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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3 16:22:54

국가노동봉사단

Reichsarbeitsdienst
국가노동봉사단
파일:RAD 깃발.svg

1. 개요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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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의 봉사 조직. 콘스탄틴 히에를(Konstantin Hierl)이 수장인 국가노동지도자를 역임했다.

나치 독일이 창설한 이 조직은 크게 남성이 소속된 "ReichsarbeitsdienstMänner(RAD/M)"과 여성이 소속된 "Reichsarbeitdienst der weiblichen Jugend(RAD/wJ)" 두 가지로 나뉘었다. 17세부터 25세까지의 아리안계 독일인이 소속되어 6개월간 각종 노동 봉사 활동에 참가하게 되어 있으며, 남성에게는 징병에 대한 준비 기간이었다. 전국을 40개의 노동 관구(Arbeitsgau)로 분할해 각 노동 관구에는 본부 스탭과 보위중대(Wachkompanie)가 운영을 담당했다. 각 관구에는 6~8개의 노동대대(Arbeitsgruppen)가 있고 각 대대에는 1,200~1,800명의 장정이 소속되었다.1개 대대는 200~300명이 소속된 중대(RAD-Abteilung) 6개, 각 중대는 4개 소대(70명)로 구성되며, 각 단원에게는 삽과 자전거가 지급됐다.

2. 역사

RAD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하인리히 브뤼닝(Heinrich Brüning) 총리가 이끄는 중앙당 정부에서 1931년 6월 5일 창설된 "봉사 근로단(Freiwilliger Arbeitsdienst : FAD)"에 기원을 두고 있어서 대공황의 여파로 늘어난 실업자 대책으로 운하나 교량 건설 같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후인 1935년 6월 6일에 "국가사회주의 의용 근로봉사단(Nationalsozialistischer Arbeitsdienst : NSAD)"과 통합이 공포된 국가 근로 봉사법에 의거해 만들어진 국가 조직으로 같은 달 26일에 국가노동봉사단으로 설립되었다. RAD 단원은 각종 시민 서비스, 군사 시설 건설, 공공 사업, 농업 계획에 종사하고 있었다. 나치 정권 하에서 RAD는 준군사 조직(Wehrmachtgefolge)으로 알려졌다. RAD는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전에는 아우토반 건설, 그리고 전쟁 발발 후에는 군용 도로, 비행장 및 철도의 건설이나 보수가 주요 업무가 되었다.

1939년 10월 기준 1700개의 중대에 합계 35만명이 소속되어 있어 프랑스 침공 때는 약 900개 중대, 노르웨이 작전에서도 18개 중대가 파견되어 핀란드 등지에서 도로 건설에 종사했다. 1941년에 바르바로사 작전을 발동하자 5개 차량화 RAD 대대가 소속되어, 1942년에 동부전선에서는 472개 중대가 활약했다. 이어 그 해 8월 이후는 육군과 공군에 직접 징병되기 시작했다. 기타 독일과 프랑스에는 공군 지원부대로 56개 중대 2만명 이상이 온갖 작업을 맡고 있었다. 1943년이 되면 공군 지원부대로 6주간 대공포 훈련을 받고 420개 중대가 공군 고사포 부대에 소속되면서 다른 중대도 대전차 부대, 대공포 부대 같은 군대로 바뀌었고 공군에서는 고사포의 운용을 맡아 88mm, 105mm 대공포를 갖추고 전투에 동원되었다. 1944년 9월에 연합군이 마켓 가든 작전를 발동하자 RAD 2개 중대가 보병과 포병으로 전선에 투입되었고, 이들은 결국 독일군 최후의 인적 자원이 된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1945년에는 RAD의 훈련 기간도 단축되고 군사 훈련만 했다. 또 국민돌격대 창설도 진행되고 있어 RAD도 이에 흡수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콘스탄틴 히에를이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이 조치를 거부하고 끝까지 준군사조직으로만 남았다. 1945년 4월에 징병 직전의 청년으로 3개 RAD 사단이 창설되어 베를린 구출작전에 나가 포츠담까지 진격할 것이라는 망상에 가까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