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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4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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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547.jpg
파일:2569.jpg
《마리안네 이모》
Tante Marianne, 1965
《하이데 씨》
Herr Heyde, 1965
독일의 현대미술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가족초상화 연작. 좌측 작품에 묘사된 작가의 이모 마리안네는[1] T4 작전으로 살해된 희생자이며,[2] 우측 작품의 남성 하이데는[3] 작가의 장인 하인리히 오이핑어와 함께 학살을 집행한 친위대 의사다.
1. 개요2. 실시 이전3. 실시 이후의 행보4. 전쟁 이후5. 나치당의 모순적인 모습6. 픽션에서7. 유사 사건8. 둘러보기

1. 개요

독일어: Aktion T4
영어: Action T4, T4 Program
T4 프로그램을 재연한 내용이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 영화 속의 대사는 영어로 나온다.
"우리의 시발점은 개인에 기반하지 않는다.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주는 것은 우리의 관심 밖이다. 우리의 목적은 그와는 색다른 것이다. 그것은 즉, 건강한 인간들로만 세계를 채운다는 것이다."
1938년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발언. 정작 괴벨스 본인은 어린 시절 앓은 소아마비로 평생 다리를 절며 살았다.
Eine nur sechshundertjährige Verhinderung der Zeugungsfähigkeit und Zeugungsmöglichkeit seitens körperlich Degenerierter und geistig Erkrankter würde die Menschheit nicht nur von einem unermeßlichen Unglück befreien, sondern zu einer Gesundung beitragen, die heute kaum faßbar erscheint. Wenn so die bewußte planmäßige Förderung der Fruchtbarkeit der gesündesten Träger des Volkstums verwirklicht wird, so wird das Ergebnis eine Rasse sein, die, zunächst wenigstens, die Keime unseres heutigen körperlichen und damit auch geistigen Verfalls wieder ausgeschieden haben wird.

단 600년 동안만이라도, 육체적으로 퇴화된 자정신적으로 병이 든 자의 생식 능력과 번식 가능성을 제거하는 일은 아무리 보아도 막대한 건강 회복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같이 민족 중의 가장 우월한 출산력이 의식적, 또 계획적으로 확산되도록 촉구한다면, 현재 우리가 가진 육체적, 정신적 퇴폐의 싹이 완전히 말소된 인종이 탄생할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에서

나치 독일우생학에 기반한 장애인 대량 학살 사건.

히틀러가 1939년 9월 한 극비 지령 문서에 서명하면서 시작되었다. T4 작전은 장애인과 정신질환자 등의 부적격자에 대한 집단 살인 허가 명령이었다. 나치 정권은 이러한 부적격자를 사회에서 제거함으로써 게르만 민족의 유전적 우수성을 지킬 수 있다는 인종위생학(독일 버전의 우생학)을 나치즘의 뼈대로 삼았으며 이러한 사람들을 쓸모도 없이 음식만 먹는 것들(Unnütze esser), 열등인간(Untermensch)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죽이는 것을 자비로운 안락사로 간주했다. 이들의 기준에 따르면 게르만족들은 모두 우월해야 하는데 그 중에서 '불량품'이 있다고 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병자나 기형아를 절멸시키는 것이야말로, 병적인 인간을 살려두어 꾸역꾸역 보호하려는 미친 짓에 비하면 몇 배나 자비로운 일이다."
아돌프 히틀러
이러한 나치의 우생학적 견해에 따라 자행된 안락사 프로그램은 후에 홀로코스트로의 진화를 암시했다. 역사학자 이언 커쇼는 이를 "현대적 야만으로 가는 필수 단계"라고 표현했다.

'T4'라는 이름은 사무국이 있던 베를린 미테구 티어가르텐 4번지(Tiergartenstraße 4)에서 유래했다.[4] 병원 4개가 집단 살해 장소로 쓰였으며 가장 큰 병원에는 사령부가 존재하기도 했다.

