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a9c5><colcolor=#19191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육군 제국원수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Hermann Kövess von Kövessháza | |
이름 | Hermann Albin Josef Freiherr Kövess von Kövessháza독일어 헤르만 알빈 요제프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남작[1][2] Kövessházi Kövess Hermann헝가리어 쾨베슈하지 쾨베시 헤르만[3] |
출생 | 1854년 3월 30일 |
오스트리아 제국 보이보디나 공국 테메슈바어 | |
사망 | 1924년 9월 22일 (향년 70세) |
오스트리아 공화국 빈 | |
군사 경력 |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
1872년 ~ 1918년 | |
최종 계급 | 제국 육군 제국원수 (k.u.k. Feldmarschall)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합동 육군, 1917년)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주요 지휘 | 제72보병연대 제52보병연대 제23보병연대 제15보병여단/제14군단 장교학교 제8보병사단 티롤 요새화 총감독관 제12군단/트란실바니아 군사령관 쾨베시 집단군 제3군 제7군 쾨베시 전선군 발칸 군집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총사령관 |
주요 서훈 | 백엽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훈장 지휘관십자(Kommandeurkreuz des Militär-Maria Theresien-Ordens) 성 이슈트반 훈장 대십자(Szent István-rend nagykeresztj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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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의 초상화 [4] |
2. 생애
2.1. 생애 초기
쾨베시는 트란실바니아와 인접한 지역이자 보이보디나 공국의 수도 테메슈바어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육군 소장인 알빈 빅토어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Albin Viktor Kövess von Kövessháza, 1821–1890)과 트란실바니아의 어느 한 약사의 딸이었던 요한나 레지나 스터징(Johanna Regina Sterzing, 1836-1898) 사이에서 태어났다.[6]쾨베시의 경우, 트란실바니아에서 태어난 헝가리계 오스트리아인이었으나, 부모님의 영향으로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한 편이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쾨베시(Kövess) 가문은 원래 서부 헝가리의 '쾨베슈칼러이'(köveskállai) 쾨베시라는 이름을 가진 오래된 귀족 가문으로, 두나운툴(Dunántúl) 지역 내 베스프렘(Veszprém) 주에서 절러(Zala) 주와 인접한 벌러톤호 근처 쾨베슈칼(Köveskál) 마을 출신이었다. 13세기부터 공식 문서에 이 가문이 등장하며, 이름은 Kues, Kvesd, Kewes, Keoves, Kewessy, Köves, Kövessy 등 다양한 철자로 쓰였다. 이후 18세기에 쾨베시 가문의 한 분파가 오스트리아[7]로 이주하면서 본래의 귀족 칭호인 '쾨베슈칼러이'를 '쾨베슈하지'(Kövessházi)로 변경하였다.[8] 이후 헤르만 쾨베시가 이 분파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헤르만 쾨베시의 어머니인 요한나 레지나 스터징은 트란실바니아 작센인 혈통과 출신을 가진 독일계 루마니아인이었다.[9]
2.2. 장교가 되다.
1864년부터 쾨베시는 부다페스트의 오펜(Ofen)에 있는 중등학교에 다녔고, 1865년 가을부터 하인부르크안데어도나우에 있는 생도학교에 입학하였다. 쾨베시는 여기서 기초군사훈련과 함께 생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1868년, 즈나임(Znaim) 근처 클로스터브루크(Klosterbruck)에 있는 공병학교(Genieakademie)에서 1년간 수학한 뒤, 빈의 황립 및 왕립 공병사관학교(k.u.k. Technische Militärakademie)의 공병부(Genieabteilung)로 옮겼는데, 그의 동기로는 후에 사라예보 사건에 중심으로 엮이게 되는 오스카르 포티오레크가 있었다. 쾨베시는 전체 12등으로 공병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침착하고 매우 근면하며 단정하다"는 인성 평가를 받았다. 1872년 9월 1일, 쾨베시는 빈의 제2공병연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3년후인 1875년 5월 1일에 중위로 진급한 쾨베시는 1876년부터 1878년까지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했다.1878년 9월 1일부터 헤르만슈타트에 있는 제16보병사단의 참모장교로 배치된 쾨베시는 이듬해인 1879년 6월부터 같은 곳의 제12기병여단의 참모장이 되었다. 동년 11월 1일에는 특별 진급으로 대위가 됨과 동시에 1880년 5월 1일부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의 사라예보에 위치한 총사령부 참모로 배속된 쾨베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점령지역의 군사 시설 건설과 요새화 작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882년, 쾨베시는 남부의 달마티아 전역에 참가하여 크리보시예(Krivošije) 반란 진압에 기여했고, 이는 그의 첫 전투 경험이 되었다. 이 공로로 그는 훗날 1890년에 제정된 공로훈장(Signum Laudis)의 동메달을 전시 리본과 함께 수여받을 자격을 얻었다. 또한 1882년 7월 9일 이탈리아 왕관 기사훈장을 받았는데, 이는 그의 군사적 능력이 일찍부터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1884년, 쾨베시는 빈으로 돌아왔고, 제38보병연대 제6중대장을 맡았다.
규정된 부대 근무를 마친 후 쾨베시는 1886년 크라쿠프의 제1군단으로 전보되었다. 그곳에서 복무하는 동안 그는 참모장교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인 참모 고급장교 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달마티아 전역 이후 2년이 지난 1888년, 쾨베시는 예상을 깨고 두 번이나 참모 고급장교 시험인 대천사 시험(Erzengelprüfung)에 낙제했다. 이로 인해 그의 승진이 크게 지연되었고, 그가 뛰어난 능력을 갖춘 장교임은 분명했지만, 불운하게도 저조한 시험 성적을 거두자 참모장교로서의 경력은 끝이 나버렸다.[10]
1886년 11월 1일부터는 렘베르크에 주둔한 제11군단 참모부원이 되었다. 1888년 5월 1일부로 크라쿠프 제56보병연대 제14중대 대위가 되었다. 1890년 5월 1일 특별 진급으로 소령이 되어 제26보병연대 제2대대장이 되었고, 1892년 2월 28일부터는 같은 연대 제4대대장을 맡았다. 1894년 5월 1일 정상적인 진급으로 제72보병연대 중령이 되었고, 1896년 11월 1일 다시 특별 진급으로 제52보병연대 대령이 되었다. 1898년 3월 빈 제23보병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지휘 하에 이 연대는 빈 주둔군 중 최고의 평가를 받았으며,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로부터 직접 여러 임무를 부여받았다.
1900년경, 쾨베시는 빈 주둔부대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쾨베시는 몇개의 특별한 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첫번째로 황립 및 왕립 군대 중 가장 젊은 대령이었다는 점과 두번째로는 가톨릭이 우세한 군부 내에서도 흔치 않은 개신교 신자라는 점이었다.[11] 그리고 쾨베시가 가진 또 다른 세번째 특징은 그가 평소에 건선을 앓고 있었는데, 이 피부병으로 인해 당시 장성들의 기본 소양이었던 콧수염이 쾨베시한테만큼은 면제되고 있었으며, 덕분에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쾨베시는 승진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4월에는 세르비아의 타코보(Takovo) 십자 훈장 2등급을 수여받았고, 이 훈장을 받은 것으로 시작해서 1902년 4월에는 철관 훈장 3등급을, 같은 해 11월 1일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또한 1902년 10월부터 1906년 11월까지 제15보병여단장과 제14군단 장교학교장을 겸임했다.
쾨베시가 제15보병여단장으로서 티롤 지역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이래, 1903년 4월 8일 바덴 대공국으로부터 베르톨트 1세 공로훈장(Orden Berthold des Ersten) 2등급을 수여받았고, 1903년 9월 트리에스트에서 페르디난트 대공의 기대를 받던 콘라트가 제8보병사단장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상관이 되었다. 인스브루크에 본부를 둔 제8보병사단은 오이겐 대공이 지휘하는 제14군단의 일부였다. 당시 인스브루크는 인구 4만의 작은 알프스 도시로, 거의 전적으로 독일계 주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4군단, 제8보병사단, 제15보병여단의 본부가 모두 이곳에 위치해 있어 계급 서열상 오이겐 대공이 최고 장교, 콘라트가 두 번째, 쾨베시가 세 번째였다.
알프스산맥에 자리를 잡아 산악 지형이 많은 티롤의 특성상 산악전 능력 배양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특히 티롤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콘라트의 제8사단은 산악전에 특화된 부대로 육성되었는데, 콘라트는 높은 고도, 험준한 지형, 극한의 기후 등 독특한 환경 조건으로 인해 평지에서의 작전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산악전에서의 실전적 훈련을 강조했고, 스스로도 알펜페라인(Alpenverein)[12]에 가입해 현지 지형을 답사하곤 했다. 쾨베시는 이미 1902년부터 제15보병여단장으로서 티롤 지역에서 근무하며 산악 지형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고 있었기에, 콘라트의 부임 당시 이 지역의 군사적 특성을 전부 파악하고 있는 경험 많은 지휘관이었다. 콘라트는 쾨베시의 이러한 경험을 적극 활용하며 사단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04년 1월 12일, 바덴 대공국으로부터 제링겐 사자훈장(Orden vom Zähringer Löwen) 1등급을 받았다. 그리고 동년 상오스트리아에서 열린 황제 기동훈련(Kaisermanöver)에서 제8보병사단은 부대의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는데, 여기서 쾨베시의 제15보병여단은 특히 우수한 기동성과 전술적 유연성을 보여주며 훈련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성과로 인해 사단은 이례적으로 이듬해에도 다시 기동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다. 1905년에는 빅토어 단클 소장이 제16보병여단장으로 부임하면서 제8보병사단의 전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1905년 훈련이 남티롤의 논탈 계곡(Nontal)에서 계획되었기에,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제8보병사단이 자연스럽게 참가 부대로 선정되었다. 벡 시대의 황제 기동훈련은 관례적인 3일간 지속되었지만, 후기와는 달리 '전투'가 이어지지 않았다. 하루가 끝날 때 양측이 어떤 위치에 있었든 상관없이, 그들은 다음 날 몇 주 전에 미리 계획된 새로운 위치에서 다시 '전투'를 시작했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도 콘라트의 제8보병사단은 처음 이틀 동안은 이탈리아 왕국군을 가정한 "적군" 역할을, 셋째 날에는 "아군"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역할을 수행했는데, 양쪽 역할 모두에서 공격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고, 이렇게 성공적으로 마친 황제 기동훈련은 1년 후 콘라트가 참모총장에 임명되는 데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쾨베시의 제15보병여단과 단클의 제16보병여단은 산악 지형에서의 공격과 방어 작전을 모두 능숙하게 수행하며 그들의 전술적 능력을 입증했다. 두 여단의 뛰어난 기동과 전투 수행 능력은 제8보병사단의 성공에 결정적이었고, 훈련을 참관한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6년 남티롤 공세에서 쾨베시가 제3군 사령관으로서 이탈리아군을 상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처럼 두드러진 성과를 보여준 제8보병사단은 1904년과 1906년 사이 이탈리아 국경 주둔군 보강 정책에 따라 15개 대대에서 20개 대대로 증강되었다. 신규 병력에는 이전에 사단에 속하지 않았던 제3티롤 황제예거연대의 3개 대대와 제2, 제12보헤미아 야전예거대대가 포함되었다. 제102보병연대가 사단에서 이탈하고, 대신 다른 보헤미아 연대인 제88연대의 3개 대대로 교체되었다. 그 결과로 사단의 민족 구성은 독일계 56%, 이탈리아계 24%, 체코계 18%로 사실상 변화가 없었는데, 이는 제88보병연대가 제102연대만큼 압도적으로 체코인이 많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1906년 11월에 콘라트가 참모총장으로 발탁되면서 제8보병사단장 직위는 공석이 되었고, 그간의 성과와 티롤 지역에 대한 깊은 이해를 인정받아 쾨베시가 콘라트의 뒤를 이어 1910년 4월까지 제8보병사단장을 역임했다. 1907년 5월 1일에는 중장으로 진급했고, 1908년 8월 12일에는 레오폴트 훈장 기사십자훈장을 받았다. 이러한 성과들은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중 제3군, 제7군 사령관, 발칸 군집단 사령관을 거쳐 마침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최후의 총사령관이 되는 등 중요한 지휘관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1910년에는 티롤 요새감찰관(Inspizierender der Befestigungen in Tirol)이 되어 1911년까지 1년 동안 티롤 요새화 공사와 요새의 총감찰관을 맡았는데, 이 당시 그에 대한 오이겐의 평가 기록은 다음과 같았다.
