했는데 북제는 서위의 제위를 얻은 북주에게 멸망했다. 북주는 수문제 양견에게 멸망하고 수나라가 589년에 진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통일할 때 왕승변의 아들 왕반은 장강을 건너와 진패선의 무덤을 파헤쳐 재물을 취하고 관을 부수고 시신을 수백 대 매질한 다음 그 시신을 불태우고 그 재를 물에 섞어 마셨다. 섬뜩한 것은 이전에 후경도 이렇게 죽음을 당했다는 것. 어쨌든 현재 옛 진나라의 수도였던 현재 남경 북쪽에 가보면 만안릉 유지가 남아있는데 바로 그때 왕반이 파헤쳐 놓은 빈 무덤 터다.
이런식의 시체훼손이 공식 형벌로 된 경우로 부관참시가 있다.
[1] 구 동아출판 버전은 한술 더 떠 구리 채찍을 든 오자서의 모습으로 표지를(2권) 장식했는데, 살기를 넘어 귀기가 느껴진다.# 구판의 오자서는 신판에서는 뒷표지를 장식한다.[2] 왕은 남쪽을 향하고 신하는 북쪽을 향한다. 건물 자체가 남면이라 자연스럽게 배치가 그렇게 된 것이다.[3] 이 과정에서 태자 건이 죽었는데 정나라에 있던 중 진나라에서 정나라를 정복하려는데 도와주면 정나라를 다스리게 해주겠다고 꾀었는데 정나라의 도움 받고 살던 처지에서 이게 웬떡이냐 싶던 태자 건이 오자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걸 받아들였는데 그만 정나라에서 이를 미리 알아버려 태자 건은 죽었고, 오자서는 태손 승을 데리고 도망쳤다.[4] 연전연패로 초나라 백성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자 영윤 낭와는 비무기를 역적으로 몰아 그 집안을 멸족시켰다. 이때 백성들이 좋아하면서 침을 뱉었다고 나온 바 있다.[5] 사기 오자서 열전과 십팔사략에는 300대로 기록되어 있고, 다른 중국 사서이나 해외 사서에서는 500대라고 기록한 것도 있다.[6] 십팔사략에선 평왕의 시체가 수은을 칠해져 있어서 그다지 썩지 않았기에 오자서는 더 기뻐하며 두 눈을 후벼파고 채찍으로 때렸다고 한다.[7] 정비석은 소설 손자병법에선 아무리 자신의 동료들을 죽인 왕이지만 그래도 그 왕의 시체를 채찍질하겠다는 말을 오자서에게서 듣고 도의를 저버린 자를 도왔다고 생각하며 연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써놨다. 반대로 이수광은 소설 오자서에서 노인이 감사하며 작은 사당을 마련하여 원혼들을 위로하며 살아갔다고 나온다.[8] 사실 초 소왕이 자신의 딸인 진나라 공주의 아들, 즉 자신에게는 외손자였으니 진나라 입장에서도 무작정 외면하고 구원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터였다.[9] 정나라에서 반란을 도모하다 죽었다.[10] 훗날 백공 승은 부모를 죽게한 정나라로 쳐들어가고자 했으나 초나라가 불허하자 반란을 일으키려다 제거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