2. 실시 이전

1930년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안락사를 선호하는 선전 캠페인을 실행에 옮겼다. 국가사회주의인종정치사무소(NSRPA)가 독일인들에게 불치병과 정신병자를 위한 보호시설을 유지하는 비용을 다루는 팸플릿과 포스터, 극장에서 상영되는 단편영화를 제작했다. 자신들의 환자를 죽이는 데 반발하리라 예상된 가톨릭 단체들은 점차 폐쇄되었으며 요양 중이던 환자들은 북적대는 국립 기관으로 이송되었는데 그곳의 더러운 환경은 이후 안락사를 선호하던 캠페인에 기폭장치를 제공했고 "장애인 한 사람당 6만 라이히스마르크가 나가고 있다", "장애인 한 사람을 먹여살릴 돈으로 정상인 4인 가족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식의 선전 포스터들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1932년 독일에서는 단종법(斷種法)이 제정되어 이들 부적격자를 자율적으로 거세하도록 했다. 이듬해 나치 정권이 들어서자 이 법은 더욱 더 강화되어 1933년 7월 14일 유전적 질환의 자손 예방법으로 공표되었는데 이 법에 따라 유전적 질환을 가진 45세 미만의 여성은 의사들의 판결에 의해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게 되었으며 의사들의 판결에 불순응할 시 벌금형이 내려질 수 있었다. 법률 시행 첫 해에 약 4,000명의 사람이 불임화 인가 판결에 대해 항소했고 그 중 3,559명이 패소했다. 나치 정권 말까지 200여 개의 유전 건강 법원(Erbgesundheitsgerichten)이 만들어졌으며 이 법원에서의 판결에 의해 40만 명 이상이 강제로 불임 시술을 받았다.

1935년에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의사들 사이에서 명망 있던 게르하르트 바그너에게 부적격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에 대한 조언을 구했는데 그는 "그러한 문제는 전쟁 상황에서는 좀 더 쉽게 처리될 수 있다"고 답했다.[5] 이후 전쟁의 발발은 히틀러에게 그가 오랫동안 바랐던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3. 실시 이후의 행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ktion_brand.jpg
<colbgcolor=#fff,#1f2023>Reichsleiter Bouhler und Dr. med. Brandt

sind unter Verantwortung beauftragt, die Befugnisse namentlich zu bestimmender Ärzte so zu erweitern, dass nach menschlichem Ermessen unheilbar Kranken bei kritischster Beurteilung ihres Krankheitszustandes der Gnadentod gewährt werden kann.

A hitler
국가지도자[6] 필리프 보울러[7]와 의사 브란트에게

치료에 가망이 없을 만큼 병세가 무겁다고 판단되는 경우, 그 환자에게 병세에 관해 엄격한 감정을 실시한 뒤에 특별히 지명한 의사에게 자비로운 죽음의 처치를 허가할 권한을 부여한다

A 히틀러
- 아돌프 히틀러가 서명한 장애인 학살 승인 서류
1939년 10월 1일 히틀러는 장애인들에게 강제 안락사를 지시한 살해 명령서에 사인했다. 이전에 강제로 수용된 장애인들과 정신질환자들은 이 명령에 따라서 살해당했고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에게는 일제히 폐렴이나 뇌질환 등을 사인으로 적은 사망 소식 편지가 도달했다. 나치 독일에 의해 부적격자로 분류당한 이들에 대한 살인은 후에 홀로코스트의 절멸수용소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샤워실이라고 불린 가스실에서 이뤄졌다. 초반에는 아예 굶겨 죽이거나 약물 주사로 살해되었으나 굶겨 죽이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전쟁이 지속되면서 물자가 점점 귀해졌으니 독극물조차 점차 희귀해져 버려 결국 일산화탄소 등을 비롯한 가스가 쓰이게 되었으며 특히 히틀러 본인이 가스를 쓸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위 명렁서처럼 히틀러의 주치의 중 하나이자 위생학자인 카를 브란트였다. 히틀러의 장애인에 대한 견해를 가감없이 주워섬긴 브란트는 가스실과 병행해 실시한 약물주사처럼 효율적인 안락사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인간을 대상으로 하여 가스와 약물을 재료로 잔인한 생체실험을 진행했다. 멩겔레를 방불케 하는 잔인한 실험들은 인간말살 프로젝트라는 형태로 그 죄악이 전면에 대두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 역시 독일 자국민에 대한 나치의 전쟁범죄로 분류되었다. 또한, 전후시생체실험 혐의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회부된 23명의 의사에 대한 재판의 명칭이 'Karl Brandt et al.(카를 브란트 등)'이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는 이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이 프로그램이 실행된 지 2년이 지난 1941년 여름에는 노인들을 겨냥한 새로운 질의서가 각 가정으로 보내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나 조부모가 안락사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충격에 빠졌다.

