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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9:58:22

홈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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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창설 배경3. 홈가드의 부실한 수준4. 국민돌격대와의 비교5. 지나친 열의6. 활약7. 위기 이후의 홈가드8. 공산 유격대?9. 기타
9.1. 홈가드 출신 인물

1. 개요


LDV (Local Defence Volunteers) 혹은 Home Guard로 표기되는 조직으로, 국내 매체에서는 '국민 방위대', '향토 방위대', 자택경비원[1]으로 많이 번역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본토의 방위를 위해 조직한 육군 산하 군사 조직. 비록 정규 육군의 통제를 받긴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민병대 이상의 전투력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2. 창설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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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테면 와 보라지"
"Let 'em all come"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영국은 신속히 병력을 확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본래 상비 병력, 특히 육군의 규모가 작았던 영국군은 병력을 보충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당장 병력이 부족한데 반해 영국 본토 방위에 필요한 병력 수요는 많았다. 특히 됭케르크 철수작전 이후 독일군이 영국 본토를 침공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이 수요는 더욱 커졌다. 이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영국은 결국 현역 대상자가 아닌 남성, 즉 40대 이상의 중장년들[2]이나 장애나 희귀병 등으로 인해 징병검사에서 탈락한 징병대상 연령대의 남성들 일부도 소집 혹은 지원받아 일종의 민병대를 조직해야 했다. 이들이 바로 홈가드이다.

3. 홈가드의 부실한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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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가드는 2선급 민병대라서 장비도 상당히 빈약했다. 당장 정규 병력도 됭케르크에 중장비를 놔두고 도망친 마당에 충분한 장비가 있을 리 없었다. 당시 영국군의 제식 소총인 리-엔필드 소총을 홈가드 대원들이 돌려가며 쓸 수 있으면 다행이었고, 이미 도태장비였던 루이스 경기관총 하나에 사람 대여섯이 붙는 경우는 흔했다. 이 것도 모자라서 집에서 가져온 엽총이나 쇠스랑, 몽둥이 같은 장비로 무장한 대원도 적지 않았다. 간신히 무기를 만들어 나눠주기는 했는데 그 무기란 게 백린이 들어간 화염병[3], 흑색화약으로 발사되는 쇠파이프 대포[4], 정규군은 결국 채택 안 한 대전차수류탄 같은 것들이었다. 수류탄 투척 훈련은 무게와 크기가 비슷한 감자를 던지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근접 무기를 도구를 이용해서 급조하라고 독려하는 공익광고까지 제작될 정도였다.

개중에는 진짜 도 있었다. 윈스턴 처칠이 홈가드에 대해 언급하며 "모든 홈가드 대원들은 창이나 철퇴라고 해도 무장을 갖춰야 한다"고 발언하였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홈가드 대원에게도 제대로 된 장비를 지급하라는 비유적인 표현이었지만 순진한(?) 영국 육군 병기장교들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도 파이프에 총검 재고들을 용접해서 창을 만들어댔다.[5] 당연히 이는 홈가드 내외를 가리지 않고 불만이 터져 나왔다. 게다가 당시 전쟁부 장관(후일의 국방부 장관)인 크로프트가 "창은 매우 효과적인 무기"라며 굳이 옹호하려다가 홈가드에게 야유만 받았고 결국 회수한 사례도 있었다. 이 때 영국 언론에선 "이제 우리 육군도 궁병이나 창병 같은 특기를 부활시키는걸 고려해야 한다.당연하지! 아예 야전교범도 13세기 것으로 고치는게 어떨까?"라며 풍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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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소집 후 시간이 좀 지난 뒤엔 인원들에게 육군 전투복과 장구류를 지급해 줄 수 있었지만, 처음 창설됐을 땐 정말 국민돌격대처럼 사복 정장에 총이나 냉병기(!)만 들거나 그마저도 없이 근무했다.

