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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09:21:59

알베르트 괴링

<colbgcolor=#000><colcolor=#fff> 알베르트 괴링
Albert Göring
파일:external/static.guim.co.uk/albert-goering-001.jpg
본명 알베르트 귄터 괴링
Albert Günther Göring
출생 1895년 3월 9일
독일국 프로이센 주 베를린
사망 1966년 12월 20일 (향년 71세)
독일연방공화국 바이에른 주 뮌헨
국적
[[독일 제국|]][[틀:국기|]][[틀:국기|]] (1895~1918)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바이마르 공화국 (1918~33)
[[나치 독일|
나치 독일
나치 독일
]][[틀:국기|
행정구
나치 독일
]][[틀:국기|
속령
나치 독일
]] (1933~45)
[[독일|
독일
독일연방공화국
]][[틀:국기|
행정구
독일연방공화국
]][[틀:국기|
속령
독일연방공화국
]] (1945~66)
직업 사업가, 기술자
학력 뮌헨 공과대학교
가족 아버지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 (1838~1913)
헤르만 괴링 (1893~1946)
자녀 페터 괴링 (1922~1941)[1]
엘리자베트 괴링[2]

1. 개요2. 생애
2.1.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업적
3. 전후 생활4. 유대인 사생아 설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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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사업가이자 기술자이다. 나치 독일의 2인자 헤르만 괴링의 동생이었다. 형과 동생의 체형이 다른 건 형 헤르만이 중간에 약물중독에 빠져살았기 때문이다. 형이 약물로 인해 뚱땡이가 되고 동생은 탈모로 대머리이긴 하지만 실제로 두 형제 모두 미남형의 얼굴이다. 실제로 헤르만의 청년기 때에 찍힌 사진을 보면 중년 때의 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진중한 신사의 느낌이 날 정도다.

2. 생애

알베르트 괴링은 베를린 교외에 1895년 3월 9일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식민지 초대 총독이었던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이다.[3]

형 헤르만과 달리 알베르트 본인은 나치 집권기 이전까지 평범한 삶을 살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공군에 입대하여 에이스 파일럿으로 이름을 날린 형과 달리 서부전선의 참호전에서 육군으로 복무했다. 뮌헨 공과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으며, 나치 집권기 이전까지는 영화계에 종사했다.

사생활은 다소 복잡했던 듯 한데, 4번 결혼하고 3번 이혼했다. 형이 천인공노할 중범죄자인 것과는 별개로 가정적인 남자여서 결혼 이후 다른 여자들한테는 일체 눈길 한 번 안 준 순애보단 하나뿐인 딸한테도 사랑이 몹시 깊었던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2.1.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업적

이렇게 평범한 삶을 살던 알베르트는 나치가 집권하면서 나치의 반()유대정책과 폭력성을 경멸하고 혐오하게 된다.

이런 알베르트의 나치에 대한 태도는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잘 나타나는데, 1962년 오스트리아 시나리오 작가 에른스트 노히바흐가 한 주간지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나치 독일 당시 의 한 상점에서 그의 노모가 수모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독일군 병사가 75세가 된 그의 노모에게 '더러운 유대인'이라는 팻말을 건 채로 상점의 진열대에 앉아 있게 한 것이다. 그때 알베르트가 괴링의 성이 기입된 자신의 신분증을 보여주어 그의 노모를 구해주었다.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장성이자 합스부르크 가문 황족이었던 요제프 페르디난트 폰 외스터라이히토스카나 대공도 알베르트가 보여준 선행의 수혜자였다. 알베르트는 나치에 반대하다 다하우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페르디난트 대공을 구하기 위해 형 헤르만 괴링에게 직접 그를 풀어달라고 직언했고, 헤르만은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가 일했던 회사의 전 사장이었던 유대인 오스카 필처가 체포되기 전에 빼돌렸고 반(反)나치 인사들의 탈출을 위해 형의 사인을 위조하여 통행증을 만들었고 발각되어 체포되었을 때는 형의 배경을 이용하여 풀려났다.

