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그리고 푸할스키는 1887년에 소위로 임관하여 제10보병연대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1890년에는 중위, 1896년에는 대위로 진급하여 군사철도국에서 근무했다. 1903년 소령으로 제45국토방위보병사단 참모장이 되었고, 1910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1911년에는 크라쿠프의 제20보병연대장이 되었는데, 이 연대는 당시 병력의 80%가 폴란드계였다.
푸할스키는 파울 케스트르자네크중장 휘하의 제12사단 예하의 연대를 이끌고 제1군의 예비대로서 크라시니크 지역에서 러시아 제국군과 교전했다. 이후 제24보병여단장이 되어 1914년 10월 비스와강 북안으로 이동, 제1군단 예하에서 비스와강 전투에 참가했다. 1916년 2월부터 11월까지는 폴란드 군단을 지휘했는데, 이 부대는 하우어 군단에 배속되어 브루실로프 공세 당시 제4군 예하에서 볼히니아에서 전투를 벌였다. 1917년 2월부터는 제12보병사단장이 되어 카르파티아산맥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5월 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했다. 이후 푸할스키는 1917년 8월부터는 제23군단 예하에서 이손초강 남부전선을 지켰다. 1917년 11월 1일 중장으로 진급했고, 1918년 6월에는 제2차 피아베강 전투에 참가했다. 전쟁 말미인 1918년 9월에는 프셰미실 군관구사령관이 되었다.
전쟁 후 1919년 3월 18일 폴란드군에 입대했다. 참모보좌관 과정을 지도했고, 1919년 6월 10일부터 1920년 7월 10일까지는 참모대학 교장을 지냈다. 이후 국방부에서 근무하다가 1921년 3월 1일 자진하여 예비역으로 전역했다. 1923년 10월 23일 스타니스와프 보이체호프스키 대통령에 의해 1919년 6월 1일자로 소급 적용되어 소장 계급을 받았다. 이후 푸할스키는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31년 1월 16일 바르샤바에서 사망했다. 그는 루이지나 헤흐스만 폰 호흐잠(Luigina Hächsman von Hochsam)과 결혼했으며, 에디타(Edyta, 1904~?) 딸 하나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