Beurteilung : MANÖVER
Feldmarschalleutnant Hermann K ö v e s s von Kövesshaza, Inspizierender der Befestigungen von Tirol.
Hat die Schlussübung der 9. und 10. Infanterietruppendivision sowie der Marschbrigade vorzüglich geleitet. Die Anlage der Übungen war sehr instruktiv, die Leitung entsprechend der jeweiligen taktischen Situation sehr zweckmäßig und durchgreifend. Die Besprechung positiv, erschöpfend, lehrreich, dabei sehr taktvoll und maßvoll. Besitzt eine bemerkenswerte Ruhe, die sich auch seiner Umgebung mitteilt. Ist ein militärisch hochgebildeter, besonders leistungsfähiger, sehr distinguierter General, voll Pflichtgefühl und Ambition.
Ich halte Feldmarschalleutnant K ö v e s s - dessen dienstliches Wirken mir seit Jahren vorteilhaft bekannt ist - seiner ganzen Individualität nach, als zum Korpskommandanten vollkommen geeignet.
Eh. E u g e n.
평가 : 기동훈련
티롤 요새감찰관,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중장.
그는 제9보병사단과 제10보병사단, 그리고 행군여단의 최종 훈련을 탁월하게 이끌었다. 훈련의 구성이 매우 교육적이었으며, 각 전술 상황에 맞는 지휘가 실용적이고 철저했다. 강평은 건설적이고 완벽했으며, 유익하면서도 매우 정중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그가 지닌 주목할 만한 침착함은 주변에까지 전달되었다. 그는 고등 군사교육을 이수하여 해박한 군사지식을 갖추었고, 특히 유능하며, 품격 있는 장군으로서 의무감과 포부를 겸비하였다.
수년간 그의 훌륭한 복무태도를 지켜봐온 나로서는, 중장 쾨베시가 그의 모든 자질을 고려할 때 군단장으로서 완벽하게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한다.
오이겐 대공.
Feldmarschalleutnant Hermann K ö v e s s von Kövesshaza, Inspizierender der Befestigungen von Tirol.
Hat die Schlussübung der 9. und 10. Infanterietruppendivision sowie der Marschbrigade vorzüglich geleitet. Die Anlage der Übungen war sehr instruktiv, die Leitung entsprechend der jeweiligen taktischen Situation sehr zweckmäßig und durchgreifend. Die Besprechung positiv, erschöpfend, lehrreich, dabei sehr taktvoll und maßvoll. Besitzt eine bemerkenswerte Ruhe, die sich auch seiner Umgebung mitteilt. Ist ein militärisch hochgebildeter, besonders leistungsfähiger, sehr distinguierter General, voll Pflichtgefühl und Ambition.
Ich halte Feldmarschalleutnant K ö v e s s - dessen dienstliches Wirken mir seit Jahren vorteilhaft bekannt ist - seiner ganzen Individualität nach, als zum Korpskommandanten vollkommen geeignet.
Eh. E u g e n.
평가 : 기동훈련
티롤 요새감찰관,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중장.
그는 제9보병사단과 제10보병사단, 그리고 행군여단의 최종 훈련을 탁월하게 이끌었다. 훈련의 구성이 매우 교육적이었으며, 각 전술 상황에 맞는 지휘가 실용적이고 철저했다. 강평은 건설적이고 완벽했으며, 유익하면서도 매우 정중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그가 지닌 주목할 만한 침착함은 주변에까지 전달되었다. 그는 고등 군사교육을 이수하여 해박한 군사지식을 갖추었고, 특히 유능하며, 품격 있는 장군으로서 의무감과 포부를 겸비하였다.
수년간 그의 훌륭한 복무태도를 지켜봐온 나로서는, 중장 쾨베시가 그의 모든 자질을 고려할 때 군단장으로서 완벽하게 적합한 인물이라고 판단한다.
오이겐 대공.
쾨베시의 상급자였던 오이겐 대공은 9년 가까이 그를 옆에서 지켜본 입장에서, 호평 일색으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덕분인지 1911년 6월, 쾨베시는 다시 헤르만슈타트로 돌아와 마침내 제12군단장으로 임명되어 트란실바니아의 군사령관이 되었다. 곧이어 1911년 8월 비밀 고문관으로 임명되었고, 1911년 11월 1일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1912년 8월, 제95보병연대 명예대령(Oberstinhaber)으로 임명된 직후, 쾨베시는 헤르만슈타트에서 발생한 종교 관련 사건에 연루되었다. 당시 약 400명의 독일어권 가톨릭 신자들이 시 교구 사제였던 에곤 호헨로헤 공작(Egon Prinz Hohenlohe)과의 갈등 끝에 개신교로 개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가톨릭이 우세했던 빈 궁정 사회에 큰 스캔들을 일으켰다. 호헨로헤 공작은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보낸 서한에서 쾨베시가 이 문제를 방관하고 있으며, '로스 폰 롬 운동(Los von Rom Bewegung)'[13]을 암묵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특히 개신교에 적대적이었던 페르디난트 대공이 이 사건에 주목하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이는 보수 가톨릭 성향의 장교들에게 좋은 공격 기회가 되었고, 쾨베시는 조기 퇴역 압박에 직면했다. 그러나 황제가 빈 주둔 시절 쾨베시의 공적을 기억하고 있었고, 비록 당시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 있던 상태였으나 종교적 차별에 반대하는 실력주의자로서 여전히 군 내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콘라트의 비공식적 지지도 있어 그는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더욱이 콘라트는 종교가 군대 내 분열을 조장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1912년 9월 빈에서 열린 가톨릭 교회의 국제 행사 "세계 성체 대회"(International Eucharistic Congress) 당시 합스부르크 왕조와 제국이 가톨릭 교회와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는 것이 "非가톨릭 군인들에게 소외감을 주어 군대의 단결을 해칠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었다. 여하튼 쾨베시는 조기 퇴역을 면할수 있었지만, 이 사건의 영향으로 쾨베시는 1914년 3월 7일, 통상적인 경우보다 1년 정도 늦게 철관 훈장 1등급을 수여받았다.
2.3.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2.3.1. 동부전선
1914년 8월, 전쟁이 발발하자 쾨베시는 트란실바니아 제12군단장으로서 동부전선에 배치되었다. 당시 쾨베시는 모든 군단장들을 통틀어서 제일 고참이었지만,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기병대장과 빅토어 단클 보병대장에 밀려 군사령관이 되지 못했다. 때문에 쾨베시는 루돌프 폰 브루더만 기병대장 휘하의 제3군에 배속되었고, 제12군단을 지휘했다. 당시 그의 예하에는 루트비히 파우케르트(Ludwig Paukert) 중장의 제16보병사단, 카를 하우닝거(Karl Hauninger) 소장의 제35보병사단, 그리고 파울 카르크 폰 베벤부르크(Paul Karg von Bebenburg) 중장의 제38혼베드보병사단이 있었다.8월 21일 갈리치아 동부 국경의 야로스와우(Jarosław) 근처 졸로치우(Zolochiv) 지역에서 양측 기병 정찰대 간의 첫 대규모 전투가 발발했다. 제11군단이 렘베르크 지역에 남아있는 동안 쾨베시의 제12군단은 8월 26일부터 포모리야니(Pomoryany)에서 동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8월 28일부터 시작하여 이틀 연속 지속된 그닐라 리파(Gnila Lipa) 전투에서 니콜라이 루스키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 제3군에게 패배했다. 당시 제3군은 115개 대대와 376문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 제3군은 약 200개 대대와 685문의 포를 보유하고 있어 전력의 열세가 컸다.
그의 제12군단은 루돌프 폰 브루더만 기병대장 휘하의 제3군에 예속되어 있었고, 제3군단, 제11군단과 함께 집단군(Korpsgruppe Kövess)을 이루어 여러 기병사단의 지원을 받으며 드네스트르강 교두보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이때 제3군과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기병대장이 지휘하는 제2군[14] 휘하의 제7군단이 참여한 작전이 시작되며 제1차 렘베르크 전투가 발발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군은 공세를 맞아 거세게 반격했고, 졸로치우 지역에서 10만 명 이상의 병력으로 흘리냐니(Hlyniany)를 거쳐 렘베르크 방향으로 돌파에 성공했다.
9월 2일, 제국군의 전반적인 재편성 과정에서 쾨베시의 제12군단은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휘하의 제2군으로 재편입되었다. 그러나 같은 날에 콜로메아 전투에서 패하고, 9월 3일에 발발한 라바-루스카(Rava-Ruska) 전투에서도 패배를 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로하틴(Rohatyn)-바부호프(Babuhof)[15] 지역에서 제7군단이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간신히 저항했으나, 갈리치아의 오스트리아 전선 전체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9월 7일, 러시아군은 격렬한 전투 끝에 그루데크(Gródek)[16] 시를 점령했다. 9월 8일, 베레슈카(Wereszyca)[17] 강 중류에서 제3군이 반격을 시도했으나 9월 10일까지 공격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9월 11일, 산(San) 강 뒤로의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이 과정에서 쾨베시의 장남이자 황립 및 왕립 카이저경보병연대 소속 초임장교 벨러 쾨베시(Béla Kövess)[18]가 우흐누프(Uhnów) 근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로써 쾨베시는 브루실로프 공세 때 아들을 잃은 콘라트, 허저이, 플란처발틴과 함께 동부전선의 1차 갈리치아 전역에서 아들을 잃은 고위 지휘관 중 한 명이 되었다.
후퇴하는 군대의 보급품을 운반하던 열차들이 진로에서 막히자, 브루더만은 보급품들이 적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보급열차들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쾨베시는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진정한 남자다운 인물이 필요하다. 군복을 입은 노파들과 신경쇠약자들이 우리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라는 신랄한 비판을 남겼다.[19]
10월 말, 바르샤바 전투에서 힌덴부르크가 패배하고 후퇴하면서, 이에 연동하여 쾨베시의 제12군단도 산 강 전선에서 철수해야 했다. 11월 8일, 폴란드 전선의 새로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쾨베시의 제12군단은 카르파티아에서 철수하여 실레지아로 철도 이동을 시작했고, 11월 13일 루블리니츠(Lublinitz)에 도착했다. 이후 보이르슈의 슐레지엔 향토방위군 우측에 배치되어 러시아 제4군과 대치했다. 1914년 말 우치 전투에서 제12군단은 벨하토프(Belchatow)와 표트르쿠프(Piotrków)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으며, 12월 12일에는 제2군의 우익으로서 바르타(Warta) 강 양안의 프루시에츠코(Prusiecko) 지역을 담당했다. 이 시기에 독일 제국은 쾨베시의 공적을 인정하여 1915년 3월 9일에 철십자 훈장 2등급을, 5월 1일에는 적십자 공로성 훈장을, 7월 3일에 철십자 훈장 1등급을 수여했다.
