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호르스트 루트비히 게오르크 에리히 베셀 Horst Ludwig Georg Erich Wessel | |
출생 | 1907년 10월 9일 |
독일국 베스트팔렌 빌레펠트 | |
사망 | 1930년 2월 23일 (향년 22세) |
독일국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하인 | |
종교 | 개신교 |
직업 | 정당인, 정치 깡패 |
소속 정당 | |
소속 조직 | 돌격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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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정당인, 정치 깡패.나치당 산하의 준군사조직 '돌격대'에서 활동하며 반대파 인사들을 길거리에서 공격해 구타하는 등 정치 깡패 역할을 수행하다가 논란의 죽음을 당했다. 젊은 나이에 사망한 인물이지만 나치당의 순교자로 추앙되고 그가 지은 노래가 나치당의 당가가 되면서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의 당사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 생애
19세 때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애국적 연설에 감격해서 나치당과 돌격대에 가입했다. 가입 후 3년이 지나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하인 지구를 담당하는 돌격대 사령관으로 재직했다. 당시 계급은 돌격대 '소위'로 베를린 돌격대의 중대[1]를 이끌었다.일반적으로 사회 하층민 출신인 다른 돌격대원들과 달리 베셀의 출신 성분은 이질적이었다.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으며[2] 아비투어(대학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3] 법과대학'에 입학한 인재로 나치당에서도 차기 지도자가 될 유망주로 일찌감치 선발, 중앙당에서 마련한 나치당 지도자 양성 캠프에도 보낼 정도였다.
그는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공산당 깡패들을 박멸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고, 공산당원들을 잘 때려잡는다는 평가를 받으며 전투력 높은 돌격대원으로 분류되었다. 살해되기 며칠 전에도 소속 부대를 이끌고 공산당 깡패들을 습격해서 4명을 병원에 입원시킬 정도로 두들겨 팼었다. 그 결과 공산당 무장 깡패조직 '붉은전선전사동맹'의 척살 리스트 순위에 올라가게 된다.
이 때문에 열혈 돌격대원으로 활동하던 중 어이 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세들어 살던 주택의 집주인 노파와 월세 납부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화가 난 노파가 해당 지구에서 활동하던 공산당 행동단원들에게 "손 좀 봐달라"며 부탁한 것. 의뢰를 받은 공산당원들은 노파의 남편이 비록 공산당원이었지만 그가 사망했을 때 교회 의식으로 장례를 치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손봐줘야 할 대상이 눈엣가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이를 수락하고 행동을 개시했다.
1930년 1월 14일, 베셀이 세들어 살던 그 월셋집[4]에서 자신의 애인[5]과 함께 방 안에 있다가 알브레히트 횔러(Albrecht Höhler)를 포함한 공산당원들이 들이닥치자 대응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쏜 총탄에 머리를 저격당해 쓰러졌다. 현장에서 의식을 잃은 뒤 이웃 주민들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으나 한 달 반 동안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결국 2월 23일 총상에 의한 패혈증으로 세상을 떴다.
2.1. 사후
알브레히트 횔러를 비롯한 범인들은 총격 직후 방을 빠져나와 뿔뿔이 흩어져 도주했으며, 독일 공산당 지역 조직은 이들을 숨겨주었다. 때문에 한동안 범인들은 잡히지 않았으며 공산당은 "기둥서방들끼리 창녀를 두고 싸우다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자당과는 상관없다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하지만 수사 결과 체포된 한 명의 공범이 사건의 실상을 낱낱이 자백하면서 공산당 측은 공개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살인의 전말이 밝혀지며 여론 역시 나치당 쪽으로 기울었고, 주류 언론조차 이를 정치 테러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나치당은 공산당을 향해 전방위적인 정치 공세를 폈다.사건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던 애인은 알브레히트 횔러를 콕 집어 그가 범인이라고 증언했으며, 체포 후 수감된 횔러는 결국 나치당이 집권한 뒤 다른 교도소로 이감되던 중 돌격대원들에게 붙잡혀 끌려나가 총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호르스트 베셀은 한달 반에 이르는 긴 시간에 걸쳐 고통스럽게 죽어갔는데, 괴벨스는 나치당 기관지인 <공격>지에서 베셀의 사투 과정을 생중계했다. 소뇌에 박힌 총알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괴벨스의 뛰어난 독일어 작문 실력으로 눈물콧물 쏟아내게 포장하고 공산당 살인마들을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패야 된다고 규탄했다. 한때 범인들을 실드쳤던 공산당 신문은 엄청난 역관광을 당해 여론의 질타까지 받아야 했고, 주류 언론에서도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었기 때문에 베셀은 '애국 청년'으로 포장되었다.
장례식엔 나치당 2인자급인 괴링과 괴벨스는 물론이고 독일의 전 황제 빌헬름 2세의 넷째 아들 아우구스트 빌헬름 황자까지 참가했다.[6] 괴벨스는 본래 장례식을 거의 국장급으로 치르려고 했으나 이는 무산되었다. 괴벨스는 베셀을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나올 만한 백치, 노동자, 창녀들 사이로 '스스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에 임한 그리스도와 같은 사회주의자요 이상주의적 공상가'라고 포장했다.
3. 활동
생전에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를 지었으며, 이 노래는 나치당의 당가로 채택되어 사실상 나치 독일 시기의 국가로 대우받았다. 다만 마지막 절인 4절은 사후에 작사되었다.4. 여담
[1] 돌격대 중대라봤자 규모는 총 열네댓 명이었다.[2] 나중에 장례식 규모를 두고 유족들이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인맥이 있어 면담을 시도할 정도로 명망있는 목사였다.[3] 현재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본 대학(Rheinische Friedrich-Wilhelms-Universität Bonn).[4] 현 프랑크푸르터 슈트라세(Frankfurter Straße) 62번지.[5] 성매매 여성이었으며, 사실 월셋방 자체가 그 애인이 세들어 살던 집이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애인의 집에 더부살이하고 있었던 셈.[6] 의외로 히틀러는 괴벨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베르크호프 별장으로 놀러가기로 선약이 되어 있어서 참석을 단칼에 거절했다. 여담으로 빌헬름 2세는 아들들이 나치빠인 걸 대단히 안 좋아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