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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2654><tablebgcolor=#002654> ||Maréchal ďEmpire
프랑스 제1제국 제국원수 ||
||프랑스 제1제국 제국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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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뇌샤텔 대공 1st Sovereign Prince de Neuchâtel''' | |
출생 | 1753년 2월 20일 |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 |
사망 | 1815년 6월 1일 (향년 62세) |
바이에른 왕국 밤베르크 | |
매장지 | 프랑스 혹은 독일 바이에른[A] |
신체 | 173cm |
재위 | 뇌샤텔의 대공 |
바란챤의 공작[B] | |
바그람의 공작[C] | |
국적 | →→→[[부르봉 왕정복고|]] |
군복무 기간 | 1764년 ~ 1815년 |
계급 | 제국 원수(프랑스 제1제국) |
지휘군단위 | 연대→군단(기병&공학) |
참전 | 미국 독립 전쟁 프랑스 혁명전쟁 나폴레옹 전쟁 ┗제1차 이탈리아 전쟁 ┗이집트-시리아 원정 ┗마렝고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 ┗아일라우 전투 ┗프리틀란트 전투 ┗예나 전투 ┗바그람 전투 ┗보로디노 전투 ┗라이프치히 전투 ┗브리엔 전투 |
서훈 | 프랑스 육군원수 레지옹 도뇌르 훈장 생루이 훈장 신시내티 협회 명예훈장 에두알 개선문 남쪽 23열 |
가족 | 장바티스트 베르티에(부) 마리 프랑수아 륄리에 드 라 세르(모) 루이 세자르 가브리엘 베르티에(첫째 남동생) 빅터 레오폴 베르티에(둘째 남동생) 조제프 알렉상드르 베르티에(셋째 남동생) 마리 엘리자베트 안 바비에르(부인) 나폴레옹 알렉상드르 루이 조제프 베르티에(아들) 카롤린 조제핀 베르티에(딸) 마리 안 베르티에(딸) 제나이드 프랑수아즈 클라리(며느리) 파이 오귀스트 드 바비에르(형님) 기욤 안 바비에르(장인) 마리 안 드 되폰즈 비르켄펠트(장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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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 초대 바그람 공작, 초대 바란챤 공작, 초대 뇌샤텔 대공.[4] "란, 베르티에, 베시에르, 단 세 명만 살아있었다면 워털루 전투의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참모장으로 평가받는다.2. 생애
2.1. 나폴레옹과의 만남에서 원수가 되기까지
베르티에는 1753년 2월 20일 프랑스 베르사유 근교에서 프랑스 육군 공병대 장교였던 장 바티스트 베르티에의 아들로 태어났다. 베르티에는 13세에 왕립 공병학교에 입학하고 공병 지식을 쌓은 뒤 17세에 입대했다. 그는 혁명전쟁 초기 여러 장군들의 부관 및 참모로 근무했다. 1796년에는 신설된 이탈리아 방면군의 사단장이자 참모장이 되었다. 이때 혁명 정부와 교황청의 대립은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1798년 2월에 프랑스 혁명 정부는 베르티에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파병하여 로마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베르티에는 비오 6세를 프랑스로 압송하고 교황령의 폐지를 선언한 뒤, 괴뢰국을 수립했으니 그 나라가 바로 '로마 공화국'이었다.1799년 11월 18일,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때 베르티에는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도왔다. 그는 확고한 나폴레옹 찬동자였다. 통령 정부 기간 동안, 베르티에는 국방장관을 지냈다. 1800년, 나폴레옹은 마렝고에서 오스트리아군과 격돌했다. 이때 베르티에는 명목상 육군 예비군의 수장이었지만, 실제로는 언제나처럼 나폴레옹의 참모천장으로서 동행했다. 이 전투 직후, 베르티에는 민간 외교 사업에 고용되었다. 이때 마렝고는 미국 특사와 협상하여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파는 대가로 1500만 달러를 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 베르티에는 스페인에 특사로 파견되어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804년, 황제에 즉위한 나폴레옹은 베르티에를 다른 18명의 장군들과 함께 원수로 진급시켰다. 나폴레옹은 교모한 전략으로서 상대를 공략하기 위해 종종 베르티에와 머리를 맞대어 의논하곤 했다. 베르티에의 조언은 대부분 옳았고, 나폴레옹은 그를 매우 신뢰했다.