1915년 5월 1일에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가 시작된 후, 쾨베시 군집단(Armeegruppe Kövess)은 라돔 지역에서 비스와강을 향한 공격을 재개했다. 이 시기 그의 군집단은 에드문트 폰 포드호란스키(Edmund von Podhoránszky) 소장의 제35보병사단, 루돌프 폰 샤리체르(Rudolf von Schariczer) 중장의 제16보병사단, 카를 프라이헤르 폰 하우어(Karl Freiherr von Hauer) 기병대장의 제9기병사단을 주축으로 하고 있었다. 제9기병사단은 다시 안톤 오스터무트(Anton Ostermuth) 소장의 제1기병여단과 프라이헤르 폰 세슬러(Freiherr von Sessler) 대령의 제9기병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리터 폰 미체프스키(Ritter von Micewski) 소장의 제7기병사단도 지원 병력으로 배속되어 있었다. 쾨베시의 쾨베시 군집단은 7월 21일 이반고로드 요새의 북부와 동부 방어선에 대한 집중적인 포격을 실시했다. 공격 초기에는 러시아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으나, 보이르슈 독일 국토방위군단(Landwehrkorps)과의 협동 작전을 통해 요새의 외곽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에드문트 폰 포드호란스키(Edmund von Podhoránszky) 소장의 제35보병사단과 루돌프 폰 샤리체르(Rudolf von Schariczer) 중장의 제16보병사단이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반고로드 요새 점령은 이후 비스와강 도하 작전의 성공으로 이어져 동부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전략적 위치를 크게 개선시켰다. 그 공으로 8월 3일에 레오폴트 훈장 대십자를 수여받았다. 8월에도 쾨베시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8월 초 델랴틴(Deliatyn) 주변에서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격을 여러 차례 저지했으며, 중순에는 스타니슬라우와 예주폴(Jezupol) 남쪽 지역에서도 방어에 성공했다. 8월 중순 이후에는 공세로 전환하여 클리카프카(Klikawka) 강과 부크강을 연이어 도하했고, 이바니우(Ivaniv)와 코스탸친티우(Kostiantyniv) 북쪽에서는 네미리우(Nemyriv)를 비롯한 여러 거점을 장악했다. 이후 상부 풀바(Pulwa) 강 방면으로 진격을 이어갔다.
2.3.2. 발칸 정복에 성공
2.3.2.1. 세르비아 정복
1915년 9월 28일,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 기간에 공을 세운 쾨베시는 제12군단장직을 요한 폰 헨리케츠 중장에게 넘기고 카를 테르스찬스키 폰 나더시 기병대장으로 부터 지휘권을 양도받아 새로 편성된 제3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15년 10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칸 전선에서 동맹국은 세르비아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계획했다. 독일의 마켄젠 원수가 전체 작전을 지휘했고, 쾨베시의 제3군은 이 작전의 핵심 부대 중 하나였다. 쾨베시의 제3군은 폰 카슬러(von Kasler) 중장의 제62보병사단, 슈트라이트(Streith) 소장이 이끄는 슈트라이트 집단, 벨러 소르시치 폰 제베린 중장의 소르시치 집단을 직할로 두었다. 예하 군단으로는 하인리히 폰그라츠 폰 센트미클로시 에트 오바리(Heinrich Pongrácz von Szent-Mikloś et Ovár) 소장의 제53보병사단을 보유한 트롤만(Ignaz Trollmann) 중장의 제19군단, 독일의 오이겐 폰 팔켄하인 장군이 이끄는 제22독일예비군단이 있었다. 제22독일예비군단은 폰 룬켈(von Runckel) 소장의 제43보병사단, 폰 도레르(von Dorrer) 소장의 제44예비사단, 그리고 헤어초크 빌헬름 폰 우라흐(Herzog Wilhelm von Urach) 중장의 제1 뷔르템베르크 제26보병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추가로 빅토어 폰 쇼이헨슈투엘 포병대장의 제8군단이 있었는데, 이 군단은 하인리히 폰 고이긴거(Heinrich von Goiginger) 중장의 제57보병사단과 루카스 슈냐리치 중장의 제59보병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당시 세르비아는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이후 전략적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불가리아의 참전으로 동서에서 압박을 받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쾨베시의 제3군은 1915년 10월 초 마켄젠 군집단 예하에서 독일 제11군, 불가리아 제1군과 협력하여 도나우강과 사바강 도하 작전을 감행했는데, 쾨베시는 샤바츠(Šabac)와 벨리코 그라디슈테(Veliko Gradište)사이 전선에서 베오그라드 동부 고지 점령작전에 가담했다. 강력한 세르비아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도하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10월 9일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 세르비아군은 크라구예바츠(Kragujevac)와 니시 방면으로 후퇴했지만, 불가리아의 참전으로 살로니카로 이어지는 철도선이 차단되어 연합군으로부터의 지원과 포탄 보급이 불가능해졌다.
11월 코소보 공세에서는 북쪽에서 지속적인 압박을 가하며 세르비아군을 남쪽으로 압박했다. 마켄젠은 세르비아군을 코소보 평원에서 포위하여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려 했고, 쾨베시의 제3군은 이 계획의 북부 지역을 담당했다. 11월 23일에는 그의 제59보병사단이 미트로비차에 도달하는 성과를 거뒀다. 혹한의 날씨 속에서도 작전을 멈추지 않았으며, 제10산악여단이 4,921피트 높이의 빙판길을 극복하며 진격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극심한 추위로 인해 30명의 병사가 동사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쾨베시는 작전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이러한 끈질긴 추격 작전 끝에 11월 말에는 마침내 세르비아 전역 점령을 완료했다. 이페크(Ipek) 지역에서만 80문의 포, 160대의 탄약 수송차, 40대의 자동차, 12대의 야전용 제빵차, 수천 정의 소총과 기타 군수물자를 노획했고, 하루 동안에만 2,000명이 넘는 포로를 획득했는데 그중 300명은 몬테네그로인이었다. 플레블례(Plevlje)에서 전진한 쾨베시의 부대는 브라나 고라(Vrana Gora) 남쪽의 몬테네그로 진지들을 완전히 장악했고, 일부 부대는 타라(Tara) 협곡까지 추격해 글리바치(Glibaci)에서 적 대대를 격파했다. 또한 벨로폴례(Bjelopolje) 남서쪽의 타라카이에(Tarakaie)와 베라네(Berane) 북쪽의 고두사(Godusa)에 있는 적의 강화된 진지도 점령했으며, 타라에서의 전투에서는 3문의 산악포, 2문의 야전포, 1,200정의 소총을 추가로 노획했다. 세르비아군에게 3만 명의 사상자와 199문의 포, 150대의 차량 등 막대한 손실을 입히고 알바니아 방향으로 퇴각하게 만들었다.
비록 세르비아 군대를 완전히 포위하여 섬멸하진 못했지만, 발칸반도 북부를 완전히 장악하였고, 오스만 제국과의 육로 연결 확보로 동맹국의 발칸 장악력 강화라는 군사적 성과를 남겼다. 점령 후에는 북부와 중부 세르비아, 그리고 코소보 서부지역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통치 하에 들어갔으며, 베오그라드에 총독부가 설치되었다. 특히 무엇보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있어서 베오그라드 점령은 1914년 초기 실패를 만회하는 상징적인 승리로 평가받았다. 쾨베시는 세르비아 점령에 대한 공으로 11월 28일에 군사공로십자 1등급과 이후 도입된 검날 문양도 추가로 수여받았으며, 11월 29일에는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통보받았고, 12월 4일에 공식으로 수여받았다. 이는 쾨베시가 이번 세르비아 작전에서 거둔 일련의 성과들이 그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입증한 중요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훗날 쾨베시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가장 성공적인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주요 업적이 되었다. 이 작전으로 인해 세르비아는 40만 명이 넘는 군인과 민간인이 알바니아 산맥을 넘어 아드리아해 연안으로 후퇴하는 대후퇴를 감행해야 했다. 혹한과 질병, 알바니아 게릴라들의 공격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살아남은 이들은 결국 연합군의 도움으로 코르푸 섬으로 대피할 수 있었다.
2.3.2.2. 몬테네그로 정복
1916년 1월, 이번에는 몬테네그로를 향한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약 101,000명의 보병, 1,170명의 기병, 947문의 포를 동원했고, 몬테네그로군은 52,400명의 병력과 155문의 포로 맞섰다. 몬테네그로 국경에는 4개 주력부대, 약 35,000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서부방면에서는 사르코티치가 이끄는 제19군단이 작전을 전개했다. 이 군단은 69개 대대, 2개 기병중대, 63개 포병부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총 57,570명의 병력, 170명의 기병, 254문의 이동식 포, 360문의 고정식 포, 58문의 해군포를 보유했다. 로브첸(Lovćen) 산은 해발 1,749m 높이로 코토르 만을 내려다보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몬테네그로군이 프랑스제 포병을 배치하고 있었다. 로브첸 산 공격은 소르시치의 부대(6,150명, 16문의 포)와 브라운의 47보병사단(16,500명, 30문의 포)이 담당했다. 1월 8일부터 시작된 공격은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함포 지원을 받으며 진행되었고, 48시간 만에 크르스타츠 고개와 로브첸 정상을 점령했으며, 1월 10-11일에는 보스니아계 부대들이 로브첸 산을 완전히 장악했다.동부방면에서는 쾨베시의 제8군단이 두 가지 임무를 수행했다. 칼저 폰 마스펠트 중장의 제62사단과 제53사단이 타라강을 따라 플레블랴와 비옐로 폴리에 방향으로 진격하며 몬테네그로군을 견제했고, 노비 파자르에서 출발한 제10산악여단과 제18산악여단이 1월 10일 베라네를 점령하는 등 포위망을 좁혀갔다.프리슈티나에서 출발한 제205여단과 제9산악여단은 서쪽으로 진격해 페치와 벨리카를 점령했고, 제57보병사단은 프리즈렌에서 출발했다. 양면작전의 성공으로 1월 13일에는 수도 체티네가 함락되었다. 체티네를 빼앗긴 니콜라 1세는 휴전을 요청했지만, 콘라트 참모총장의 지시로 공세는 계속되었다. 결국 1월 16일 포드고리차마저 점령되자 몬테네그로는 1월 23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 성공으로 쾨베시는 1916년 1월 12일, 은 공로훈장을 전시 리본과 함께 받았고, 1월 24일에는 바이에른 왕국으로부터 군사공로훈장 대십자(십자검 포함)를 수여받았다. 그리고 2월 26일에는 제국상급대장으로 승진했다. 서부방면을 지휘한 사르코티치는 '로브첸의 남작' 작위를 받았다.
2.3.2.3. 알바니아 공략
몬테네그로 점령 직후인 1월 16일에 쾨베시는 군사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3월 1일 빅토어 베버 폰 베베나우 중장에게 총독직을 인계하고 알바니아 공략에 나섰다. 3군의 일부 병력과 카를 폰 플란처발틴의 제19군단을 이끌고 1월 말 스쿠타리와 알레시오[20]를 점령한 후 티라나 방면으로 진격했다. 당시 제19군단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었는데, 트롤만(Ignaz Trollmann) 중장 휘하에 시스(Schieß) 여단과 슈트라이트(Streith) 여단, 그리고 빅토어 베버 폰 베베나우 중장의 제47보병사단이 있었다. 제8군단은 쇼이헨슈투엘 포병대장의 지휘 하에 하인리히 폰그라츠 폰 센트미클로시 에트 오바리(Heinrich Pongrácz von Szent-Mikloś et Ovár) 소장의 제53보병사단, 루카스 슈냐리치 중장의 제59보병사단, 하인리히 폰 고이긴거(Heinrich von Goiginger) 중장의 제57보병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2월로 접어들 때 쾨베시는 엘바산(Elbasan)과 베라트(Berat)를 점령하며알바니아 중북부 지역을 장악했고, 이탈리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항구도시 두라초를 포위했다. 이 지역의 군벌이자 이탈리아 왕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던 에사트 토프타니(Essad Toptani)가 농성을 펼쳤지만, 나흘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에사트 토프타니의 알바니아군을 격퇴했고 이탈리아 왕국군도 해상에서 철수하면서 쾨베시는 두라초 점령에 성공했다.