그뿐만 아니라 너무 못생겼거나 장애를 가진 아이들[8]도 표적이 되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기도 했는데 이 경우 아이들의 부모들에게는 아이들이 특별 치료를 받으러 간다고 속이는 전단지가 배달되었고 아이들은 비밀리에 각종 인체실험에 이용되다가 목숨을 빼앗긴 후 부검되어 사라져 갔다. 게다가 이는 전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1939년 이후 더 심해져 청소년기에 다다른 아이들까지 끌려가게 되었으며 마비질환자, 뇌염, 간질, 조현병 환자들과 치매를 앓고 있던 노인들까지 대상이 되어 살해당했다.

1940년부터 개신교 목회자들이 T4에 대해 항의하기 시작했으나 나치는 이에 대해 공식적인 답변을 전혀 하지 않았다. 허나 이후 계속적으로 프리드리히 폰, 빌레펠트, 폴 게르하르트 등의 루터회 신학자들이 계속해서 항의를 시작했으며 주교 프란츠 본바워를 기점으로 8월 시위가 발생했다.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규모 전상자가 발생했고 장애를 입은 참전용사에게도 이러한 T4 프로그램이 실시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데 그 소문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1차대전 참전자와 2차대전 참전자(중증 부상으로 인한 장애인)들 중 소수에게 대한 안락사가 실시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T4 프로그램을 계획했던 이들도 제대 군인들이나 참전 노인들은 아예 대상에 넣지 않았으나 그 카를 브란트가 몰래 이들도 포함시켜 생체 실험에 사용했다. 물론 이러한 사항은 카를 게프하르트 같은 일부만 알았다. 독일 국민들의 추측과 소문이 사실이었던 셈이다. 애시당초 장애인들을 모두 죽이는 정책인데 고의였든 실수였든 전상자 출신 수용자가 많든 적든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정부 입장에선 참전용사나 산업 현장, 특히 군수 관련 분야 종사자가 근무 중 부상을 입으면 선전용으로 우대해 줘서 사기를 올리는 것이 이득이니 당연히 이들은 여건이 되는 한 챙겨 주려고 하며 독일도 그랬다. 브란트 등의 일탈 행위 및 행정 오류 등으로 몇몇 참전용사들이 희생된 것이 T4 프로그램에 참전용사들을 적극 활용했다는 식으로 와전됐다.

이에 군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으며 종교계와 시민들이 저항했다. 특히 종교계에서는 T4 입안 당시부터 격렬한 항의가 계속되었다. 클레멘스 폰 갈렌[9] 주교는 공개 강연을 통해 T4 프로그램을 비판하기까지 했는데 이 연설에 감명받은 순수한 학생들이 갈렌 주교의 설교를 전단으로 만들어 뮌헨 대학에 뿌리는 저항 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당했고 단심제로 치러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불과 몇 시간 뒤에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들이 조직한 단체가 바로 하얀 장미로, 이들의 활동을 기록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논픽션은 현재도 독일인들의 애독서 중 하나이다.