1806년, 베르티에는 바그람 공작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807년에는 치안장관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잘나가던 베르티에는 1808년 3월에는 먼 사촌인 마리아 엘리자베스 프란체스카와 결혼했다. 1809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공격했을 때, 베르티에는 참모장으로 참석했고, 1809~1810년 반도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직접 이베리아로 진군했을 때도 참모장으로서 황제를 보좌했다.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감행했다. 이때 베르티에 역시 참모장으로서 나폴레옹과 함께했다. 하지만 원정은 대실패로 끝났고, 나폴레옹은 몰락해 갔다. 베르티에는 끝까지 나폴레옹과 함께했지만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을 막지 못했다.
2.2. 은퇴 후 의문의 죽음
나폴레옹이 폐위되어 엘바로 유배당했을 때 베르티에는 직위에서 은퇴하여 6백에이커에 달하는 그의 영지에 돌아가 취미생활을 즐겼다.[5] 그는 루이 18세의 용서를 받았으나 더 이상 정치나 군사에 뜻을 두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엘바를 탈출, 100명 남짓한 병력으로 귀환했을 때 나폴레옹은 그가 따라오기를 바랐으나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은 채 자신의 영지에 조용히 머물렀다.그는 1815년 6월 1일, 워털루 전투 2주 전에 밤베르크의 자택[6] 2층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의 사인은 명확하지 않다. 프로이센 군대가 프랑스를 침범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 창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한 건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암살당한 건 아닌지 여러 추측이 난무했으나 이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고, 어쨌든 그는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은 애매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자살인지 암살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정황이 조성되었고 왕당파의 암살을 자살로 위장시키기 쉬운 조건이 될 수 있으므로 암살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를테면 나폴레옹이 귀환하자마자 나폴레옹을 따른 다부를 암살한 뒤 자살로 위장시켜 봐야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티에는 그 애매한 태도 때문에 보다 쉽게 죽음의 맥락이 불분명한 조건을 조성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부고를 듣자 나폴레옹은 "이젠 누가 내 명령을 이해하고 작전을 세우냐"며 통곡했다고 한다.
3. 평가
한 군단을 맡아 지휘하는 능력은 부족하지만 전체적인 대국을 읽고 총사령관을 보조하는 참모로서의 재능은 당대의 유럽 제일로 알려져 있으며 사석에서 나폴레옹은 그를 "내가 한 마디만 해도 작전의 모든 것을 알아내는 재능이 있다.", "나를 가장 오래 섬겼으며,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며 극찬할 정도로 천재적인 명참모였다.[7] 나폴레옹이 이루어낸 승리들은 베르티에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현재의 평만 봐도 그의 대단한 능력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리고 총참모장이라는 직책상 한 번도 나폴레옹 곁에서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자신이 군을 직접 지휘한 적은 거의 없고 지휘관으로 발탁된 적도 딱 한번인데 그나마도 며칠 만에 황제가 소환했다.자기가 바로 옆에서 모신 황제가 워낙 천재인 데다 자신의 참모장으로서의 능력이 너무 뛰어나다 보니 지휘관 자질은 부각되지 못했다. 상급자를 보좌하는 능력은 뛰어났으나, 하급자를 포용하는 능력은 매우 부족했다. 특히 전략적 재능이 뛰어난 부하들과 반목이 심했다. 루이니콜라 다부 원수와는 그나마 사이가 나쁜 선에서 끝났으나, 앙투안 앙리 조미니[8]는 베르티에의 견제를 버티지 못하고 적국 러시아로 넘어갔을 정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참모장 장드디외 술트에게 숲 속 탐험을 하느라 헤매는 에마뉘엘 그루시를 찾으라고 명령했을 때 술트가 단 한 명의 장교만 보냈다는 것을 알고 "베르티에라면 20명은 보냈을 거라고!" 라며 질책했다고 한다. 그 장교가 그루시에게 향하던 도중 영국군의 포탄에 죽었기 때문에 그루시에게는 귀환 명령이 전해지지 않았고 이는 워털루 전투에 치명적이었다.