4. 국민돌격대와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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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열악한 상황 때문에 나치 독일 말기에 존재한 막장 조직 '국민돌격대의 영국판'이라는 말을 꺼내는 경우도 있는데, 아무리 상황이 다급했다곤 해도 당시 영국은 나치만큼 미쳐 돌아가지는 않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였으므로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당장에 국민돌격대와 비교하였을때 비록, 제1차 세계 대전 때나 사용하던 구식일지 몰라도 정상적인(?) 무기들과 육군 전투복[6][7] 이 그대로 지급 되었고, 무엇보다도, 사실상 강제 징집당한 국민돌격대와는 달리 홈가드 대원의 대다수는 고향을 지키겠다며 자발적으로 참여한 자원자들이었다는 점에서 둘은 비교가 불가능하다. 자원이었기 때문에 일단 사기가 매우 높았다. 오히려 열의가 너무 넘쳐서 현역 군인들이 홈가드에 대해 불편하게 여길 정도였다. 웃지 못할 블랙 유머풍자로 유명한 영국인들답게, 홈가드는 당시에나 지금이나 유머로 승화(?)되곤 했다. 으슥한 곳에서 젊은 남녀가 알콩달콩 밀회를 가지는데 느닷없이 무장한 영감님들이 우르르 몰려와 "너네 독일군 스파이 아냐?" 하면서 신분증 제시를 요구한다던가.

또한 영국군 당국도 홈가드는 어디까지나 지역 사회의 방위 및 사전 경보, 작전시 현역 부대의 보조 역할 등 민방위와 유사한 임무에 동원하는 것으로 한정시켰고, 홈가드에게도 어떻게든 정규 육군과 같은 수준의 무장을 지급하려 노력했다.

5. 지나친 열의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한창 때(?)의 홈가드의 사기는 지나칠 정도로 높아서 여러가지 문제점을 일으켰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오인 사격. 홈가드의 주 임무 중 하나가 주요 도로를 경비하는 것인데 홈가드 대원들은 일반 민간인은 물론이고 영국 경찰이나 현역 군인까지 '독일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일일이 검문을 했다. 문제는 안개가 끼거나 야간에 이런 검문소를 미처 보지 못한 현역 영국군 장병이 홈가드 대원의 오인 사격을 받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고 한다. 또한 낙하산으로 강하하는 독일 공군 공수부대에 대한 경계도가 너무 높다 보니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항공기에서 낙하산으로 탈출하던 승무원들을 발견하면 일단 잡아 패고 보는 경우가 많았다. 차라리 상대가 루프트바페 소속이라면 그나마 독일군이긴 하니까 다행이지만, 아군인 영국 공군 조종사들도 이런 꼴을 당할 때가 종종 있었다. 특히 영어가 서투른, 영국으로 망명한 폴란드나 체코, 프랑스 같은 외국계 의용 조종사들이나 억양이 이질적인 미국 출신 조종사들이 이 새끼 발음이 이상하다며 독일군으로 오해를 받고 몰매를 맞는 일도 빈번했단다. 게다가 벨기에처럼 독일 편은 아님에도 독일어권인 국가 출신이었다면 억양마저 완전히 독일어였을 테니 더 욕을 봤을 수도 있다.

이런 열의 때문에 큰 사고를 치기도 했는데, 그것도 하필이면 영국 본토 항공전이 절정에 이르른 런던 폭격 직전의 시기였다. 독일 공군이 런던 폭격을 준비하자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안 영국군은 1940년 9월 7일 밤 영국 본토 방위작전인 '크롬웰'의 1단계를 발령했다. 이 1단계는 '수 시간 내에 독일군의 침공이 예상되므로 경계 태세를 최고로 강화할 것'이었다. 그런데 홈가드는 이 세부 단계에 대한 지침을 받지 못하였고, 이 발령을 '지금 독일군이 본토를 침공한다'로 받아들여 버렸다. 이 때문에 도로나 교량 등 주요 시설물을 홈가드 대원들이 폭파시켜 버리는가 하면, 경보를 알린다며 마을의 들을 일제히 울리고 밤에 돌아다니던 가축들을 독일군으로 오해하고 죽여 버리는 사고가 여럿 발생했다. 게다가 이런 홈가드의 오인 행동 및 보고에 현역 부대들도 덩달아 독일군이 침공해 왔다고 오해해 작전을 개시하는 등 7~8일 밤동안 대혼란이 벌어졌다. 이 혼란은 8일에 영국군 당국이 간신히 수습할 수 있었다.

