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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07:08:09

가브릴로 프린치프

가브릴로 프린치프
Gavrilo Princip | Гаврило Принцип
파일:Gavrilo Princip(colourised).png
형무소에서 찍은 그의 사진 (컬러 복원)
<colbgcolor=#00001b> 출생 1894년 7월 2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오블랴이(Obljaj)
(現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제10주 보산스코그라호보)
사망 1918년 4월 28일 (향년 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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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40kg[1]
묘지 사라예보 Vidovdan Heroes Chapel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사라예보 사건2.3. 최후
3. 사후 및 평가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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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세르비아 민족주의 활동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시작인 사라예보 사건의 주범이다. 사라예보 사건 직후 곧바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당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사형을 면하고 징역 20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자신이 벌인 일이 세계 대전을 일으켜 수백만 명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책임은 부정했다. 그는 전쟁으로 가족과 지인들을 잃은 주변인들로부터 오는 비난과 폭행에 크게 상심하다 1918년 교도소 복역 중 건강 악화로 인해 향년 2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 생애

2.1. 유년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시골인 오블랴이(Obljaj)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페타르(Petar)와 어머니 마리야(Marija)는 세르비아계의 가난한 농부들로, 아버지는 작은 땅뙈기만으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었기 때문에 우편부 일을 겸업했다고 한다. 프린치프는 보스니아에 거주하던 세르비아인일 뿐 세르비아 국적은 가지고 있지 않았고 법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민이었다. 아들을 양치기로 키우려는 아버지의 의도와는 다르게 프린치프는 1903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창시절 그는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13살 때 사라예보로 간 프린치프는 남슬라브 민족주의 운동[2]청년 보스니아[3] 운동에 참여하고 시위에 참여했다가 다니던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학업을 지속하려 했던 그는 “단결 혹은 죽음”을 이야기했던 극단주의 단체 검은 손에 가입하였다.

2.2. 사라예보 사건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계와 헝가리계 민족이 1등 국민, 그 외는 2등 국민이나 다름없는 불평등한 구조였으며 이에 따른 다양한 민족 문제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당시 고위층으로써는 보기 드문 개혁적, 진보적 성향의 인물인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국가 분열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제국 내 여러 민족에게 광범위한 주권을 부여하여 독일계와 헝가리계 민족과 동등한 대우를 보장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으로, 개혁을 통해 민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불평등한 국가 구조를 혁신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남슬라브계 민족을 규합하여 자국에 포함시키려 했던 세르비아 왕국 입장에선 치명적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민족의 평등을 보장한다면 슬라브계 민족이 제국에 우호적으로 돌아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합과 독립을 부르짖던 세르비아의 강경 민족주의자들은 페르디난트를 제거하려 하였고[4]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가입한 '청년 보스니아'와 이를 후원한 '검은 손' 역시 그러한 극단적 민족주의 단체였다.

그리고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세르비아의 기념일인 6월 28일에 군사 훈련에 참관하기 위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기로 하자 이들은 이 날 황태자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결국 프란츠 황태자에게는 악운에 악운이 겹쳐 그 계획이 성공함으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의 방아쇠인 사라예보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의 행동은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까지 유럽의 모든 황제국, 무려 네 개의 제국을 멸망시키는 결과를 야기했다. 또한 그가 활동하던 청년 보스니아와 이를 지원한 검은 손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와 세르비아 정부에 의해 대부분 붙잡혀 처형되거나 감옥에 보내져 완전히 몰락했다.

2.3. 최후

프린치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테레진슈타트[5]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오스트리아 당국은 프린치프를 총살형이나 교수형으로 사형시키고 싶어했지만 그의 재판이 열렸을 당시 오스트리아의 법에 따르면 만 20세가 넘어야만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할 수 있었는데 프린치프는 만 20세까지 27일이 모자라서 미성년자였던 관계로 사형을 선고할 수 없었다. 여기에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감형 사유가 적용되어 징역 20년이 확정되었다.