1941년 히틀러는 T4 프로그램의 중지를 명령했다. 정확한 이유는 불명확하지만[10] 이 조치 이후에도 은밀한 살인은 계속되어 이전의 7만보다 많은 9만여 명이[11] 중지 선언 이후에 희생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941년에 종료되었지만 가장 마지막 아이가 희생된 것은 독일이 항복하고도 3주가 지난 1945년 5월 29일이다.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의 외할아버지인 작센코부르크고타카를 에두아르트[12]도 T4 작전에 가담한 바 있으며 아스퍼거 증후군의 발견자로 알려진 한스 아스페르거도 T4 작전에 가담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사실 이 프로그램 시작 전부터 히틀러와 그의 수하들은 반대 여론이 높을 것을 짐작하고 있었고 이 덕분에 T4 프로그램에 관한 문서 기록이나 명령서 등을 사전에 작성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 때문에 최초 시행 시 히틀러가 보낸 서신 정도 외에 공식적인 명령이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마저도 히틀러도 권리라고 했지 의무라고 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기면 의사 탓으로 돌리고 본인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놨기 때문에 기록이나 명령만 뒤져 보면 처벌받을 사람은 정말 히틀러를 포함해서 하나도 없다. T4 프로그램 자체도 내용이 엄청난 것이라 당시 관료 중에도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렇게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쫓겨나고 말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로타어 크라이시크(Lothar Kreyssig) 판사였다. 허나 희생자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T4 프로그램의 존재 자체는 도저히 숨길래야 숨길 수 없었다. 가족을 요양원으로 보낸 사람들은 갖은 수를 써서 다시 찾아오려고 했고 여러 방면으로 저항했다. 특히 이런 운동은 교회에서 가장 활발했다. 결국 히틀러도 감당이 안 되었는지 1941년 폐지를 선언하였다.[13]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행됨과 동시에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인력들(의료인력, 관리, 경비원 등)은 절멸 프로그램에 투입되어 홀로코스트를 본격적으로 실행하게 되었다. 즉, 수용소에서 학살을 자행할 때 일을 할 수 없는 인력을 따로 분류해 죽였던 것이 이들의 끔찍한 작품이었다.

4. 전쟁 이후

이 사건의 중요 가담자인 카를 브란트 등은 전쟁범죄자로 분류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이 끔찍한 흑역사 때문에 독일에서는 안락사 문제에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견해가 매우 강해 논의 자체가 금기시되었다.[14] 나치 잔재 청산을 최우선시하는 독일에서 국민들을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한 채 안락사를 허용하는 것은 자칫 나치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0년에 대법원에서 환자의 동의 아래 안락사를 허용하였지만 완전히 논쟁이 일단락될지는 미지수다.
T4센터 기간 총 희생자 수
그라페네크 1940년 1월 ~ 1940년 12월 9,839
브란덴부르크 1940년 2월 ~ 1940년 10월 9,772
베른부르크 1940년 11월 ~ 1943년 7월 8,601
하르트하임 1940년 5월 ~ 1944년 12월 18,269
조넨슈타인 1940년 6월 ~ 1942년 9월 13,720
하다마르 1941년 1월 ~ 1942년 7월 10,072

공식적으로 발표된 T4 프로그램 희생자 수. 출처: Document 87, P. 232 cit. in Ernst Klee. Dokumente zur "Euthanasie", 1985.

독일뿐 아니라 주변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사실 20세기 초까지는 나치뿐 아니라 후에 나치와 적대하게 되는 주변국들에서도 우생학적 분위기가 만연했고 선천적 지적 / 정신장애인에 대한 거세도 당연하게 여겨졌다. 인류 사회 전체를 통틀어서 장애인의 인권을 생각하기 시작한 역사는 얼마 되지 않는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선천적 장애는 존재 자체가 죄악이고 천형으로 여겨져서 사회로부터 격리 [15] 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중성화수술, 낙태와 전두엽 절제술 등의 대상이었다. 그런 마당에 진화론이 소개되었고 이어 우생학, 사회진화론이 나오면서[16] "공동체가 더 높은 곳을 향해 진보하기 위해 열등한 개체는 솎아내야 한다"는 사상이 대두되었다. 2차대전 이후 우생학인권에 반하는 유사과학으로 판명되어 유럽 사회에서 퇴출되고 말았다. 다만 T4 작전 자체는 나치의 종말과 함께 사라졌지만 아직 어느 누구도, 어느 나라도 T4 작전을 계승해 부활시키지 못하고 있다 뿐[17]이지 나치 이전부터 존재했던 우생학의 잔재는 남아서 북유럽을 비롯한 유럽 각국과 미국, 일본[18], 그리고 이들 소위 선진국의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도 그 잔재는 길게는 수십 년 간 남았다.[19]