이때 쾨베시의 공적은 가히 대단했는데, 산악전에서 뛰어난 지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험난한 지형과 겨울 날씨를 극복하였고, 이 작전의 성공으로 발칸 반도 서부 전선이 사실상 종결되었다. 덕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아드리아해 연안을 전부 손에 넣었고, 이탈리아 왕국의 발칸 진출을 사실상 저지하며 발칸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쾨베시는 오헝군, 독일군, 불가리아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성공적으로 지휘하고 각국 군대의 특성과 지휘체계를 효과적으로 조율했다. 특히 험준한 산악지대와 혹독한 겨울 날씨 속에서도 해군력과의 협동작전을 통해 연안 요새들을 효과적으로 점령했고, 베오그라드 점령부터 알바니아 해안까지의 연속적인 작전을 통해 발칸반도의 전략적 요충지들을 단기간에 확보하며 전략목표를 달성했다. 이러한 성공적인 작전 수행 이후 쾨베시는 3월부터 이탈리아 전선으로 전환 배치되었다.
2.3.3. 트렌티노 공세와 브루실로프 공세
같은 해 1916년 3월 17일, 카타로에 주둔중이던 쾨베시 제국상급대장의 제3군은 남서부 전선으로 이동되었다. 이 당시 쾨베시의 제3군은 카를 크르지테크 보병대장의 제17군단, 카를 폰 키르히바흐 기병대장의 제1군단, 프라이헤르 폰 뤼트겐도르프(Freiherr von Lütgendorf) 중장의 제21군단으로 구성되었다. 제17군단은 슈트라커(Stracker) 소장의 제18보병사단, 판첸뵈크(Panzenböck) 대령의 제2산악여단, 보살라(Wossala) 소장의 제8산악여단, 킨들(Kindl) 소장의 제181보병여단을 보유했다. 제1군단은 에들러 폰 메첸세피(Edler von Mecenseffy) 중장의 제10보병사단, 루돌프 크라우스(Rudolf Krauss) 중장의 제34보병사단, 툰크(Tunk) 소장의 제43보병사단으로 이루어졌다. 제21군단은 엥글레르트(Englert) 소장의 카이저 보병사단과 네메체크(Nemeczek) 중장의 제44보병사단을 예하에 두었다.콘라트 참모총장과 오이겐 대공 대공은 아시아고 방면의 이탈리아 왕국군 전력이 약하다고 분석한 후 쥐트티롤에서 돌로미티 산맥을 통해 이탈리아군에 대한 공세를 계획했고, 이 작전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쾨베시의 제3군을 불러들인 것이었다.[21] 그리하여 제3군은 클라겐푸르트, 볼첸을 거쳐 트리엔트에 도착하였다. 이후 이탈리아 전선에서 복무를 시작한 지 한달이 넘은 4월 30일에 쾨베시는 뷔르템베르크 왕국으로부터 왕관 훈장 대십자를 받았고, 4월과 5월 사이에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은/금 임티아즈(Imtiaz) 메달을 수여받았다.
콘라트 참모총장은 그의 총괄 아래에서 빅토어 단클의 제11군과 쾨베시의 제3군을 합쳐서 오이겐 대공의 군집단으로 편성, 트렌티노 지역에서 이탈리아 왕국군을 공격해 베네토 평원으로 진출한다는 이른바 트렌티노 공세의 준비를 하고있었다. 기본적인 목표는 이손초강 일대에 가해지는 이탈리아 왕국군의 압박을 줄이는 것이었는데, 만약 작전이 매우 잘 풀려서 베네치아와 베로나까지 점령에 성공한다면 아예 이손초 일대의 이탈리아 왕국군을 포위섬멸 하는 것까지 생각해두고 있었다.[22] 이를 위해 콘라트는 3월부터 대규모 병력과 장비를 트렌티노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18,000톤의 군수물자, 280개 대대(약 30만 명), 1,447문의 포가 다른 전선에서 이동되었는데, 이는 이탈리아군의 20만 명, 850문의 포에 비해 우세한 전력이었다. 특히 38cm와 42cm 해군포 등 대구경 화포들을 배치하여 화력의 우위를 점하고자 했다. 하지만 적의 의심을 피하고 열악한 도로와 철도망을 활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대규모 이동은 쉽지 않았다.
쾨베시의 제3군은 제20군단과 협력하여 공세의 좌익을 담당했다. 북동쪽 방면인 수가나 계곡을 통해 보르고(Borgo) 시를 거쳐 아스티코(Astico) 계곡과 전략적으로 중요한 아시아고(Asiago)와 아르시에로(Arsiero) 도시들을 점령하고 브렌타(brenta) 계곡을 따라 최대한 깊숙이 진격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3월부터 4월까지 이어진 혹독한 겨울 날씨가 준비를 크게 방해했다. 고지대의 고개들은 눈에 덮여 있었고, 도로들은 눈사태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철도 운송이 제한되고 도로 교통이 방해를 받았으며, 야외에 노출된 보급품과 식량이 손상되는 일도 있었다. 이에 콘라트는 수천 명의 군인과 동원된 노무자들을 투입해 도로와 오솔길을 정비하고, 창고와 케이블카를 새로 건설하며, 병력을 위한 대피소를 준비하는 등의 작업을 진행한 뒤 공격 개시일을 5월 15일로 연기했다.
5월 14일, 콘라트의 공세 계획에 따라 제11군이 최초 포격을 개시했다. 이 포격은 하루 종일 지속되었고, 다음날 아침 양군이 전선 전체에 걸쳐 진격을 시작했다. 5월 15일 오전 6시, 1,500문의 포가 이탈리아군 진지에 대한 포격을 시작했고, 오전 9시부터는 융단폭격이 이어졌다. 이탈리아군의 요새들[23]은 대구경 박격포의 집중 포격으로 파괴되었다. 특히 쾨베시가 맡은 전선 구역에서는 초기에 큰 성과를 거두어 브렌타 강을 통제하는 아르멘타라(Armentara) 산맥과 이어서 5월 28일에는 아시아고까지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는 중앙 지역에 국한된 성과였다. 정작 쾨베시가 이끄는 제3군 주력은 발사이가나(Valsugana) 계곡과 오스페달레토(Ospedaletto) 방면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연락과 보급이 어려웠고, 오이겐 대공의 지시에 따라 포병의 전진 배치를 기다리며 신중하게 진격해야 했기 때문이다.
6월 4일 브루실로프 공세가 시작되어 부코비나 전선이 붕괴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다급히 동부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켜야 했고, 이로 인해 티롤 공세는 6월 16일에 중단되었다. 쾨베시의 부대들은 겨울진지(Winterstellung)선으로 철수하며 점령했던 지역의 일부를 포기해야 했다. 이탈리아군은 즉시 반격을 개시했는데, 피에트로 프루고니(Pietro Frugoni) 장군이 이끄는 이탈리아 제5군이 비첸차와 트레비소 사이 평원에 배치되어 5개 군단, 10개 사단, 약 180,000명의 예비대를 투입했다. 7월 27일까지 이어진 반격으로 이탈리아군은 잃었던 영토의 절반 정도를 회복했다.
애초 콘라트의 구상은 쾨베시의 제3군이 트렌티노-알토 아디제 지역의 발사이가나(Valsugana) 계곡에서, 단클의 제11군이 발라르사(Vallarsa) 계곡에서 진격해 이탈리아군을 포위하고 베네치아와 아드리아해로 직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클의 제11군은 서쪽 발라르사에서 주그나(Zugna) 산과 부올레(Buole) 고개의 강력한 저항에 막혔고, 쾨베시의 제3군도 발사이가나 계곡에서 진전이 더뎠다. 비록 쾨베시가 중앙의 제20군단과 함께 아시아고까지는 진출했지만, 결국 양 군 모두 작전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
이렇듯 티롤 공세에서 쾨베시는 콘라트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으며 주요 공격 부대를 이끌었지만, 제3군의 실패는 작전 전체의 실패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5월 15일부터 6월 15일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5,000명의 전사자, 23,000명의 부상자, 2,000명의 포로 등 총 30,000여 명의 손실을 입었다. 이는 쾨베시 개인의 능력 부족이라기보다는 독일군의 지원 부재, 험난한 지형, 불리한 기상 조건, 그리고 브루실로프 공세로 인한 급박한 병력 분산이 빚어낸 결과였다.
1916년 6월 4일 동부전선에서 개시된 브루실로프 공세의 즉각적인 성공으로 인해 콘라트는 이탈리아 전선의 티롤 공세를 중단해야만 했다. 당시 쾨베시가 지휘하던 제3군은 3월부터 티롤 공세를 위해 남서부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도 쾨베시의 공적은 인정받아 6월 19일 독일 기사단의 마리아너십자(Marianerkreuz) 목걸이 배지를 수여받았다. 이후 7월 말 그의 제3군은 동부전선으로 급파되어 독일 남부군(Südarmee)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7군 사이의 스트리파(Strypa) 전선에 배치되었다. 제3군은 독일 제국군 크라벨 군단(Korps Kraewel)의 제105사단, 제119사단의 증원을 받았으나, 8월 7일 치열한 러시아군의 공격에 심각한 손실을 입고 후퇴를 강요당했다. 당시 제3군은 러시아의 제9군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10월 중순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다행히도 독일군의 대응으로 인해 러시아군의 공세가 약화되면서 쾨베시의 부대는 잃었던 지역의 상당 부분을 탈환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쾨베시는 뛰어난 방어 전술과 적절한 시기의 반격으로 부대를 안정적으로 지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시기 쾨베시의 제3군은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었다.
- 폰 크레벨(von Kräwel) 중장 크레벨 독일집단
같은 시기, 카를 대공 휘하의 군집단이 마라마로스시게트(Máramarossziget)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예하의 제7군 사령관이었던 카를 폰 플란처발틴 제국상급대장은 러시아군의 공격능력을 과소평가하여 전선에 과도한 병력을 배치한 실책을 저질렀다. 그 결과 제7군은 벤니기 군단(Gruppe Benigni)이 전투능력을 상실하고 일부 사단은 3,000명 이하로 감소했으며, 러시아군에게 38,000명의 포로와 49문의 포를 빼앗기는 등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50km 후퇴하며 약 10만 명의 병력 손실이 발생했고 6월 18일 체르니프치, 29일에는 콜로메아를 상실하는 등 연이은 실패로 인해 플란처발틴은 9월 8일 독일 제국군의 요구로 제7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동부전선이 붕괴 위기에 처해있었고, 특히 헝가리 국경 지역이 러시아군과 새로이 참전한 루마니아군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카를 대공에게는 전장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쾨베시는 동부전선에서의 풍부한 전투 경험과 발칸전선에서의 성공적인 지휘 능력을 입증한 바 있던 장군이었다. 그의 능력은 동맹국들에게도 인정받아 9월 16일에는 불가리아 왕국으로부터 성 알렉산더 훈장 대십자(십자검 포함)를, 9월 30일에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대금 리아카트(Liakat) 메달과 철반월장(Iron Crescent)을 수여받았다. 카를 대공은 이러한 쾨베시의 군사적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이 위기 상황을 타개할 적임자로 판단했다. 따라서 10월 20일, 쾨베시는 카를 군집단 예하의 제7군 지휘권을 인수받았고, 기존 쾨베시가 지휘하던 제3군은 제7군 임시 사령관이었던 카를 폰 키르히바흐 기병대장이 인수하는 형태로 지휘관 교체가 이루어졌다. 당시 쾨베시가 인수한 제7군은 다음과 같이 편성되어 있었다.