6. 활약

홈가드 대원들은 실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으면서도 지나친 열의로 인해 민폐만 끼쳤다는 오해가 있으나, 이들도 영국 본토를 지키는데 공헌하였다. 주된 전과는 방공포병 부대에서 기록되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부터 전투에 참가하였고, 1944년 6월부터 V1 포격이 벌어질 때 해안가에서 대공포 진지 1,500개소를 운용하여 상당수의 V1 미사일을 격추한 바 있다. 런던으로 향한 V1 미사일 중 약 60% 이상은 홈가드 대원과 공군의 합동 작전으로 격추된 것으로 알려져있다.[8] V1 미사일의 위험성이 꽤나 크단걸 생각한다면 홈가드는 제 할 일을 다 한 셈.

공습과 V1 미사일 포격으로 인해 전사한 홈가드 대원의 수는 총 1,206명으로 집계되었다. 이는 V1으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 수의 5%에 달하는 수치이다.[9]

또한 위에서 언급했다 싶이 너무 열정적으로 검문 검색을 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반대로 본토 항공전 당시 추락한 자국군 파일럿들을 자가용이나 이동수단으로 빠르게 복귀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추락한 독일군 파일럿들을 빠르게 체포해서 군에게 인수인계 하는 등 흔히 '열의에 비해 한게 없다' 와는 다르게 영국을 지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한편 영국령이었던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 반도 등 아시아 식민지에도 영국인과 중국인들로 구성된 홈가드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남방작전을 벌이자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분전했으며, 홍콩에서 보여준 전투는 홈가드 영감님들의 진면목과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결정체를 보여주고 있다.

7. 위기 이후의 홈가드

영국 본토 항공전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고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독일군의 영국 본토에 대한 침공 가능성이 낮아지자 영국 내에서는 홈가드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선술했듯이 이들의 열의가 쓸데없이 넘친 탓에, 막상 해산하려 해도 "우릴 쓸모없는 늙다리 취급하는겨?"라면서 반발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홈가드 대원들은 지역 사회의 유지들인만큼 발언권이 상당했고, 따라서 여론을 통해 정부를 압박할 힘이 있었다. 마을 어르신들이 고향 지키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시는데 감히 누가 말리랴?이 때문에 홈가드는 포로 감시나 도로 경비, 방공 부대 등 2선급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포로의 경우 홈가드와 꽤 특이한 인연이 있다. 영국군에서는 추축군 포로들 중 일부는 농촌에서 거주하며 농사일[10]을 하도록 하고 홈가드 대원들이 함께 기거하며 감시하도록 했다. 쉽게 말해서 영감님들 집에서 하숙먹고 자게 했다는 이야기다. 홈가드의 특성상 포로들과는 나이 차이가 거의 아버지와 아들 뻘이었고, 함께 지내다 보니 적대감도 많이 약해져 사이가 돈독해진 사례가 많았다. 포로들도 농장에서 도망처봤자 어디인지도 모르는 적지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섬나라인 영국에서 탈출하려면 거친 도버해협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 순응했다고 한다. 이들 포로 중에는 홈가드 대원의 딸이나 손녀, 기타 마을 처녀들과 눈이 맞아 결혼해 전후에도 영국에 정착했다는 드라마같은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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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홈가드는 자체적으로 기계화 장비를 운용하기도 했는데 물론 대부분은 일반 차량이었다. 홈가드가 차량을 운용할 때는 개인 소유의 차량, 즉 자가용[11]을 타고 작전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 홈가드는 상용 트럭에 철판도 아닌 콘크리트(...)를 붙인 '바이슨'이란 장갑 트럭을 몰고 다녔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일반 자동차에 홈가드 대원들이 직접 철판을 붙여서 사제 장갑차를 만든 예도 있다. 극소수 홈가드는 유니버설 캐리어 등의 실제 장갑차를 어찌어찌 구하기도 했으나 제대로 운용되지는 않았다. "노인네들이 장갑차를 제대로 몰 수나 있겠나? 귀한 연료나 낭비하는 짓이다"라는 합리적인 지적 때문.

영국군이 여유를 찾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홈가드의 무장 수준은 그 필요성과 반대로 점점 좋아졌다. 그러나 예전보다 나아졌다지만 정규군에서도 항상 조마조마한 재고를 유지하는 장비들을 홈가드 영감들에게 무작정 줄 순 없었다. 따라서 홈가드 대원들에게 기본적인 소총을 지급하는 정도이거나, 위와 같이 2~3명만 있으면 될 만한 기관총이나 박격포 등에 2~3배의 인원을 붙여 놓고는[12] 소총이나 기관단총 대신 권총 정도만 주거나 아예 주지 않고는 이 장비를 운용하는 어마어마한 사명감을 심어 주는 방식(...)으로 무마시키곤 했다.