독일뿐 아니라 각국에서 자행되었던 ‘정신질환이나 정신지체인을 불임으로 만들어 자손을 남기지 않게 하는 행위가 과연 전반적인 지능향상이나 정신질환 유병률 감소에 도움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에는 논란이 있는데 대개 특별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본다. 특히 독일 같은 경우는 역시 전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나 영양실조가 큰 원인이겠지만 조현병이나 지적장애의 발생율이 오히려 나치 집권 전보다 엄청 늘어나 버렸다.

호주의 철학 교수 피터 싱어도 이 사건의 여파로 인해 독일 입국이 거부되었다. 그는 공리주의에 기반한 윤리학의 석학인데 그의 주장은 한마디로 '고통의 최소화가 윤리다'로 정리될 수 있다. 따라서 고통을 느끼는 임산부가 원하지 않는 임신을 중단하고 싶을 경우 고통을 느끼지 못 하는 초기 태아의 낙태는 문제가 되지 않고 심각한 고통이 확실한 병을 가지고 태어날 태아의 낙태나 환자의 안락사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물론 싱어의 주장 자체는 나치와는 거리가 있으며, 낙태나 환자의 안락사를 실제로 시행하기 전에 매우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독일은 이와 관련되어 역사적으로 너무나 끔찍한 일을 겪었기 때문에 '싱어의 학설은 나치의 범죄를 정당화한다'고 하여 입국이 거부된 것이다. 독일이 과거사 반성 척도에서 보면 얼마나 나치 시대에 학을 떼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아이러니한게, 정작 피터 싱어의 부모님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호주로 이민을 온 유대인이다. 피터 싱어의 조부모와 외조부모는 오스트리아를 떠나지 못하고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2011년 11월에는 기존의 추모 명판 근처에 T4 프로그램에 관한 자세한 정보와 만행들을 알 수 있는 시설물이 새로 설치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주 공연장인 필하모니 바로 옆에 있다.

5. 나치당의 모순적인 모습

아돌프 히틀러 본인부터 잠복고환을 가진 장애인이었으며[20]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었지만 둘 다 오히려 장애인을 죽이는 데 앞장섰고 괴벨스는 아이만 7명이나 낳는 위에서 말한 나치식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되는 행보를 보였는데 이에 대해선 그의 자기혐오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자신이 장애인이니 장애인들에게서 자신의 '혐오스러운' 모습을 상기하고 이를 지우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어느 시대나 지배자 가계와 최고지배층은 예외였기 때문에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21] 현대에 일어난 사실이란 점이 이를 특이하게 만든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소속 인물들은 이 같이 모순적인 사례가 매우 많다. 당장 히틀러부터 외형 자체가 자신이 말한 이상적인 '아리안족'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22] 히틀러가 태어난 곳은 히틀러가 하등인간이라고 주장하던 체코 슬라브족과 통혼이 매우 흔한 곳이었다.[23] 히틀러에 이어 나치 독일의 2인자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던 하인리히 힘러는 히틀러보다 그 차이가 더욱 심하여 거의 동양인에 가까운 외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오히려 절대권력을 누리며 홀로코스트에 그 누구보다 앞장섰다. 독일군의 명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은 유대인 혈통이 상당히 섞여 있다는 주장이 있으며 폴란드 혈통과 리투아니아 혈통은 확실하게 섞여 있었다. 나치당이 상당히 미화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나중에 나치당이 연구하다가 그에게 유대인 혈통이 있는 것을 알고 경악하였다. 이에 대한 나치당의 대응은 족보 위조였는데 조사관에게 거짓 증언을 하도록 지시했다. 무엇보다 독일은 로마 제국 이래 지리적으로 유럽의 중심이고 다양한 상인들, 선교자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지역이라 혼혈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역사적으로 독일 땅은 대부분 유럽의 주요 전쟁터였고 전쟁을 했다 하면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폴란드, 프랑스, 덴마크 등 인접 지역의 군대가 뭉치는 건 기본이었으며 멀리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러시아, 리투아니아, 스웨덴, 체코, 세르비아, 헝가리, 그리스, 오스만 제국 등등의 군사들까지 파견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군대가 전쟁을 하고 그 땅에 주둔하면 자연스럽게 혼혈이 발생한다. 근데 여기는 어차피 다들 비슷한 백인들끼리였으니 혼혈에 대한 거부감도 거의 없었고... 거기에 독일에서는 왕족들도 국가의 동맹과 공동체 구성을 위한 혼인 동맹이 엄청났다. 당장 합스부르크 가문은 아예 모토가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였다. 혈통에 민감한 왕족들도 이럴진대[24][25][26] 먹고 살기 바쁜 평민들이야... 결론적으로 독일은 혈통적으로도 유럽에서 가장 복잡한 국가였다. 되려 구석에 처박혀서 이민이 적었던 북유럽 국가들이나[27] 대항해시대 식민지 개발 이후 유럽의 전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처박혀 있던 포르투갈 등이 혈통적으로 더 단순하다고 봐야 했다. 이런 지역엔 순수한 아리아인 자체가 있기 어려웠다.[28]