이렇듯 나치의 유대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곧 독일을 떠나 오스트리아로 향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반 나치·반 히틀러를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위기에 빠진다. 하지만 그의 형은 다름아닌 나치 독일의 제2인자이자 게슈타포의 창립자였던 만큼 게슈타포도 그에게는 손을 쓰지 못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스코다 사에서 수출감독을 맡게 되었는데 여기서도 그는 유대인 노동자의 사보타주를 독려하는가 하면 체코레지스탕스와 몰래 접촉하여 그들을 지원하였다. 의외로 형 헤르만은 측근들의 보고로 알베르트의 반나치 지하운동을 알고 있음에도 묵인했으며, 알베르트도 형이 자신의 행동을 눈감아 준다는 걸 알고 있었고 여차하면 도움을 청했는데 헤르만은 이걸 도와주었다.[4]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수용소에서 유대인과 소련군 포로들을 데려와서는 중립국스위스모나코에 풀어주기까지 하였다.[5]

3. 전후 생활

전후 알베르트는 연합국과 체코 정부에 의해 두 번의 재판을 받게 되지만, 그가 구해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으로 그는 무사히 풀려났다. 그리고 알베르트는 형이 자신의 반 나치 활동을 도와준 것을 증좌(證左)[6]로 구명 활동을 했다. 하지만 형의 죄질이 너무나도 나빴기 때문에[7] 구명은 실패했다. 그 후 형이 자살하기 직전에 면회를 한번 올 수 있었는데, 가족들을 잘 부탁한다[8] 말을 듣고 나서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하지만 괴링이라는 성씨는 전후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그 때문에 알베르트는 어려운 삶을 살게 된다. 독일 정부가 지급하는 연금으로 생활을 하던 그는 작가, 번역가로 일했다. 알베르트는 생전에 결혼을 할 경우, 자신이 사망하게 되면 자신의 연금이 아내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가정부를 한 명 두고 있었는데, 자신의 사후에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그 동안의 감사의 표시로 1966년에 자신의 가정부와 결혼한다. 일주일 후, 그는 자신의 전시 활동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향년 71세.

4. 유대인 사생아 설

알베르트 괴링의 친부는 헤르만 괴링대부이자 어머니의 애인이었던 헤르만 에펜슈타인 백작이라는 의혹이 있는데 이는 전문 역사학자도 아닌 영국 정보부 출신이자 영화계 관계자였던 Roger Manvell 등의 영국측 프로파간다에 근거한 허구이다. 정작 알베르트 괴링을 임신했을 시기에 그의 모친은 남편의 임지였던 아이티에 있었으므로 그럴 가능성은 없다. 참고로 에펜슈타인 백작은 유대계여서 만약 그가 알베르트의 친부였다면 알베르트는 동족을 구한 셈이 되기에 이런 근거없는 주장이 일부의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5. 관련 문서



[1] 공군에 입대하여 아돌프 갈란트의 윙맨으로 도버 해협에서 첫 출격을 했으나 첫 전과를 올리고 바로 전사.[2] 전후 페루로 이주해서 살았다.[3] 여담으로 나미비아에는 '괴링로(路)'라는 길이 존재한다. <총, 균, 쇠>에서 서술된 에피소드인데 저자는 이걸 보고 그야말로 기겁을 했다고 한다.[4] 2010년에 헤르만의 딸인 에다가 작은아버지에 대해 말하길, "숙부는 자신의 힘으로 누군가를 도와줄수 있으면 반드시 도와줬지만, 더 큰힘이 필요한 순간엔 바로 형에게 도움을 청했고, 아버지는 숙부를 도와주었다."[5] 알베르트는 수용소에 노동자를 요청한뒤, 트럭에 수용자들을 태운뒤 아무도 없는곳에 정차한뒤 탈출하게 해주었다.[6] 참고가 될만한 증거.[7] 정확히는 전쟁을 일으키고 교사한 죄와 슈츠슈타펠, 다하우 강제수용소 건설에 관여한 죄, 나치라는 막장 집단의 수장이었다는 상징성 등 스케일이 너무나도 컸다. 심지어 그냥 중심도 아니고 나치의 2인자가 그의 직위였으니 뉘른베르크 재판 피고 중 최고위층으로서 사형은 100% 확정이었다. 결국 군인다운 명예로운 총살형이 아닌 치욕스러운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47년에는 유대인을 절멸하는 것으로 방향성을 결정한 반제 회의의 의장이었다는 증거까지 발견되었다.[8] 여자를 수시로 갈아치우다시피 했던 괴벨스와는 달리 헤르만은 가족들에게만큼은 충실했었다. 다만 괴벨스는 제국의 다산 정책에 충실해 애는 많이 얻었고, 나중에 가서는 부인과 관계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그리고 부인 마그다 괴벨스가 열렬한 나치, 총통 추종자로 아돌프 히틀러에게 호감을 사고 있었고 이는 괴벨스의 위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만일 허튼 짓이라도 했다가는 바로 히틀러의 신경질적인 불호령이 떨어지므로 여자를 갈아치우고 어쩌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