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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14:24:10

조르조 페를라스카

<colbgcolor=#000><colcolor=#fff> 조르조 페를라스카
Giorgio Perlasca
파일:Giorgio_Perlasca2.jpg
출생 1910년 1월 13일
이탈리아 왕국 롬바르디아주 코모도 코모
사망 1992년 8월 15일 (향년 82세)
이탈리아 베네토주 파도바
직업 상인
종교 가톨릭
명예칭호 열방의 의인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유대인 탈출 작전2.3. 전쟁 이후
3.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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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가축 상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헝가리에서 홀로코스트로 죽을 뻔했던 유대인들을 구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초기

1910년 이탈리아 왕국에서 태어났으며, 젊었을 땐 베니토 무솔리니를 지지하며 자발로 검은 셔츠단에 입단, 파시스트편에 서서 열심히 싸웠다. 특히 스페인 내전 때 무공을 세워, 프란시스코 프랑코로부터 "귀하는 비록 이탈리아인이지만, 언제든지 스페인 공관에 와서 도와달라고 하면 발벗고 도와주겠다"는 허가증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왕정이었던 이탈리아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기치를 내걸었던 파시즘을 지지했기에, 1938년 이탈리아가 나치 독일을 위해 유대인 차별 관련 법안을 제정한 것을 계기로 파시즘에 대한 환멸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정부가 그를 포병 교육대 장교로 징발한 이후 그는 외국을 도는 상인이 되었고, 사업차 헝가리 왕국으로 파견되었다.

그가 헝가리 왕국에 있던 중인 1943년에 이탈리아연합국에 항복한다. 이에 나치측에서 이탈리아인이었던 페를라스카를 잡아 가두었으나, 탈출 기회를 잡아 스페인 대사관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2.2. 유대인 탈출 작전

조르조 페를라스카는 예전에 프랑코가 준 허가증으로 호르헤 페를라스카가 되었고, 스페인 대사관의 대리대사였던 앙헬 산스브리스는 조르조에게 유태인을 중립국으로 빼돌리자고 제안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조르조는, 이 일을 하기 위해 산스브리스로부터 스페인 대사관 직원 신분증을 받고, 유대인을 구하는 일을 맡게 된다.

그가 맡은 임무는 스페인 대사관이 제공한 보호문서를 가진 유대인들이 험한 일 당하기 전에 보호 가옥을 만들거나, 중립국으로 유대인을 호송하는 일이었다. 1924년에 스페인 정부는 과거 스페인에서 추방된 세파르딤계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주었다가 1930년에 폐지했는데, 이를 이용해 부다페스트의 유대인들에 대해 스페인 시민이라고 뻥을 쳤던 것.

1944년에 소련부다페스트 근처에 진주하자, 프랑코는 자기네 외교관이 소련에 넘어가는 걸 싫어하여 스위스로 다 빼버렸다. 대리대사였던 산스브리스는 조르조에게 같이 가자고 하였지만, 조르조 페를라스카는 계속 부다페스트에 남아있었다. 스페인 외교관들이 철수한 후 헝가리의 파시즘 정당인 화살십자당이 들이닥치자, 그는 "산스브리스는 곧 올 거고, 난 산스브리스가 임명한 대리인이다!"라고 뻥을 치고, 화살십자당 당수인 살러시 페렌츠에게 약 1천만 원의 뇌물을 건넸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죽음의 열차를 관리하던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 바로 앞에서 유대인을 빼돌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걸 본 라울 발렌베리가 저 사람이 아돌프 아이히만이라고 나중에 알려줬다.

또한 그는 SS화살십자당이 부다페스트 유대인 게토를 파괴하려던 것을 막기도 했다. 그는 게토 내 유대인들 중에 스페인 시민이 있다고 뻥을 쳤고, 만약 이들을 공격하면 스페인 정부 차원에서 보복이 있을 것이라고 헝가리 정부를 협박하여 게토 파괴를 막았다.

그리하여 1945년 1월 16일, 소련군부다페스트를 해방시킬 때까지 수천 명의 유대인들은 호르헤 페를라스카의 노력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리고 1949년 5월 29일, 페를라스카는 이탈리아로 가기로 하고, 부다페스트 동부의 기차역에서 지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이런 글을 받았다.
당신이 우리를 살려주고 노약자들을 보살펴주었던 그 친절함에 바칠 수 없을만한 찬사는 없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절망에 빠져있을 때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며, 우리는 영원히 당신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야훼께서 당신을 돌봐주시기를 바랍니다.

2.3. 전쟁 이후

전쟁이 끝난 후 조르조 페를라스카는 자신이 헝가리에 있었을 때 있었던 일에 대해 스페인 외교부 측에 보고했다. 그리고 진짜 대리대사였던 산스브리스에게도 자신이 한 일을 알렸으나 산스브리스는 그가 한 일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다시 생업에 복귀했다. 그는 가족들에게까지 이때의 일을 말하지 않았으며, 평범한 생활을 살았다. 그가 아예 말을 안 한 건 아니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극소수의 인물에게만 자신이 한 일을 말해주기는 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그의 업적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1987년 페를라스카에게서 도움을 받은 헝가리계 유대인들이 결국 그를 수소문하여 찾아낸 것을 계기로 페를라스카의 이야기는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에서는 그에게 세계의 의인이란 칭호를 주었으며, 이탈리아, 스페인, 헝가리, 이스라엘에선 그에게 훈장을 추서했다.

1992년에 향년 8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3. 매체에서

이탈리아에선 그를 기리는 《Perlasca, un Eroe Italiano》[1]란 영화가 2002년 개봉되기도 하였다.


[1] 번역하자면 '페를라스카, 이탈리아의 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