이후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영국 본토에 대한 위험성이 사실상 사라진 뒤엔 일반 시민들도 홈가드의 필요성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고, 결국 1944년 말에는 거의 대부분의 대원들이 집으로 돌아가 사실상 해체 상태로 되었다. 이후엔 서류상의 편제로만 남아 있다가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12월 31일에 공식적으로 완전 해체되었다.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다시 홈가드를 결성하는 것이 어떤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흐지부지되었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미소간 긴장이 커졌던 1952년에는 소련이 2만명에 달하는 공수부대로 본토를 침공할 것이라는 우려가 번지자 다시 소집되었지만, 비용 문제로 인해 일반 예비역으로 재편성된 후 1957년에 해체되었다.

8. 공산 유격대?

실제 홈 가드에 복무했던 조지 오웰 등 일부 사회주의 지식인들은 이들을 '파시즘과 투쟁하는 공산 빨치산'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실제로 홈가드를 공산 빨치산으로 육성하기 위해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홈가드 내에서도 '이게 뭐지?' 취급을 받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홈가드의 구성원 대다수는 40-50대의 중장년층 및 일부 60대 노년층이었며, 이들이 청년기를 보내고 있던 시기에 벌어진 제1차 세계 대전의 지옥과도 같은 환경에서 동맹국 군대와 수 개월 내지 4년 동안 싸운 기억이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홈가드 대원의 상당수는 지역 유지와 같은 기득권층이었고, 따라서 홈가드와, 고향 지역, 국가가 적화된다면 제일 먼저 제거 대상으로 지목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홈가드는 2차 대전 당시의 영국 국내에서 가장 보수적인 성향을 가졌던 집단이었다. 아무리 고향을 지키기 위해 파시즘과 대항한다지만 이들 보고 '공산 빨치산'이 되라는 것은 매우 황당한 발상이었다. 또한, 영국 정부와 군 수뇌부는 공공의 적인 나치 독일을 치기 위해서 소련과 잠시 동맹을 맺었을 뿐, 소련의 국가 이념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이 탄생한 19세기 당시부터 강경한 반공 성향을 유지했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을 불온하게 여겄다.[13] 따라서 국가 수호를 명분으로 입대한 사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권력 기반인 군대를 적화하려 시도하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결국 이런 움직임은 홈가드 내부의 반발과 영국군 당국의 꼼수[14] 등으로 인해 유야무야 사라졌다. 그나마 이들 사회주의 지식인들에 대한 공식적인 탄압은 없었는데, 아무리 반공 기조라지만 일단은 합법적으로 사회주의 활동을 행하는 인사들을 처벌할 수는 없었다.[15] 그래서 앞서 말한 꼼수 정도로 유야무야 시킨 것.

9. 기타

같은 영연방의 국가들도 비슷한 성격의 조직이 존재하였는데, 오스트레일리아의 V.D.C.(Volunteer Defence Corps)와 캐나다의 Canadian Rangers가 있는데, 캐나다의 경우는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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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기간은 물론 그 후에도 홈가드는 유머의 소재가 되곤 하였는데, 이를 소재로 제작된 BBC방송의 시트콤 《Dad's Army》가 있다.
나이 들어서 힘은 떨어지고 생각은 꽉 막혔는데 열의는 쓸데없이 넘쳐나는 영감님들과, 특이 혈액형으로 병역을 면제받는 대신 홈가드에 입대한 젊은이 파이크, 역시 징집 연령대이지만 방산업 종사자로 대체복무자인 워커로 구성된 홈가드 부대원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비꼬는 내용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홈가드에 대한 기본적인 경의를 바탕에 깔고 진행하며,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대한 애정을 느낄수 있다. 그리고 작가가 실제 홈가드 출신이다. 영국의 모든 홈가드에게 경의를 표하며 마무리하는 마지막 회의 제일 마지막 장면은 꽤 감동적이다. 실제로 60년대만 해도 아직 전쟁의 상흔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시기라, 홈가드를 소재로 유머를 만들어도 되는지에 대해서 다소 논란이 있었다. 1968년부터 1977년까지 방영했으며, 상당히 인기를 끈 작품이어서 영국의 시청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Englishness를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도 있다. 워낙 국민적으로 인기가 많아서 당시 배우들의 명대사가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이름값답게 BBC에서는 방송 송출이 중단될 경우 대체용으로 이 작품을 예비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종종 틀어준다.