- 후고 폰 하버만(Hugo von Habermann) 중장 제11군단
- 빅토어 폰 쇼이헨슈투엘 포병대장 제1군단
- 독일 카르파티아 군단(Deutsch Karpathen Korps)
- 주렌(Suren) 중장 제25독일예비군단
- 예비: 아돌프 폰 브루더만 중장 기병군단
제7군을 인수한 쾨베시는 카르파티아산맥의 루마니아 국경에서 러시아 제국군의 헝가리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전개했다. 러시아군은 루마니아를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공세를 계속했으나, 쾨베시의 군대는 주야로 이어지는 치열한 전투에서 이를 저지했다. 특히 카르파티아산맥의 주요 도로와 고개에서 러시아군이 끈질기게 공격을 시도했으나, 후고 폰 하버만(Hugo von Habermann)과 쇼이헨슈투엘 장군 휘하 부대들의 성공적인 방어로 러시아군은 최소 3만 명의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다. 왈라키아 평원에서 루마니아군이 결정적 패배를 당한 상황에서도 러시아군은 쾨베시의 부대를 상대로 성과를 얻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쾨베시는 브루실로프 공세 과정에서 상실했던 지역들을 상당 부분 탈환하는데 성공했으며, 이러한 전공을 인정받아 1916년 12월 10일 대군사공로훈장(Nagy Katonai Érdemérem)을 수여받았다.
2.3.4. 부코비나 수복작전
1917년 봄과 초여름, 쾨베시는 부코비나 수복작전을 준비했다. 이 시기에 기존 훈장들에 새로 제정된 '검'을 추가로 받았다. 1917년 7월 1일에 시작된 케렌스키 공세 동안, 쾨베시의 제7군은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의 러시아 제8군과 대치했다. 당시 제7군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루트비히 폰 파비니(Ludwig von Fabini) 중장의 제16군단 - 폰 도코날(von Dokonal) 소장의 제8기병사단, 폰 룩사르도(von Luxardo) 소장의 제34보병사단, 예서(Jeßer) 중장의 제30보병사단
- 리하르트 폰 콘타(Richard von Conta) 중장의 독일 카르파티아 군단 - 폰 너지(von Nagy) 소장의 제40혼베드보병사단, 파셴(Paschen) 소장의 제1독일보병사단, 뵈스(Böß) 중장의 제200독일보병사단
- 자무엘 아포르(Samuel Apór) 중장의 기병군단 - 제5혼베드기병사단, 폰 슈베르(von Schwer) 소장의 제6기병사단
- 클레투스 폰 피힐러(Kletus von Pichler) 중장의 집단군 - 폰 요니(von Jony) 소장의 제11혼베드기병사단, 제59보병사단
- 후고 폰 하버만(Hugo von Habermann) 중장의 제11군단 - 폰 벤케(von Benke) 소장의 제51혼베드보병사단, 그랄레르트(Grallert) 소장의 제74혼베드보병사단
- 알프레트 크라우스 집단군 - 자이델(Seydel) 소장의 제117독일보병사단(지원병력)
공세가 시작되자 쾨베시의 제7군은 러시아의 공격에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군 중앙과 좌익이 러시아군의 맹렬한 공격에 무너져 첫날에만 12마일(약 19km)이나 후퇴해야 했다. 테르스찬스키의 제3군도 더 심각한 타격을 입어 후퇴했는데, 이로 인해 쾨베시는 러시아 제8군에 의한 좌측방 포위 가능성을 우려해야 했다. 다행히 7월 19일부터 시작된 독일 남부군의 반격이 성공을 거두면서 코르닐로프는 전략적 후퇴를 결정했고, 이는 곧 러시아군의 패주로 이어졌다.
독일 남부군 덕분에 이들 부대는 카르파티아산맥의 고개들을 지켜냈고, 이후 반격으로 전환했다. 7월 19일부터 시작된 타르노폴 공세와 연계하여, 쾨베시의 제7군과 카를 크르지테크의 제3군은 공동으로 부코비나 지방의 수복을 진행했다. 7월 말까지 제3군의 카를 리츠만(Karl Litzmann) 집단군이 스타니슬라우와 나드보르나(Nadworna)를 탈환했고, 부코비나에서의 진격이 계속되었다. 쾨베시의 군대는 드라고이에사(Dragoiessa) 동쪽 고지대와 킴폴룽(Kimpolung) 북쪽 지역을 확보했고, 코마네스티에(Komanestie)에서는 헝가리 제101 보병연대(Bekestsaba)의 두드러진 활약으로 러시아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뛰어난 공격을 감행했다. 8월 3일에는 수도인 체르노비츠를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세 번째로 해방시켰다. 러시아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도시를 포기했고, 프루트강과 드네스트르강 사이에서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공격에 밀려 국경 쪽으로 후퇴했다. 러시아 제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새로운 제1군(제11, 23, 17군단)을 투입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공세를 막지 못하고 라다우츠-구라후모라(Radautz-Gurahumora) 선으로 후퇴를 강요당했다.
막대한 전공을 쌓은 쾨베시는 1917년 8월 5일, 제국원수에 진급하였다. 이는 콘라트에 이어 합스부르크 왕가 구성원이 아닌 인물로서는 두 번째로 이 계급에 오른 것이었다. 8월 6일에는 빌헬름 2세와 카를 1세가 체르노비츠에 방문하였고, 평의회의 심사끝에 8월 14일, 쾨베시에게 서훈을 수여하였다.
1917년 8월 6일 체르노비츠에 입성하는 카를 1세와 쾨베시, 이때 쾨베시는 전날 제국원수에 진급하였다. 다만 입성 당시까지는 제국상급대장 칼라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
원수봉을 들고 사진을 찍는 쾨베시, 제국원수 칼라장도 착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서훈 사유로는 "1915년 8월 제12군단장으로서 이반고로드 요새 점령, 그리고 군사령관으로서 1915년 10월부터 1916년 2월까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정복 및 북알바니아 점령 시 보여준 승리의 지휘력에 대해"였으며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의 2번째로 높은 등급인 지휘관십자(Kommandeur des Militär-Maria-Theresien-Ordens)를 수여받았다. 또한 같은 달 17일에는 헝가리 남작(Magyar bárói) 작위를 받았다. 이후 계속해서 제7군 사령관으로 복무하며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를 러시아군에 대비하며 부코비나 지역 방어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고, 1917년 12월 러시아와의 휴전 이후에도 쾨베시의 제7군은 평화조약 체결까지 기존 진지를 유지했다.
쾨베시 장군[24]이 1917년 8월 17일 슐로스 바르톨츠 궁전[25]에서 열린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역사상 180번째 수여식에서 아르츠 장군과 악수하는 모습. |
1918년 1월 16일, 콜로즈바르에서 쾨베시는 제7군[26]에 제1군을 합친 쾨베시 군집단(Heeresfront Kövess)의 사령관이 되어 도브루자에서 갈리치아까지 이어지는 광범위한 몰도바 전선을 담당하였다. 제7군은 부코비나와 산악 카르파티아 지역을, 제9군단과 제21군단을 휘하에 둔 제1군은 트란실바니아의 국경선 방어를 담당하였다. 1월 말경 쾨베시의 군대는 여러 지역에서 활발한 포격전을 벌이며 방어선을 유지했다. 3월에 들어서자 쾨베시는 제7군으로 부코비나에 속한 세레트-구라후모라-수차바 삼각지대를 점령하였다. 이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와 루마니아가 전쟁에서 이탈함에 따라 군집단은 1918년 4월 5일 해체되었고, 4월 15일에는 제1군과 제7군 사령부도 해산되었다. 이후 지역 안전 유지를 위해 크론슈타트의 에메리히 허드피 폰 리브노(Emmerich Hadfy von Livno) 제8군단이 새로운 제1군사령부로, 체르노비츠의 하버만 제11군단이 새로운 제7군사령부로 재편되었다.
2.3.5. 전쟁 말기와 그 이후
3월 26일, 쾨베시는 빈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성 슈테판 훈장 대십자(Szent István-rend nagykeresztje)와 2년 3개월 전에 수여받았던 독일 제국의 저명한 군사 훈장 푸르 르 메리트에다가 백엽을 추가로 수여받았다. 이후 1918년 5월, 잠시 현역에서 물러나 부인과 함께 알타우제(Altaussee)로 휴양을 떠났다. 9월 4일에는 몰타기사단 공로훈장 대십자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1일, 불가리아가 항복하고 협상국의 군대들이 세르비아로 진격하자 그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했다. 쾨베시는 새로 편성된 발칸 군집단(Heeresgruppe Balkan)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군집단은 폰 슈토이벤(von Steuben) 보병대장의 제11독일군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폰 하버만(von Habermann) 포병대장의 제11군단은 그라이너 폰 마돈나(Greiner von Madonna) 중장의 제9보병사단, 펠프스(Phelps) 소장의 제30보병사단, 폰 슈타압스(von Staabs) 중장의 제39독일예비군단을 지휘했다. 폰 투체크(von Tutschek) 소장이 이끄는 독일 알프스군단은 폰 코치(von Kotsch) 소장의 제219독일보병사단, 림부르크(Limbourg) 중장의 제53독일군단, 폰 갈비츠(von Gallwitz) 소장의 제217독일보병사단, 디트리히(Dietrich) 소장의 제6독일예비사단으로 구성되었다. 추가로 폰 피힐러(von Pichler) 중장의 제59보병사단과 루비엔스키(Lubienski) 소장의 제4기병사단이 군집단에 직할로 배속되어 있었다.그의 임무는 아드리아해에서 도나우강에 이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경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병력은 한참 부족한데다 장비와 보급 상태까지 열악했고, 협상국의 압도적인 병력과 제국의 내부 붕괴로 인해 이 임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런 암울한 상황속에서 10월 중순 협상국이 니시를 점령하니, 쾨베시는 각 부대들에게 도나우-사바-드리나 강 후방으로의 철수 명령을 내리며 어떻게든 방어선을 구축해보려 시도했으나 군사력 충분하지 않았고, 결국 병력 부재로 실패하였다. 전선이 붕괴되어 방어가 실질적으로 무의미해지자 발칸 군집단의 지휘권은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에게 인계하고 쾨베시는 티롤 군집단의 사령관이 되었지만, 여전히 발칸에 남아 책무를 수행중이었다.
1918년 10월 31일에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독립을 선언했고, 1918년 11월 3일, 빌라주스티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같은 날, 카를 1세 황제는 퇴위하기 직전 마지막 명령으로 쾨베시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의 총사령관(Armeeoberkommandant)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사실 이 임명에는 복잡한 이면이 숨어있었다. 군사 사학자 만프리트 라우헨슈타이너(Manfried Rauchensteiner, 1942-) 교수의 대표작 "쌍두독수리의 죽음"에 따르면, 빌라주스티 휴전 협정 전날인 11월 2일, 휴전 체결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던 카를 1세는 처음에 아르츠 참모총장에게 총사령관직을 제안했었다. 자세히는 11월 3일 새벽 3시에 '친애하는 아르츠 장군 남작. 내가 그대를 나의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 라는 자필 메모를 건네며 수락을 간청을 했는데, 카를 1세의 측근으로서 함께 주요 전략적 결정을 내리고, 제국의 주요 군사 정책 결정에 깊이 관여했던 아르츠는 이미 카를 1세의 의도와 상황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다. 휴전 체결 이후에도 제국 해체 과정에서의 법적 책임 문제가 남아있었는데, 여기에 휴전 조건 이행에 대한 책임까지 생각해 봤을 때 총사령관이 져야 할 정치적, 군사적 책임은 실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을 우려한 아르츠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카를 1세 황제는 발칸 군집단 사령관 쾨베시 제국원수를 후임자로 지명했다. 이때 쾨베시는 군집단 지휘권을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에게 넘겨야 했다.
