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상급대장,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윗 첨자 † : 전사 ※ 윗 첨자 ok : 총사령관(Oberkommandierender) ※ 윗 첨자 s : 총사령관 대리(Stellvertreter) ※ 윗 첨자 c : 참모총장(Chef des Generalstabes) ※ 윗 첨자 m : 전쟁성 장관(Kriegsminister)
실레지아 크르노프(Krnov) 지역 출신 귀족 가문으로, 1879년 귀족 작위를 받은 재무고문관 요한 네포무크 게르스텐베르거(Johann Nepomuk Gerstenberger, 1811-1900)의 막내아들이다. 게르스텐베르거는 비너노이슈타트의 테레지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79년 파르두비츠의 제5후사르연대 소위로 임관했다.
1882년부터 1884년까지 빈의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에서 수학했고, 1884년 중위 진급과 함께 참모장교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쾨세그에서 제5후사르연대에서 복무하며 1892년 대위로 진급했다. 1893년 작센의 알브레히트 훈장 기사십자를 받았다. 1895년부터 헤르만슈타트의 제12군단 참모장교로 있다가 1896년 소령으로 진급했다. 이후 1900년까지 야로스와프(Jarosław)의 기병사단 참모장을 지냈고, 다시 제5후사르연대로 돌아가 노이지들 암 제(Neusiedl am See)와 프레스부르크에서 근무했다. 1899년 중령으로 진급해 연대 부사령관이 되었다.
1902년 대령이 되어 1903년부터 1908년까지 렘베르크의 제11군단 참모장이 되었고, 1906년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사자태양 훈장 2등급을 받았다. 1907년 '폰 게르스트베르크' 귀족 칭호를 추가로 받았다. 1908-1909년 테르노필의 제15기병여단장을 지냈고 1909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어서 프레스부르크의 제16기병여단장이 되었다. 1912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아그람의 제36보병사단장이 되었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1년만에 잠시 현역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카샤우의 제27보병사단장으로 복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 게르스텐베르거는 제27보병사단을 이끌고 동부전선에 투입되어 갈리치아 전투에 참전했으나 1914년 9월 부상을 입어 빈의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12월 1일부로 예편했으나 이듬해에 다시 소환되어 1915년 11월부터 종전까지 프레스부르크 군관구사령관을 지냈다. 1917년 8월 11일 기병대장 칭호를 받았다. 제국 붕괴 후 빈에서 은거하다가 1920년 12월 14일 사망했다.
1886년 빈에서 재무관청 관리 막시밀리안 겜멜(Maximilian Gemmel) 남작의 딸 클레멘티나(Klementina, 1866년생)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형제로는 군 총감사관을 지낸 카를 테오도르(Karl Theodor, 1853-1922)와 대공오이겐 대공의 브룬탈(Bruntál) 성 도서관장을 지낸 요한 네포무크(Johann Nepomuk, 1852-1934)가 있었다.
[1] 1883년 기사 작위와 '폰 라이히세크' 칭호를, 1907년 '폰 게르스트베르크' 칭호를 추가로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