프린치프는 체포 과정에서 심한 구타를 당해 입은 부상을 치료하지도 못한 채 독방에 감금되었다. 그는 외부와 단절된 환경을 버티지 못하고 허약해져 지독한 결핵에 시달렸고 합병증으로 피부궤양까지 앓게 되었다. 결국 결핵 합병증인 결핵성 척추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오른팔까지 절단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살극을 벌이기까지 하다가 1916년부터 정신과 의사와 면담을 하게 되었다. 프린치프는 세계대전이 일어날 줄은 알았다고 하지만[6] 그 대전을 자기가 일으켰다는 사실에는 동요하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면담 당시 세르비아 왕국은 사실상 붕괴하여 전 국토가 전쟁에 휩싸였고 적군에 점령되어 수십만의 인명이 죽어나가는 상황이었다.[7] 이 소식을 접한 프린치프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본인의 책임은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프린치프는 정신과 의사와의 면담에서 1차 대전은 언젠가 일어날 전쟁이었고 본인이 저지른 사라예보 사건은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으로 가족이나 지인을 잃은 재소자들, 결정적으로 그가 동족이라 믿었던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보슈냐크인 재소자들의 비난과 구타가 프린치프를 괴롭게 했다.

그리고 프린치프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교도소 복역 중 유대인 의사의 치료를 받다가 결국 향년 23세로 병사했다. 사망 당시 영양실조로 인해 몸무게가 40kg이었다고 한다.

3. 사후 및 평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민족자결주의와 대세르비아주의에 따라 가브릴로의 뜻대로 남슬라브 민족들을 통합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태어났다. 그러나 말이 같은 남슬라브 계통이기는 해도 수백년 동안 분열되어 서로 이질적인 정체성과 종교를 갖고 있는 민족들이 통합한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각 민족 간의 갈등을 제어하지 못했고[8]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회주의자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노력 아래 통합되는 듯 했으나 티토 사후 세르비아인의 권력 독점과 타 민족 차별은 슬로베니아-보스니아-크로아티아-코소보-북마케도니아가 각각 독립을 추구하도록 하였다.[9]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집단 학살을 거쳐 유고슬라비아는 분열되었다.[10]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유고슬라비아의 이념적 근거가 된 유고슬라비아주의를 숭배한 인물이고 따라서 전간기냉전기에는 유고슬라비아 혹은 세르비아의 영웅으로 칭송되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는 대(大)세르비아주의와 각 구성국 민족의 민족주의가 충돌해 결국 파국이 발발했고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인들과 보슈냐크인들을 인종청소하면서까지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를 막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대(大)세르비아주의가 몰락하면서 현대 구(舊)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는 가브릴로에 대한 평가가 매우 박하다.[11] 특히 세르비아인들의 대학살을 경험한 보스니아는 절대로 프린치프를 미화하거나 칭송하지 않는다.[12] 서구에서도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비극을 초래한 인물로 평가한다.

참고로 유럽에서 20세기 역사를 두고 종종 하는 농담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모든 게 완전히 바뀌었지만 보스니아가 세르비아 땅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이다.

파일:b3d6dc06ba1ddbd08dff539c2097a502.jpeg.jpg
시간이 지나면서 프린치프에 대한 평가는 세르비아에서도 비판적으로 바뀌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프린치프가 추종한 대세르비아주의가 실패한 이념이라는 진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세르비아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칭송한다. #, #, #

이러한 분위기는 민간과 정부를 막론하고 다르지 않은데 단적인 예로 2015년에는 정부에서 그의 동상을 세웠다. 기념식에 참석한 세르비아 대통령 토미슬라브 니콜리치는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영웅이었고, 그는 해방이라는 개념의 상징이었습니다"라고 수백 명의 시민들 앞에서 말하기도 했다. # 이보다 앞선 2014년 세르비아는 그의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얼굴이 새겨진 은화를 주조하고 정부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세르비아 정교회도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선포했다. 고위급 성직자 암필로히예(Амфилохије) 대주교는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단지 그의 자유와 국민들을 옹호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한편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는 당연하겠지만 굉장히 평가가 박하다 못해 나라를 끝장낸 전범이라는 비난도 많이 나온다.