그 날 아르츠가 "황제가 오늘, 11월 2일 쾨베시 원수를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쾨베시 총사령관이 바덴바이빈 최고사령부에 도착할 때까지 아르츠 제국상급대장이 직무를 대행한다"라며 일방적으로 쾨베시의 총사령관 임명을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쾨베시가 총사령관이 되었지만 정작 발칸전선에서 한창 작전 중이던 쾨베시는 자신의 총사령관 임명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즉, 카를 1세와 아르츠는 휴전 협정의 책임을 새로운 총사령관에게 이전하고, 날짜를 소급 적용하여 법적인 책임까지 회피를 하는 형태로 실제 협정은 아르츠가 처리하되 공식적 책임은 쾨베시가 진다는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속셈이며 허구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이 휴전과 그로 인해 발생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전선에서의 발효 시점 혼란으로 거의 절반에 가까운 야전군이 포로가 되었고, 나머지는 고향으로 퇴각했다.
당연하지만 쾨베시는 정책 결정보다는 야전 사령관으로서 주로 전술적인 임무를 수행하며 실제 전투 지휘에 집중했을 뿐 정치적 결정과는 상대적으로 거리가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왜 하필이면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느냐의 의문에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는데, 카를 1세와 아르츠가 단순히 쾨베시에게 책임을 회피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복잡한 정치-군사적 상황에서 현실적인 판단을 내린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쾨베시가 정책 결정자로서의 업무를 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정치적 논란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쾨베시가 일찍이 군사적 능력은 검증된 야전 사령관이다보니 군대 해체 과정을 실무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경험도 보유하고 있었다. 실제로 쾨베시는 후에 군대 해체와 병력 귀환이라는 실무적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그가 정치적 책임보다는 실무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적임자였음을 보여줬던 것을 생각하면 나름 일리있는 인사 선정이었다.
아무튼 이런 수뇌부에서의 결정을 알 리가 없는 쾨베시는 11월 7일이 되어서야 뒤늦게 본인의 총사령관 임명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제국의 마지막 시기에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야한다는 것을 인지한 상태였다.[27] 쾨베시는 아마도 이미 다가오는 제국군대의 자체 해체를 인식한 상태에서 이를 썼을 것이다.] 이미 제국이 해체된 시점에 헝가리 시민권자인 자신에게 있어서 이 총사령관 임명은 의미도 권한도 없었다. 거기다 더해 혼란스러운 후방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도 직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랬듯 황실에 충성스럽고 순종적이었던 쾨베시는 오직 황제에 대한 충성만으로 이를 군말없이 수락하였다. 소식을 들은 당일에 헝가리 보이보디나 어퍼틴(Apatin)에서 배를 타고 부다페스트를 거쳐 도나우 상류로 빈을 향해 출발했다. 부다페스트에서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에게 발칸군 지휘권을 넘긴 후 1918년 11월 8일에 빈으로 향했고, 11월 9일 늦은 밤에 빈에 도착, 그리고 11월 11일에 바덴바이빈에서 빈으로 이전한 최고사령부를 인수하고 12월 20일 해체될 때까지 이끌었다.
쾨베시의 주요 임무는 군 최고사령부(AOK)의 업무 종결을 관리하고, 군대 해체 과정을 감독하여 병사들의 본국 송환과 안전한 귀향 보장을 위한 지원도 조직하였다. 다만 신생 공화국 당국과의 갈등 조정도 맡아서 처리하였는데, 정치에 대한 감각이 없는 쾨베시로서는 갈등 조정에 한계가 있었던지라 새로운 공화국 정부 대표들과 지속적인 갈등 관계를 유지하는 난관에 봉착하였다. 한편으로는 빌라주스티 휴전 협정 체결 과정에서 이탈리아 왕국이 휴전 발효 시점에 대한 해석 차이를 이용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공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쾨베시는 이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며 역사적 선례를 들어 이탈리아의 행태를 비판했다. 특히 그는 1896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와의 동맹 조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발생했던 아도와 전투의 사례를 언급하며 "이탈리아는 늘 조약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습관이 있다"[28]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 발언이 아닌, 이탈리아의 외교적 관행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쾨베시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군대의 질서있는 해체와 병력의 안전한 귀환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냉정하게 대처했다. 12월 1일이 되자 실질적인 군사 지휘 기능은 종료되었고, 12월 3일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완전한 해체 작업이 완료되었다.
"Seine Exzellenz, den Herrn Feldmarschall von Kövess: Mit Beziehung auf die Rücksprache vom 17. Dezember beehre ich mich, Ihre Exzellenz davon in Kenntnis zu setzen, dass der Staatsrat in seiner Sitzung vom 16. Dezember festgestellt hat, dass nach deutsch-österreichischem Recht ein Armeeoberkommando nicht besteht und daher kein Funktionär den Titel eines Armeeoberkommandanten zu führen berechtigt ist. Die näheren Mitteilungen werden Eurer Exzellenz durch den Staatssekretär für Heerwesen zukommen. Der Staatskanzler, Dr. Karl Renner"
"쾨베시 야전원수 각하, 12월 17일 회담과 관련하여 12월 16일 국무회의에서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법에 따라 군 최고사령부가 존재하지 않으며 누구도 군 총사령관 직함을 사용할 자격이 없음을 확인했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국방장관을 통해 전달될 것입니다. 총리 카를 레너 박사."
1918년 12월 19일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 총리실의 이 무미건조한 서한이 쾨베시의 짧은 군 총사령관 재임을 특별할 것 없이 끝냈다.
12월 19일, 쾨베시는 공식적으로 지휘권을 반납하였고, 그 다음 날인 12월 20일을 기점으로 마침내 임기가 종료되며 최종적으로 총사령관 직책에서 물러났다. 마침내 쾨베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마지막 총사령관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로인해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총사령관 시절부터 상비군으로서 다민족 국가를 수호하고 결속시켜온 군대의 존재도 끝났다. 예를 들어 제8용기병연대는 그 기원을 1617년이나 1618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1600년부터 1918년까지 무려 295명의 야전원수(Feldmarschalle)가 황실군 장성 명단에 올랐다. 그런데 이제 이 모든 것이 단숨에 역사가 되어버렸다."쾨베시 야전원수 각하, 12월 17일 회담과 관련하여 12월 16일 국무회의에서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법에 따라 군 최고사령부가 존재하지 않으며 누구도 군 총사령관 직함을 사용할 자격이 없음을 확인했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국방장관을 통해 전달될 것입니다. 총리 카를 레너 박사."
1918년 12월 19일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 총리실의 이 무미건조한 서한이 쾨베시의 짧은 군 총사령관 재임을 특별할 것 없이 끝냈다.
2.4. 은퇴 후
1918년 말, 쾨베시는 공식적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비록 그가 마지막 총사령관으로서 업무들을 처리했다지만, 이탈리아와의 휴전에 관여한 인사들의 방대한 서신들을 살펴보면, 쾨베시에게는 이 협정의 내용과 체결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 아무튼 민간인으로 돌아간 그는 가족과 함께 부다페스트와 빈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를 오가며 검소한 환경에서 지냈다. 그런 와중에 쾨베시를 헝가리의 정치 상황에 개입시키려는 여러 차례의 시도가 있었다. 1919년 5월 초, 쿤 벨러(Kun Béla)의 공산주의 정권 시기에, 헝가리의 일부 군 장교들이 쾨베시에게 이에 대항하는 '백군' 운동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쾨베시는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와 함께, 자신의 헝가리어 실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거절했다. 또한 헝가리의 섭정 호르티 미클로시가 쾨베시를 헝가리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했던 시도도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카를 1세의 두 차례 복위 시도에 참여하라는 안톤 폰 레하르(Anton von Lehár) 대령의 초청도 거절했다.모든 정치적 참여를 거부한 쾨베시는 빈에 남아 군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기사단의 활동에 참여했으며,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퇴역 군인 모임에 자주 참석했다. 특히 군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 기사단의 단장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 직책은 1919년 이전 단장이었던 프리드리히 대공으로부터 인계받은 것이었다. 그렇게 헤르만 쾨베시 폰 쾨베슈하저 남작은 이 직책을 죽을때까지 수행하며 남은 여생을 보내다가 1924년 9월 22일, 70세의 나이로 빈에서 치명적인 뇌졸중으로 급작스레 사망했다. 그의 전우이자 친구였던 샨도르 수르머이 장군은 그의 사망 소식을 이렇게 받아들였다.
"Egyik legjobb barátomat vesztettem el az elhunytban. Körülbelül húsz évvel ezelőtt ismerkedtem meg vele, és azóta csak becsülni tudtam őt… Valósággal atyai szívvel bánt alárendeltjeivel, akik természetesen rajongtak érte. Az volt az elve, hogy minden egyes ember élete szent, s éppen ezért minden harci sikert a lehető legkisebb emberáldozattal kell elérni. Vakon bíztak benne katonái az utolsó szálig. Mert tudták, hogy az a helyes, amit a tábornagy parancsol s úgy helyes, ahogyan ö kívánja. Csodásán nagy volt a katonai tudása. Minden feladatot a kivételes elme biztosságával oldott meg. Egyik legjellemesebb és legderekabb fia volt hazájának, s minden magyar ember büszke lehet arra, hogy Kövess Hermann báró magyarnak született."
"내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을 잃었다. 약 20년 전에 그를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진정으로 부성애로 부하들을 대했고, 그들은 당연히 그를 열렬히 따랐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며, 따라서 모든 전투의 성공은 가능한 한 최소한의 인명 희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그의 병사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 그를 맹목적으로 신뢰했다. 원수가 명령하는 것이 옳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군사적 지식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다. 모든 임무를 탁월한 정신으로 해결했다. 그는 조국의 가장 성실하고 훌륭한 아들 중 한 명이었고, 모든 헝가리인은 쾨베스 헤르만 남작이 헝가리인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
샨도르 수르머이의 평가.
"내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을 잃었다. 약 20년 전에 그를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진정으로 부성애로 부하들을 대했고, 그들은 당연히 그를 열렬히 따랐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며, 따라서 모든 전투의 성공은 가능한 한 최소한의 인명 희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그의 병사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 그를 맹목적으로 신뢰했다. 원수가 명령하는 것이 옳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군사적 지식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다. 모든 임무를 탁월한 정신으로 해결했다. 그는 조국의 가장 성실하고 훌륭한 아들 중 한 명이었고, 모든 헝가리인은 쾨베스 헤르만 남작이 헝가리인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
샨도르 수르머이의 평가.
빈 슈바르첸베르크 광장(Schwarzenbergplatz) 군 장교 휴게소에서의 장엄한 빈소에 이어, 헝가리에서는 부다페스트에서의 국장이 당연한 수순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그의 시신은 1924년 9월 29일, 부다페스트로 이송되어 국가와 군대의 예우를 받으며 케레페시 공동묘지(Kerepesi temető)에 안장되었다. 그의 미망인 오이게니에 히예 폰 글루넥 남작부인(Eugenie Hye von Glunek, 1861-1941)은 1925년 남편의 유산에서 남편을 묘사한 초상 메달을 빈의 군사역사박물관(Heeresgeschichtliches Museum)에 기증했다. 이후 오이게니에 히예 폰 글루넥 남작부인은 남편과 사별한 후 17년을 더 살았으며, 1941년에 사망했다. 쾨베시 사후 20여년이 지난 1956년 당시 쾨베시의 차남이자 빈의 군사역사박물관 임시 관장을 역임했었던 게저(Géza)는 "오스트리아나 헝가리에는 영광스러운 원수를 기리는 기념비, 거리, 광장, 기념패가 어느 것 하나도 없다. 부다페스트의 무덤은 황폐해졌다. 라이타강 양쪽에서 가르치는 역사, 역사책들은 쾨베시의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29] 라며 그의 아버지에 대한 전기가 출판되지 않는 것에 한탄했다. 그렇게 쾨베시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점점 잊혀지는가 싶었지만, 게저 사후 34년이 지나서야 쾨베시의 묘소는 2001년 국립유산연구소(Nemzeti Örökség Intézete)에 의해 헝가리의 국가 보호 국립묘지로 지정되었고, 2010년에는 드디어 'Des Kaisers Prinz Eugen?'라는 이름의 쾨베시의 전기가 출판되었다.