재미있는 점은, 이 시트콤에서 나이도 많고 무기력하게 묘사되는 홈가드 대원 영감님(위 사진에서 메딕 키트 가지고 있는 할아버지)을 연기한 실제 배우(아놀드 리들리)는 실제로는 1, 2차 대전 모두 참전해서 무수한 실전을 치렀던 역전의 용사였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위 사진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다음과 같다.

사진에 나오지 않는 조연급 등장인물들

1971년에 시리즈 초기 에피소드를 묶어서 만든 영화판이 나왔고, KBS에서 적어도 2회[22] 명화극장으로 더빙 방영했다. 더빙시 제목은 "노인부대". 영화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이쪽으로.

2015년에 리메이크 극장판이 만들어졌는데 - 빌 나이, 마이클 갬본, 마크 게티스, 토비 존스, 캐서린 제타존스 등이 출연했다. 감독은 올리브 파커. 2016년에 개봉했으나 한국에서는 극장 개봉되지는 못하고 <아빠 부대>라는 제목으로 블루레이가 출시되었다.예고편

9.1. 홈가드 출신 인물



[1] 영단어 'home'에는 집, 주택이란 뜻 뿐만 아니라 가정, 고향, 고국이란 뜻도 있다.[2] 당연히 소집 대상 연령이 올라가는 예비역 장교 등은 제외됐으나, 보통 이들 나이많은 예비역 육군 하급 장교들(영관급 이상 고급 장교들은 나이가 좀 돼도 상대적으로 현역 부대에서 맡을 TO가 많다.) 상당수가 홈가드의 지휘를 맡으러 고향으로 돌아왔다.[3] 이름은 76번 특수 소이탄(No. 76 Special Incendiary Grenade). 안정성 문제로 워낙 크고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어서 던져도 안 깨지는 경우가 빈발했다고 한다. 전후 쓸모가 없어진 화염병들 중 일부는 지하에 묻히거나 어느 홈가드 영감님 창고 안에 처박혀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잊혀지는 바람에(...) 간혹 폭발사고를 일으키곤 했다나.[4] 포탄 또한 의심스러운 물건이거나 앞서 언급한 화염병(...)이었다. 이 화염병은 던질 땐 안 깨지는 주제에 포에 넣고 쏠 땐 간혹 터지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5] 참고로 미국 내전기, 남군의 리 장군이 장창Pike생산에 동의했지만, 군수장교가 이를 쳐내버린 것과 대조된다...[6] 이들의 숫자도 매우 많았던데다, 본토에서 큰 전투가 벌어진 일도 없었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제2차 세계 대전 영국 육군 전투복들 중 상태 좋은 물건 대다수가 "HOME GUARD" 패치가 붙은 것들이다.[7] 여기서 "전투복 주는게 그렇게 대수냐?" 라고 생각 할 수 있는데, 만약 민간복장 혹은 군인임을 알 수 없는 복장(이 기준이 애매하긴 하지만 최소한 완장이나 머리띠에 군 소속 이라는 문구가 있어 구별이 가능한 수준이면 용인해준다.)을 하고 전투에 참여(즉 무기를 들고 싸웠다면)했다면 이 사람들은 제네바 협약과 헤이그 협약에 따른 포로대우 및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8] C. N. Trueman "Home Guard", historylearningsite.co.uk. The History Learning Site, 20 Apr 2015, accessed at 10 Aug 2018.[9] Longmate, Norman The Real Dad's Army. The story of the Home Guard. Stroud, England: Amberley Publishing, 2010. 28-30[10] 제네바 협약에 따른 포로대우 중 포로가 된 병사들은 노역을 시킬 수 있지만, 비군사적 노역부분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실제로 아프리카군단이 패한 후 대서양을 건너 미국과 캐나다로 간 독일 포로들 중 상당수가 담배나 목화농장 등에서 일했으며, 전후 상당수가 미국에 정착하였다.[11] 농업용이나 동네 가게에서 짐 나를 때 쓰던 트럭이면 다행이고 일반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대원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연료는 홈가드 운용 명목으로 정부에서 지급해 주었다. 이를 악용해서 안 그래도 배급제로 귀한 연료를 빼돌려 써먹는 자영업자도 물론(?) 있었다고.[12] 물론 장년이나 노인이 포함된 특성과 예비 사수나 무기/탄약 운반용으로 과잉 할당했을 수도 있지만 현역과 엇비슷한 체력이라면 상당한 인력 낭비다.