루돌프 헤스의 어머니 같은 경우 나치당의 인종론을 강하게 지지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리스계 독일인이었고 공군 장성 에르하르트 밀히는 아버지가 유대인이라서 밀히도 유대인이란 이유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자 그를 아낀 헤르만 괴링이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는 말을 하며 풀어주게 했다.[29] 등 이러한 사례는 나치당 내부에서 숱하게 발견할 수 있다. 숱한 프랑스인들을 고문해 4천명을 죽인 리옹의 도살자 클라우스 바르비는 프랑스계였고 바르샤바 봉기 당시 20만 폴란드인을 학살한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폴란드계였다.[30]

이러한 사례는 나치당이 주장한 인종주의독일의 현실을 완전히 외면하고 그들의 '관념'에만 근거를 둔 피상적이고 맹목적인 환상에 불과했음을 드러낸다. 애당초 나치당은 북유럽에 가까운 독일 북부가 아닌 남부 바이에른을 기반으로 한 정당이었고 히틀러가 입당했을 때만 해도 당원의 상당수는 눈만 파랗고 나머지는 갈색머리에 그을린 피부를 지닌 전형적인 '알프스 인종'[31]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 때문인지 몰라도 문학 작품에 인종차별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캐릭터가 정작 자신들이 혐오하는 인종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일종의 클리셰가 많이 적용된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마법사 순수 혈통을 중시하지만 정작 자신은 머글 혼혈인 볼드모트,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의 아돌프 히틀러와 아돌프 카우프만 등. 한나 아렌트의 저서인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러한 모순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6. 픽션에서