워털루 전투 때의 베르티에의 부재가 나폴레옹에겐 너무나도 크나큰 아쉬움이었기에, 그는 유배지인 세인트 헬레나에서 "베르티에가 있었더라면, 이런 불행을 마주할 일도 없었을 텐데..."라는 말을 남겼다.[9]
나폴레옹이 그와 체스 하기를 즐겼는데 백말곤 할줄 몰랐던 나폴레옹이 항상 백을 잡았다.[10] 베르티에가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봐준 티가 났으나 나폴레옹은 눈치채지 못한 듯 하다... 많은 사람이 보고 있기에 참모인 그가 나폴레옹을 깨부순다면 일어날 후폭풍이 두려웠던 듯 하다.
베르티에의 실질적인 역할을 요약한 글인데 이 댓글에서 묘사한 나폴레옹과의 관계와 능력이 역덕후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나폴레옹: 마 니랑 금마랑 같이가가 저짝에 오는 그끌베이새끼들 미리 오기전에 대포가까서 단디 쌔리삐려야된다아이가. 또 점번맹키로 발까 이래이래 문대지 말고 끌차태워가까라고.[11]
베르티에: 3군단과 7군단에서 대포를 차출해서 프러시아군의 길목을 차단 하도록 하시오. 저번처럼 대포를 손발로 끌고 가지 말고 수레에 태워서 가도록 하시오.
베르티에: 3군단과 7군단에서 대포를 차출해서 프러시아군의 길목을 차단 하도록 하시오. 저번처럼 대포를 손발로 끌고 가지 말고 수레에 태워서 가도록 하시오.
4. 창작물에서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 게임 나폴레옹 토탈워에서는 튜토리얼 가이드 역할로 나온다.나폴레옹 전쟁을 다룬 게임 (2) 유럽전쟁4: 나폴레옹 에서는 참 쓸일없는 개판특성으로 나와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누군가가 특성을 활용해서 기병 별을 올려 기병 지휘관으로 쓰는 방법을 제시했는데, 실제로 써봤지만 육성 비용이 너어어어어어무 비싸 차라리 이런 변태짓거리 하지말고 괜찮은 기병 장군 하나를 육성하는게 낫다는 소리를 들었다.
리들리 스콧의 나폴레옹에서는 스콧 핸디가 맡았다. 대관식 신에서 나폴레옹에게 조제핀의 관을 넘겨주는 등 여러 주요 장면에 등장하나 대사는 모스크바에 일어난 화재를 나폴레옹에게 설명하는 것이 전부
[A] 바이에른에서 사망했다고는 하나 정확한 매장지는 알수없음[B] 제1대 바란챤 공작(1st Duc de Valengin)[C] 제1대 바그람 공작(1st Duc de Wagram)[4] 정식명칭은 1st Duc de Wagram, 1st Duc de Valengin, 1st Sovereign Prince de Neuchâtel.[5] 조각과 매사냥이 취미였다고 한다.[6] 해당 자택은 과거 밤베르크 주교공들의 신궁전이라고 한다.#[7] 그런데 나폴레옹은 베르티에가 '혼자 놔두면 혼란스럽다'고 평한 적도 있다. 말 그대로 참모에 최적화된 듯하다.[8] 당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과 쌍벽이라고 평가받은 전쟁술의 집필자.[9] 술트가 워털루 전투에서 참모장을 맡는 바람에 영국군의 정면은 전부 네 혼자 지휘하고 있었다. 만약 베르티에가 생존해 워털루에서 참모장을 맡았다면 웰링턴과 많이 치고받은 술트가 가세해 네와 둘이서 더욱 노련하게 대처했을 것이며, 해메고 있던 그루시까지 조기에 다시 데려와 영국군을 밀어버렸을 것이다. 아니면 작전단계에서 나폴레옹에게 의견을 피력해 그루시 대신 다부를 데려오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나폴레옹 곁에 베르티에 단 한 명만 더 있었다면, 워털루는 나폴레옹이 이겼을 수도 있다할 수 있을 정도의 인재.[10] 2판 이상부턴 양보하는 게 매너이기에 나폴레옹이 흑을 잡았다.[11] 표준어로 직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야 너랑 그 녀석이랑 같이 가서 저쪽에 오는 그 걸뱅이 새끼들 미리 오기 전에 대포 갖고 가서 단단히 때려 버려야 되지 않겠니? 또 저번처럼 발로 이렇게 이렇게 문대지 말고 끌차 태워 갖고 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