3. 평가
Er fiel durch sein gegen alle Vorschriften glattrasiertes Gesicht auf, das von einem dichten Haarschopf gekrönt war. Als er - ehemals Genist (Angehöriger der Genietruppe, der Pioniere; Anm.) - zum Inspizierenden der Tiroler Befestigungen ernannt wurde, war das für ihn, der schon seinerzeit bei der ‚Erzengelprüfung‘ in den Generalstab durchgefallen war, ein Signum abeundi (lat.; ein Signal zu resignieren; Anm.). Er hielt aber tapfer durch und bekam schließlich das Hermannstädter Korps (XII. Korps; Anm.). Hier sollte er bei den schon berühmten Kaisermanövern 1912 ‚abgeschossen‘ werden, er kam aber mit einem blauen Auge davon. Im Sommer 1914 winkte neuerlich der ‚blaue Brief‘ mit der Pensionierung. Da brach der Krieg aus. Wohl wurde der rangjüngere General von Böhm-Ermolli sein Armeeführer. Aber er würgte den Groll hinunter und überstand alle Klippen der ersten Schlachten. Schließlich stieg er 1915 doch zum Armeeführer (der 3. und dann der 7. Armee; Anm.) auf, wurde Eroberer von Belgrad, behauptete sich auch weiter, während rechts und links von ihm jüngere Armeekommandanten vom Schicksal weggefegt wurden. ..."
"그는 모든 규정을 어기고 깨끗이 면도한 얼굴로 눈에 띄었는데[30], 이는 짙은 머리카락에 의해 강조되었다. 한때 공병대 출신이었던 그가 티롤 요새 감독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이미 '대천사 가브리엘 시험'에서 참모로의 승진에 실패했던 그에게는 물러날 신호였다. 그러나 그는 용감하게 견뎌내어 마침내 헤르만슈타트 군단을 맡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1912년 유명한 황제 기동훈련에서 제1군에 패할 뻔했지만 모면했다. 1914년 여름, 퇴역 통지서가 다시 한 번 그를 위협했다. 그때 전쟁이 발발했다. 뵘에르몰리 장군이 그의 군사령관이 되었음에도 그는 분개심을 삭이고 초반 전투의 모든 위기를 견뎌냈다. 결국 1915년 제3군 사령관, 후에 제7군 사령관으로 승진했고, 베오그라드 점령의 영웅이 되었으며, 좌우에서 그보다 나이 어린 군사령관들이 운명에 휩쓸려갈 때에도 살아남았다."
슈슈니크 내각의 장관을 지냈던 前 오스트리아 부총리 에드문트 글라이제 폰 호르스테나우(Edmund Glaise-Horstenau, 1882-1946)의 회고록. 에드문트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AOK의 참모장교였다.
"그는 모든 규정을 어기고 깨끗이 면도한 얼굴로 눈에 띄었는데[30], 이는 짙은 머리카락에 의해 강조되었다. 한때 공병대 출신이었던 그가 티롤 요새 감독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이미 '대천사 가브리엘 시험'에서 참모로의 승진에 실패했던 그에게는 물러날 신호였다. 그러나 그는 용감하게 견뎌내어 마침내 헤르만슈타트 군단을 맡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1912년 유명한 황제 기동훈련에서 제1군에 패할 뻔했지만 모면했다. 1914년 여름, 퇴역 통지서가 다시 한 번 그를 위협했다. 그때 전쟁이 발발했다. 뵘에르몰리 장군이 그의 군사령관이 되었음에도 그는 분개심을 삭이고 초반 전투의 모든 위기를 견뎌냈다. 결국 1915년 제3군 사령관, 후에 제7군 사령관으로 승진했고, 베오그라드 점령의 영웅이 되었으며, 좌우에서 그보다 나이 어린 군사령관들이 운명에 휩쓸려갈 때에도 살아남았다."
슈슈니크 내각의 장관을 지냈던 前 오스트리아 부총리 에드문트 글라이제 폰 호르스테나우(Edmund Glaise-Horstenau, 1882-1946)의 회고록. 에드문트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AOK의 참모장교였다.
조국 내에선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편이었다. 쾨베시가 군단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을 일찍이 눈여겨본 오이겐 대공의 눈에 띄었던 덕이었고, 쾨베시의 상관인 콘라트가 트렌티노 공세를 기획할 당시에 쾨베시의 사단을 콕 집어 배치한 것도 쾨베시가 발칸반도에서 전공을 세우긴 했지만, 이미 10년전부터 그의 군재를 알고 있었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 물론 그 외에도 쾨베시를 높게 평가하는 장성도 많았던 만큼 쾨베시를 시기하는 장성 또한 많기도 했다. 그래도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카를 1세의 신뢰까지 산 것을 보면 그런 시기와 질투들이 그의 성공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다만 동맹국인 독일 제국군 사령관들 사이에서는 쾨베시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편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부정적인 평가보다는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에 기우는 편이다. 주로 비판하는 쪽의 경우, 한스 폰 젝트 독일 국가방위군 상급대장은 쾨베시에 대해 "일반적이고 군사적으로 고도로 훈련된 병사이며 좋고 사랑스러운 태도를 지녔다. 신체적으로 상당히 건강하다. 그러나 진취성이 부족하고 어려운 상황에 쉽게 당황한다. 철저한 비관론자이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전역에서 얻은 야전 명성과 군사령관으로서의 위엄을 유지하는데 골몰한다. 따라서 대하기가 쉽지 않고 쉽게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31]라고 평가했다. 반면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독일 야전원수는 "쾨베시는 나에게 오스트리아의 새로운 오이겐 대공이자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국민적인 장군이었다. 라우돈, 카를 대공, 라데츠키는 야전 지휘관으로서 더 중요했을 수 있다. 그러나 쾨베시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내가 평가한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군들 중 가장 유능했으며 동시에 인간적으로도 매우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32]라고 회고했다.
쾨베시는 분명 제1차 세계 대전을 대표하는 명장이자 덕장이었다. 정치적 고려보다 군사적 실무에 충실한 지휘관이었으며, 부하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겼다. 특히 1915년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와 1917년 케렌스키 공세 시기에 이러한 특성이 잘 드러났다. 그는 복잡한 정치적 갈등이 있던 티롤 공세 시기에도 자신의 임무에만 집중하며 제3군을 지휘했고, 당시 빅토어 단클과 알프레트 크라우스사이의 갈등이나 카를 대공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에 휘말리지 않았다. 덧붙여 한 가지, 당시에도 다언어 구사 능력은 가치있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쾨베시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꽤 잘했고 헝가리어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했으며 이탈리아어와 러시아어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았다.
그리고 전술적, 작전적 측면에서도 제국군의 현대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교육과 장비의 개선 역시 그에게 늘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럼에도 그는 제12군단장으로서 동부전선 초기 전투에서 군 수뇌부의 실수와 오판을 뼈저리게 느꼈고 여러 차례 열세한 병력으로 러시아의 수적 우세에 맞서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쾨베시는 결국 동부전선에서의 방어전과 반격전, 발칸전선에서의 공세작전 등에서 뛰어난 전술적 능력을 보여줬다.[33] 러시아 제국군이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 당시 패퇴하는 과정에서 쾨베시는 이반고로드에서 대승을 거두며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고, 이를 기점으로 이반고로드 요새 점령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1915년 10월 베오그라드 점령으로 마침내 세르비아까지 정복하였다. 이후 쾨베시는 1916년 1월 사라예보로 옮겨 몬테네그로 원정을 지휘했는데, 제3군의 전투 과정에서 그가 장군으로서의 명성으로 가는 첫 단계는 험난한 지형과 기상조건에도 불구하고 1월 11일 제3군 소속 제47보병사단이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로브첸 산 점령 작전이었다.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 정복 후에 쾨베시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자필 편지"로 제국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와 함께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닌 인사 중 이 계급에 오른 유일한 군 사령관이었다.
그리고 쾨베시는 1916년 5월 콘라트의 "트렌티노 공세"에 참여해 베네치아 저지대와 포 평원을 공격했으나, 뜻밖에도 6월 동부전선에서 브루실로프 공세가 시작되었고, 결국 그에게 익숙한 전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쾨베시는 자신의 전투 구역 상황을 판단한 결과 약한 병력으로는 버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임을 요청했지만, 당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후계자였던 카를 대공 군집단 사령관 카를 대공이 능력있는 지휘관이 간절했기 때문에 쾨베시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대신 그가 뵘에르몰리보다 선임인 점을 고려하여 쾨베시를 제7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는데, 1917년 8월 초, 쾨베시 휘하 제7군이 러시아의 케렌스키 공세를 저지하고 체르노비츠를 포함한 부코비나 대부분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면서 카를 대공의 안몫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주며, 쾨베시가 공격 전술 말고도 방어전 운용에도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
이후 1918년 1월 중순부터 쾨베시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부쿠레슈티 조약 이후 4월 초에 해체되기 까지 트란실바니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군집단을 지휘하기도 했으며, 5개월의 공백 기간을 가지다가 1918년 10월 초 그는 베오그라드에서 새로 창설된 군집단의 사령관직을 맡았는데, 이 군집단은 군 최고사령부 직속이었다. 쾨베시가 참모부 출신이 아닌 점을 생각한다면 이는 파격적인 인사 조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다소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어쨌든 쾨베시가 이루어낸 업적과 그의 인성이 큰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능력과 경험을 인정받아 군 최고 정점인 총사령관의 자리에 앉은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을 수 있다.
제국 최후의 총사령관으로서 제국 해체기의 혼란 속에서 보여준 그의 위기관리 능력 또한 주목할 만하다. 제국 해체 과정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를 실시했다. 특히 부대 해산 과정에서 부대 해산 관리와 군사 자산 관리를 통해 무질서와 장비 유출을 방지하는데 주력했다. 또한 제국 해체로 인한 병력의 혼란을 방지하고 질서 있는 귀향을 보장하기 위한 종합적인 관리 체계를 구축했다. 귀향 증명서 발급과 이동 중 식량과 숙소 제공, 의료 지원으로 신변 안전 보장으로서의 조치를 취했고, 개인 기록의 정리 및 보관 및 미지급 급여의 정산, 제대 증명서 발급 등의 행정 지원과 수송체계 구축으로 체계를 잡고 단계적 제대 시행을 통한 질서 있는 귀향을 마련하였다. 또한 신생국과의 관계 관리에도 노력했는데, 갈등 관계는 여전했지만 어쨌든 제국의 해체로 인해 탄생한 신생국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군사적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한 다양한 외교적, 군사적 조치를 실행하며 치안 유지 대책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쾨베시의 체계적인 위기관리는 제국 해체기의 혼란을 최소화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이는 그의 뛰어난 행정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특히 군대 해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무질서와 폭력을 효과적으로 방지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이렇게 제국 군사 전통의 마지막 상징으로 남은 만큼 쾨베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유일한 루터교도 원수이자 최후의 총사령관으로서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군사적 경력으로는 공병 장교에서 시작해 원수까지 오른 입지전적 경력, 다양한 전선에서의 풍부한 전투 경험과 뛰어난 군사적 성과를 남겼으며, 제국 최후의 순간까지 군의 기강을 유지했다. 또한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고 최대한 정치에 거리를 뒀으며, 부하들에 대한 책임감과 실무에 충실한 지휘 스타일로 지휘관으로서의 품격도 잘보여주었다. 때문에 혼란기 속에 안정적인 군 지휘 능력과 실무에 충실한 전문성, 제국 해체기의 질서있는 관리 능력 등 긍정적인 평가가 주를 이르겠지만 전략적 판단보다는 전술적 실행에 치중했고, 제국 해체를 막을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 부족했으며, 독일 제국군과의 협력 작전시 부차적 역할에 그쳤다는 점에서 그의 한계를 보여주었다.[34] 다만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유능하지만 눈에 띄지 않아서 은퇴를 앞두고 있었던 인물이었기에 제1차 세계 대전이 없었다면 그가 이렇게 명성을 떨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조국을 나락으로 보낸 이 전쟁의 소용돌이가 아이러니하게도 쾨베시 본인한테는 출세의 발판이 된 셈이었다.