7. 유사 사건

8. 둘러보기


[1] 마리안네 쇤펠더(Marianne Schönfelder). 웃고 있는 뒤쪽의 여성. 앞의 아기는 어린 시절의 작가 본인이다.[2] 정확히는 T4 작전의 공식적인 종료 후에도 계속 이어졌던 장애인 학살 프로그램인 브란트 작전(Aktion Brandt)을 통해 살해당했다. 장애인 학살 총책이었던 친위대 의사 카를 브란트의 이름에서 따온 브란트 작전은 일반적으로 T4 프로그램의 하위 프로그램으로 분류된다.[3] 베르너 하이데(Werner Heyde). 그는 재판이 시작되기 5일 전 구치소에서 자살했다. 그림 아래에는 "1959년 11월, 법원에 출두하는 베르너 하이데(Werner Heyde im November 1959, als er sich den Behörden stellte.)"라고 적혀 있다.[4] 이 거리 중심가에는 프로그램에 따라 살해된 자들을 추모하는 명판이 있다.[5] 바그너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6개월 전인 1939년 3월에 51세의 나이로 급사했다.[6] 나치당 당수인 히틀러 바로 밑의 당 최고위 간부들이다.[7] 당시 당 총통 비서실장 즉 히틀러의 당무 비서실장이다.[8] 주의가 산만해 인식력이 떨어지거나 다운 증후군이 있거나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들 등. 명확할 수도 있고 불명확할 수도 있지만 나치가 존재하던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자폐증을 가진 아이들도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같은 아이들로 여겨져 살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T4 프로그램 관련 한글 기사에서 발달장애라고 언급되어 있어 명확한 것으로 보인다.[9]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폭넓은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히틀러 일당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10] 일반적인 설명은 범종파적인 종교계의 저항이 전국민적 봉기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는 설이다.[11] 다른 통계의 경우 250,000~350,000명으로 추산하기도 한다.[12]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 즉 막내 아들인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의 1남 1녀 중 막내이자 유복자이며 원래는 영국 왕자로 올버니 공작 찰스 에드워드로 불렸다. 그가 16세가 되던 해 삼촌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인 알프레트(작센코부르크고타)(前 에든버러 공작 앨프리드)가 사망하면서(똑같은 이름의 외아들이 있었지만 먼저 사망했다) 공작령을 영국 왕실 사람들 중 누군가가 상속받아야 하는 상황에 왕위 계승자가 훗날 조지 5세가 되는 요크 공작 조지밖에 남지 않았던 여왕의 장남 에드워드 7세는 당연히 거부했으며 여왕의 3남 코넛 공작 아서와 그의 아들은 조국을 떠나 외국의 군주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공작령의 상속을 포기했다. 그래서 결국 4남인 레오폴드 왕자의 외아들인 찰스 에드워드에게 공작령이 돌아갔는데 어머니 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나는 어린 아들이 독일의 군주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남편 앨버트 공이 자란 곳이기도 했던 코부르크를 잃고 싶지 않았던 빅토리아 여왕이 "공작령을 받아들이는 것이 왕족의 의무다"라고 설득하면서 결국 공작령을 상속했으며 이름도 찰스 에드워드에서 카를 에두아르트로 바뀌었다.[13] 다만 대놓고 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후에도 학살은 계속됐는데 이런 상황에 희생되는 것은 늘 의지할 곳 없는 가장 약한 사람들이다. 주로 무연고자이거나 가족이 있어도 외면당하는 장애인들이 살해되었다.[14] 나치가 장애인 학살로 일반인의 권리를 증진할 수 있다고 선동했기 때문에 안락사뿐만 아니라 생명과 관련된 부분에서 생명보다 개인의 권리를 우선하는 행위 자체를 사회적으로 좋게 보지 않는다. 낙태도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 허용하고 있다.[15] 귀족이라면 요양, 시민 이하라면 교외의 수용소에 감금 내지 살처분.[16] 진보를 모토로 하는 당시 시민사회의 분위기, 시민사회로 돌입했지만 아직 신분제 계급사회였던 사회 상황, 백인 우월주의제국주의의 전성기였던 시대 상황, 철학적으로는 인간 기계론과 유물론이 등장하면서 이 모든 것의 칵테일이 그런 관습이 지속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17] T4 작전을 부활시키는 나라는 그날부로 국제기구를 탈퇴하고 고립국으로 전환해야 한다. 아무리 장애인, 성소수자 등을 극도로 차별하고 혐오하는 극우 세력이나 국가도 함부로 T4 작전을 부활시키지 못하는 이유다.