[13] 애초에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영국은 제정 러시아가 자국의 국력을 바탕으로 한 대양 진출을 막기 위해서 계속 경쟁하던 사이었다.[14] 사회주의자 인사들에 대해 이런 저런 핑계로 홈가드 활동에 부적합하다며 홈가드 편입을 막는 등을 행했다.[15] 실제로 2차 대전 도중에 조지 오웰이 스탈린주의로 변질된 소련의 체제와 행태를 비판하려고 쓴 소설 동물농장이 동맹국 소련의 심기에 거슬린다는 이유를 내세운 영국 당국에 의해 출간이 막혔다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지 이틀이 지난 1945년 8월 17일에야 비로소 출간되었다. 이외에도 2차대전 당시 상당수의 지식인 계층과 일부 정치인들은 친소적인 성향이 있었다.[16] 실제로 1차대전 당시 영국의 상류층 청년들은 자진입대하는 경우가 하위 계층 청년들보다 더 많았다.(우선적으로 하위 계층일수록 산업시설에 종사할 확률이 높았기에 군면제가 많았고 자신들이 가족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대부분이 징병으로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영국의 경우, 1차 대전이 막 터진 1914년 당시에는 숫적으로는 얼마 되지 않는 기존의 상비군과 자원자들만으로 유럽 원정군을 꾸려서 프랑스를 비롯한 각지로 파병했다가 1916년이 되어야 본격적인 징병제를 통해 대규모의 병력을 꾸렸던 만큼 그런 경향이 다른 열강들에 비해 강했다. 반대로 상류층의 경우 유럽의 봉건제로 인해 누구보다 앞정서서 군대에 가야한다는 인식이 있었으며,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100년 동안 이어진 팍스 브리타니카와 유럽 열강의 최전성기인 벨 에포크 시대를 직접적으로 거친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인물들이라 참전을 명예롭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한, 당시 강했던 민족주의 열풍 또한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상류층의 자원입대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군대에도 신분제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었던 당시 사회의 특성 상 장교로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돌격 시에 제일 먼저 뛰쳐나가야만 하는 위관급 장교들의 특성과 1차대전 당시의 가혹한 환경이 겹치는 바람에 이들의 전사율은 매우 높았다. 따라서 윌슨 본인이 전쟁 초기부터 참여하여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음과 동시에 꾸준히 전공을 세워 계속 진급하다가 전쟁 말기에 소령 이상으로 진급한 이후 퇴역했하는 시나리오가 아예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17] 키치너의 수단 원정은 무려 1898년에 벌어진 일이다. 키치너와 수단 원정 전후에 대한 이야기는 파쇼다 사건 참조.[18] 극중 홈가드 부대의 작전차량이 바로 이 영감님의 정육점 트럭.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이 트럭도 항상 수난을 당하지만 한번은 현역 군인들이 운전하는 신식 군용 트럭과 경주를 벌여 이긴적도 있었다.[19] 그런데 사실은 배우가 워낙 고령인데다가 건강도 좋지 않아서 험한 연기를 시킬수 없기 때문에 제작진이 머리를 짜내서 만든 대사다. 캐릭터 상의 묘사와는 정 반대로 실제 배우 - 아놀드 리들리는 1차 세계대전솜 전투에서 독일군과 백병전을 벌이다가 부상까지 입었고, 이 때문에 한 손을 거의 쓰지 못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러다 보니 촬영 시점에서 진짜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았다. 리들리는 1896년생인데 1984년 백세에 가까운 나이로 사망했다. 리들리라는 성에서 눈치챘겠지만 배우 데이지 리들리의 증조부가 된다.[20] 처음에는 매너링 대위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인 고드프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그에 대한 사정을 안 뒤로는 나름 존중해준다.[21] 다만 독일군이 아예 안나오는건 아니고 격추돼서 낙하산으로 탈출한 조종사라던가, 해안가로 표류한 유보트 승무원 등이 등장하는데 홈가드의 임무상 이들을 체포하는 에피소드가 여럿 있다.[22] 한 번은 1991년 6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