어쨌든 이러한 쾨베시의 행적은 제국 말기의 복잡한 정치-군사적 상황 속에서 군인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던 직업군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개인적 배경으로는 헝가리계와 트란실바니아 작센계 출신으로 제국의 다민족적 성격을 대표하고, 제국 군 최고위직에 오른 유일한 루터교도이며, 독일어권 문화에서 성장했으나 제국의 다언어적 특성을 수용했다. 그래서인지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모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군인이다. 독일은 그의 공적을 인정해 푸르 르 메리트 훈장과 백엽을 수여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도 오스트리아 제국 최고 등급 훈장인 마리아 테레지아 지휘관십자와, 헝가리 왕국 최고 등급 훈장인 성 이슈트판 대십자 등 세 나라에서 최고 훈장들을 수여했다.[35] 특히 헝가리의 경우, 쾨베시 사후 77년이 지난 2001년에 그의 묘소를 국가 보호 묘지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렇듯 그의 평가를 정리하자면 그가 지닌 실무적이고 안정적인 지휘 스타일이 혼란한 시기에 군의 기본적인 기능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제국의 마지막을 품위있게 마무리한 군사 지도자로 여러 나라에서 좋게 평가받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에 대한 연구는 부실한 편이라 21세기에 접어들어서야 쾨베시의 전기가 출판되었다.
4. 가족 관계
1892년 가을, 그문덴(Gmunden)에서 오이게니에 히예 폰 글루넥 남작부인과 결혼했다. 그녀는 잘 알려진 변호사이자 법무장관이었던 안톤 히예 폰 글루넥 남작(Anton Hye von Glunek)의 재혼으로 태어난 막내딸이었다. 쾨베시 부부는 금슬이 좋았고, 그들 사이에서 3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특이한 점은 장남과 3남은 헝가리식과 독일식 이름을 지어준 반면, 차남만 헝가리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벨러/아달베르트(Béla/Adalbert, 1893-1914)
- 게저(Géza, 1896-1977)
- 예뇌/오이겐(Jenő/Eugen, 1898-1929)
장남 벨러/아달베르트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동부전선 개전 초기에 황립 및 왕립 카이저경보병연대 소속 소위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비극을 겪었는데, 당시 벨러/아달베르트 말고도 많은 장성들의 자식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콘라트 제국원수, 허저이 제국상급대장, 플란처발틴 제국상급대장이 있다.
차남 게저와 3남 예뇌/오이겐도 전쟁 중에 포병장교로 복무했고, 이들은 다행히 살아남아 전후에 각각 군사학자, 담배도매상이 되었다. 게저는 1950년에 빈에 소재한 군사역사박물관의 임시관장을 역임하면서 나름 장수했지만, 예뇌/오이겐은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코카인 파티를 벌이다 사망하였다. 게저의 경우 학자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반면, 막내 예뇌는 1920년대 부다페스트의 상류층 마약 문화에 빠져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셈이었다.
5. 여담
훗날 헝가리의 일부 군 장교들이 '백군' 운동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가 거절한 일화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쾨베시는 독일어, 헝가리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등 2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했으나, 주로 구사하는 언어는 독일어였고, 헝가리어는 주로 공식 업무에서만 사용했다. 이것으로 인해 헝가리 후배 장교들의 요청을 거절한 일화가 단순한 표면상의 핑계가 아닌, 정말로 헝가리어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차남 게저의 회고에 따르면 쾨베시는 제국이 멸망한 1918년부터 그가 사망한 1924년까지도 항상 그래왔듯이 황제에 충실한 황실 충성파(schwarz-gelb) k.u.k. 장교였으며, 오스트리아인이자 동시에 헝가리인으로서 1918년에 침몰하고 분할된 전체 합스부르크 제국을 조국으로 여겼다고 한다. 앞서 말한 헝가리 후배 장교들의 요청을 거절할 때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든 것은, 그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 했으며 이중 정체성을 가졌기에 제국의 해체 이후에도 특정 후계 국가에 편향되지 않으려 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한 강한 충성심과 군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확고했기에 그가 헝가리의 새로운 정치 움직임 참여를 거부했음을 알 수 있다.[1]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라면 '폰쾨베슈하저'로 표기하겠지만 쾨베시랑 쾨베슈하저는 헝가리어 인명이라 해당되지 않는다.[2] 독일어 발음기호와 헝가리어 발음기호가 섞어서 사용된다 따라서 {ˈhɛʁman køvɛʃː fɔn køvɛʃːhaːzɒ}로 발음[3] {køvɛʃːhaːzi køvɛʃː ˈhɛʁman}[4] 쾨베시가 제국원수에 진급하여 원수 칼라장을 단 후에 그린 초상화들인데 첫 번째는 마리아 테레지아 지휘관십자 메달을 메고 있고, 두 번째는 푸르 르 메리트 메달을 메고 있다. 이 둘은 각각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최고 등급 훈장이다.[5] 일반적으로 알려진 제국원수와는 좀 다른 개념의 계급이다. 자세한 사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국원수 항목 참조.[6] 오스트리아 국방부의 공식 매거진 TRUPPENDIENST 2008년 6월호 내용, 참고 자료1, 참고 자료2[7] 켐펠렌 벨러(Kempelen Béla)의 헝가리 귀족가문 사전(Magyar nemes családok)에 따르면 쾨베시 가문의 한 분파가 18세기에 오스트리아(Ausztria)로 이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오스트리아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인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독일어권 세습영지들을 가리키는 것인지 확실하진 않다.[8] 헝가리어에서 -háza는 "~의 집" 이란 의미의 명사형이고 -házi는 거기에서 파생된 형용사형이기 때문에 Kövessháza 출신은 Kövessházi라고 읽는다. 따라서 독일식으로 Kövessházi를 바꾸려면 ~출신의에 해당하는 Von을 Kövessháza 앞에 붙여야하는게 맞다.[9] 참고로 훗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마지막 일반참모총장을 역임하게 되는 아르투어 아르츠 폰 슈트라우센부르크 제국상급대장도 트란실바니아 작센 출신으로, 요한나 레지나 스터징과 조상이 같은 먼 친척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녀의 아들인 헤르만 쾨베시 또한 아르투어 아르츠와는 서로 먼 친척에 해당되는데, 이 둘은 제국의 마지막 시기에 총사령관이나 참모총장과 같은 군부의 최고위 직책을 맡았다는 공통점이 있다.[10] 따라서 그는 참모부에 들어가지 못하고 부대로 복귀해야 했으며 이후 연대장, 여단장, 사단장으로 근무했다. 그의 경력이 그가 열망하던 정점에 도달하는 데에는 제1차 세계 대전까지 기다려야 했다.[11] 때문에 훗날 쾨베시가 제국원수의 자리에 올랐을 때, 최초이자 최후의 非 가톨릭 원수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12] 산악인 클럽[13] 오스트리아에서 가톨릭을 떠나 개신교로 개종하는 운동[14] 제2군 대부분의 병력은 세르비아 전선에 있었다.[15] 現 우크라이나 바부히우(Babukhiv/Бабухів)[16] 現 우크라이나 호로도크(Horodok/Городок)[17] 現 우크라이나 베레시치차(Vereshshytsia)[18] 독일어 이름으로는 아달베르트(Adalbert).[19] 이는 단순한 감정적 비판이 아니었다. 보급열차 소실로 인한 물자 손실은 이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작전 수행에 지속적인 어려움을 초래했다.[20] 레저(Lezhë)[21] 또한 이는 콘라트와 쾨베시, 그리고 제11군 사령관 단클이 예전부터 각별한 관계였던 것에 기인한다. 1906년 이전 콘라트가 제8보병사단을 이끌 당시, 쾨베시와 단클은 그의 휘하에서 여단장을 맡았던 인연이 있었다.[22] 이 정도로 작전이 확대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측에서는 독일 제국에게 병력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독일 역시 베르됭 전투를 준비 중이었기에 거절했다.[23] 포르테 캄폴롱고(Forte Campolongo), 포르테 캄포몰론(Forte Campomolon), 포르테 몬테베레나(Forte Monte Verena) 등[24] 오른쪽에서 네 번째[25] 오스트리아 하에루스도르프(Hirtenberg)에 위치함[26] 제3군은 이미 통합된 상태[27] 쾨베시가 1918년 11월 초에 남긴 메모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1918년 11월 5일, 내가 빈으로 가서 신속히 군 총사령관직을 인수하라는 최고사령부(AOK)의 명령이 도착했다. 이 명령은 이미 1918년 11월 3일 내게 발송되었으나 11월 5일에야 나에게 도달했다."[28] The Italians are always mistranslating treaties to their benefit[29] "Kein Denkmal, keine Straße, kein Platz, keine Gedenktafel erinnert in Österreich oder in Ungarn an den ruhmreichen Feldmarschall. Das Grab in Budapest ist im Verfalle. Die Geschichte, die gelehrt wird, und die Geschichtsbücher diesseits und jenseits der Leitha, erwähnen den Namen Kövess kaum."[30] 앞서 말했듯 헤르만 쾨베시는 일반적으로 다른 동료 장성들과는 다르게 콧수염을 기르지 않았다. 이는 앞서 말했던 건선 질환 때문에 주기적으로 면도를 해야했기 때문.[31] ein allgemein und militärisch sehr gebildeter Soldat von guten liebenswürdigen Formen; körperlich leidlich frisch. Wenig initiativ und leicht in schwierigen Lagen außer Fassung. Ausgesprochen schwarzseherisch und sehr besorgt um Erhaltung des leicht erworbenen Feldherrenruhmes (Serbien, Montenegro) und seiner Würde als Armeekommandant; daher nicht leicht zu behandeln und schnell verletzt.[32] "Kövess war für mich Österreichs neuer Prinz Eugen, Österreichs volkstümlichster General. Laudon, Erzherzog Karl und Radetzky mögen als Feldherren bedeutender gewesen sein. Kövess war jedenfalls von allen Generalen der k.u.k. Wehrmacht, über die ich im Weltkriege ein Urteil gewann, der tüchtigste und zugleich als Mensch mir höchst sympathisch. ..."[33] 콘라트의 전략이 실제로 성공한 사례들 대부분이 쾨베시의 야전 아래에서 진행되었다.[34] 그러한 점에서 쾨베시는 콘라트와 죽이 잘 맞았다.[35] 이 세 훈장을 모두 받은 사람은 쾨베시 외에 콘라트, 뵘에르몰리, 린징겐, 아르츠 이 4명 말고는 없다. 그나마 보로예비치나 단클도 이 3가지의 훈장을 수여받긴 했으나, 백엽은 수여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