[18] 일본에서는 1948년 우생보호법이 제정되어 1996년 폐지될 때까지 1만 6475건에 달하는 장애인과 유전병 환자들에 대한 강제 불임 수술을 정부가 나서서 한 일이 있었다. #[19] 단 지적장애인의 양육권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있다. 지적장애가 유전된다는 증거는 없으나, 지적 장애로 인해 자녀를 양육할 수 없는 부모 때문에 방치된 자녀가 선천적인 장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계선 지능이나 평균 이하인 80~90대의 지능에 머물고 성인이 된 뒤에도 그 상태로 어렵게 살아가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20] 자신의 6촌 여동생에게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가스실에 보내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히틀러 본인에게도 정신적 장애가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돌기도 했다.[21] 유럽 왕가의 유전병은 때때로 고귀한 질병 또는 혈통을 이어받은 증거로 간주되기도 했다.[22] 다만 나치 독일은 이상적인 아리안족이라는 모델을 제시했지만 당연히 여기에 안 든다고 다 죽이거나 한 건 아니다. 애초에 그랬다면 살아남을 독일인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나치 독일 입장에서 미달만 안 되면 통과고 모델은 말 그대로 모델이다. 물론 그 모델에 적합하다면 뭔가 더 좋은 대접을 받았을 수는 있겠지만.[23] 심지어 히틀러는 근친상간 혹은 유대인 사생아 혈통이란 설도 존재한다. 아돌프 히틀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가계도 자체가 미스테리한 부분이 많으며 혈통에 북아프리카인도 섞여 있다는 얘기도 있다.[24] 물론 왕족들의 국제결혼은 이익이 많이 남았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만 해도 결혼동맹으로 부르고뉴, 네덜란드를 얻거나 스페인과 일시적으로 동군연합을 이루기도 했다. 이 때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바로 카를 5세.[25] 일례로 나치가 그렇게 숭배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선대에 독일계(호엔촐레른, 하노버, 팔츠계 비텔스바흐), 네덜란드계(오라녜), 프랑스계(로렌-기즈, 부르봉-방돔), 영국계(튜더, 스튜어트)와 연결된다.(네덜란드, 영국이야 독일과 같은 게르만계지만 프랑스는 게르만+라틴 등 다양한 계통이 섞여 있다.) 당장 오라녜 공 빌럼 1세와 제임스 1세가 5대 조상이니 뭐.[26] 마리아 테레지아는 독일계(합스부르크, 브라운슈바이크볼텐뷔펠, 비텔스바흐), 에스파냐계(트라스미디라), 헝가리계, 프랑스계(발루아부르군디), 포르투갈계와 연결된다.[27] 이런 나라들은 구석에 처박힌 데다 환경적으로도 조건이 나쁘기 때문에 굳이 사람들이 살러 가거나 땅을 빼앗을 생각을 할 가능성이 적다.[28] 무엇보다 독일은 프로이센이 열강 중 하나로 들어서고 끝내 이들에 의해 독일 제국이 탄생하기 전까지 35개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고 이들 모두가 유럽의 여러 왕가나 공작 가문들과 혼인동맹을 맺었다. 귀족들도 이럴진대 평민들은 말할 것도 없다. 당연히 유대인도 마찬가지이며 순혈 아리아인이라는 것 자체가 허상에 지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29] 밀히는 결국 밀히의 어머니가 바람을 피워서 낳았다는 고백을 통해 유대인 혐의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 과정에서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온갖 욕을 먹은 건 안 자랑.[30] 정작 자기는 폴란드식 성을 뗄 정도로 폴란드계인 것을 부정했다고 한다.[31] 1920년대 우생학에 의거한 분류법이며 현재는 이런 식으로 분류하지 않는다.[32] 물론 사문화만 시키고 법안 자체를 폐지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효력은 형식적으로는 존재해서 500년 후 은하제국 유년학교 살인사건 당시 범인으로 몰린 하제는 범인 혐의는 벗어났지만 선천적 색맹이라는 이유로 은하제국 유년학교에서 퇴학당했다.[33] 이 병원의 원장이자 아냐의 아버지 크르지토프 올리바 박사는 이 공로로 훈장도 받지만 실상은 데스헤드가 병원을 총칼로 위협하여 억지로 환자들을 뺏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아냐의 부모는 환자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현실에 통곡만 할 수밖에 없었고 마지막에는 장애인을 학살하는 나치군을 저지하다가 살해당한다.[34] 이 장애인들은 당연히 우버솔다튼의 재료가 된다.[35] 근육조선 세계에서도 조선은 장애인을 따스하게 보살피고 공경하는 문화가 존재했기에 그대로 이어져내려온 조선 공화국에겐 거의 자연발화수준의 분노를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