4. 여담


[1] 사망 당시 몸무게[2] 당시 유럽에서는 범(汎)슬라브주의범(汎)게르만주의 같은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범슬라브주의 역시 2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발칸반도의 남슬라브족 연방 국가를 기획하는 운동, 다른 하나는 러시아 중심의 범슬라브족 통일 국가를 만드는 운동이었다.[3] 청년 이탈리아당이나 청년 튀르크당에서 따온 이름으로 보인다.[4] 세르비아 왕실의 이권에도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르비아 왕실이 뒤에서 이러한 극단주의 단체들을 지원했다는 카더라도 존재하지만, 직접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5] 지금의 체코 북부에 있는 테레진(Terezin). 테레진슈타트(Theresienstadt)는 독일식 이름이다.[6] 프린치프가 예지력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당시 유럽의 상황 자체가 워낙 막장이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제국주의, 민족주의 등이었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유럽에서 언젠가 전쟁은 발발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프린치프는 이미 정해진 사실에 쐐기를 박은 것일 뿐이다. 즉, 사라예보 사건이 없었어도 전쟁은 났을 것이다. 그러나 사라예보 사건이 일종의 도화선 역할은 한 것은 사실이다.[7] 여담으로 이 당시 남슬라브 계통인 슬로베니아인 출신 감옥 간수로부터 동포들을 죽게 만든 살인자라고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8] 그러나 당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이 오헝 제국 몰락 이후에 유고슬라비아로 통합하지 않고 별개 국가로 독립하기에는 당시 이탈리아가 발칸으로의 영토 확장을 노리고 있었던 터라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단은 생존을 위해서 같은 "남슬라브인끼리 뭉치자"는 모토로 유고슬라비아를 형성하였으나 결국 세르비아인 위주의 작은 오헝 제국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민족간의 조율을 오헝 제국보다 더 못 해서 지옥이 시작되었다. 자세한 건 유고슬라비아 문서 참조.[9] 티토는 암살당한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같은 방식으로 민족간의 차별을 금지하고 각 민족의 자치권도 어느 정도 허용했으며 여러 민족간의 교류와 혼인을 허용하면서 민족융합을 시도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티토는 사회주의를 이용하여 유고슬라비아를 통합하기 위해서 민족주의가 이념이 되는 것을 탄압했다는 점이다.[10] 티토 사후 세르비아가 권력을 독점하고 각 민족들의 자치권을 박탈하는 등 노골적으로 세르비아를 제외한 민족들을 억압하면서 갈등이 악화되었다. 세르비아는 오랜 세월 자신들만이 외세로부터 슬라브 민족 정체성과 문화를 수호했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그래서 같은 남슬라브이기는 해도 독일권이나 튀르크권의 문화와 종교에 영향을 받은 타 민족들에 대한 우월의식이 있었고 이는 세르비아가 아닌 민족들을 차별하고 탄압하는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실제로 티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족간의 갈등은 여전히 있었고 사회의 각 요직과 혜택은 세르비아가 독점하고 있어 세르비아를 제외한 남슬라브 민족들은 불만이 커졌다.[11] 반대로 그동안 남슬라브인들의 통합을 가로막은 악인 취급받던 프란츠 페르디난트에 대한 평가는 매우 좋아졌다.[12] 프린치프의 고향인 보스니아에서는 가브릴로를 보스니아의 황금기를 끝낸 테러리스트로 본다. 물론 이는 보슈냐크인들을 2등 시민으로 차별한 세르비아의 책임이 크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가 좋게 보일 정도로 세르비아의 보스니아 차별이 심각했다는 뜻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