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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3 22:22:41

자크 마크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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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타랑트 공작
에티엔 자크조제프알렉상드르 마크도날
Étienne Jacques-Joseph-Alexandre MacDonald
1er Duc de Tarente
파일:MacDonald_par_Antoine_Jean_Gros.jpg
<colbgcolor=#002654><colcolor=#ffd700> 출생 1765년 11월 17일
사망 1840년 9월 7일 (향년 74세)

1. 개요2. 생애
2.1. 그의 가계, 그리고 프랑스 혁명전쟁 동안 그의 군 경력2.2. 나폴레옹 휘하에서의 활약2.3.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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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이자 나폴레옹이 임명한 26인 원수 중 한 명. 초대 타랑트 공작.

그의 성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는 프랑스 가문이 아닌 스코틀랜드 가문이었다. 다만 프랑스 샹파뉴[1] 지방의 스당에서 태어난 스코틀랜드 계 프랑스인.

2. 생애

2.1. 그의 가계, 그리고 프랑스 혁명전쟁 동안 그의 군 경력

프랑스의 아르덴에 있는 세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네일 맥에아첸[2]은 스코틀랜드 서부에 있는 하우벡에서 가족을 이끌고 왔다. 그의 집안은 스튜어트 왕가를 부흥시키려 노력한 플로라 맥도널드[3]와 가까운 집안이었는데, 보는 시각에 따라 반역자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제임스 2세의 직계가 영국의 정통 왕가라고 믿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충신 집안 후손이고.

1785년에 마크도날은 네덜란드 공화국의 아일랜드 군단에 입대했고, 프로이센 왕국과 싸웠다. 그러다가 그 부대가 해산되자, 디용에 있는 연대로 전입했다. 그 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마크도날의 연대는 그를 제외한 모두가 국왕에 대해 끝까지 충성심을 지켰고 그 때문인지 그는 연대 내에서 왕따가 되었다.[4] 그 후 뒤무리에 장군의 막료로 들어가게 되었고, 제마페스 전투에서 공을 세워 1793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언제인가 자신의 상관인 뒤무리에가 오스트리아군의 진영 안에 갇혀있는 것을 보고 그를 버리고 도망가는 것을 거부, 마크도날은 공격을 개시했고, 그 결과 그는 여단장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피슈그뤼의 네덜란드 침공군에서 자기 여단을 지휘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복무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지리에 빠삭했고, 거기에 더해 프랑스 경기병대가 네덜란드 함대를 점거하는데도 도움을 주었다. 1797년 마크도날은 사단장으로 진급했고, 그는 라인군에서 사단장으로서의 첫 지휘를 하게 되었다.

나중에, 마크도날이 모로를 따라 이탈리아로 왔을 때, 막 캄포포르미오 조약이 체결된 뒤였고, 나폴레옹은 기분 좋게 프랑스로 돌아오고 있었기에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베르티에의 지시 하에, 마크도날은 샹피오네 장군과 연합하여 라이베리히 공작의 군대를 물리치고 기습적으로 로마를 점령한 뒤, 나폴리 왕국도 접수했다.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의 러시아군이 북 이탈리아를 침공해 오자, 나폴레옹군에서 지휘를 했다. 그는 3만 6천명을 이끌고 모로와 함께 북부 방면으로 이동했으며, 트레비아 전투에서 수보로프의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 2만 2천을 맞아 싸웠다. 그런데 모로가 도와주지 않아 크게 패하고 제노바로 후퇴해야 했다.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이 끝난 후, 마크도날은 베르사유의 행정관이 되었다. 그리고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는 거기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 일을 묵인했다.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 해인 1800년, 그는 헬베티아 공화국군의 지휘권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정말 활약하게 되는 계기는 그 해의 겨울이었다. 1800년 겨울, 마크도날은 나폴레옹으로부터 "그리종 방면군을 지휘하여 모로의 독일 방면군과 브륀이 이끄는 이탈리아 방면군과의 동조를 유지하면서 스플뤼겐을 통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지체없이 명령을 수행했으며, 나폴레옹이 생 베르나르의 길[5]을 지나가는 동안 그는 한번의 전투 없이 스플뤼겐을 통과, 이듬해 1월 6일 북 이탈리아의 트렌토를 점령했다. 그의 수석 참모였던 마티외 뒤마는 "나폴레옹의 생 베르나르 통과만큼이나 영광스러운 업적"이라고 드립 기록을 했다.

파리로 돌아온 마크도날은 주베르 장군[6]의 아내였던 미망인[7]과 결혼했으며, 덴마크에 대사로서 파견되었다. 그런데 1805년에 그는 나폴레옹과 반목하고 있던 모로와 팀을 먹는 바람에 나폴레옹의 분노를 사서 첫 원수 임명자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2.2. 나폴레옹 휘하에서의 활약

그는 군대를 지휘하는 일 없이 1809년까지 쭉 백수생활을 하다가 나폴레옹이 그에게 자신의 양아들인 외젠 드 보아르네[8]의 군사 고문을 맡김과 동시에 이탈리아 군단 지휘관도 맡겼다.[9] 그는 이탈리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나폴레옹에게 합류했다. 바그람 전투에서는 지난 전투로 인해 지친 다른 프랑스군들을 대신해 오스트리아군의 중심을 타격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때 그는 모양의 거대한 대형을 짜서 공격을 가했다. 전투 자체는 난타전에 가까웠으나 그의 부대는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고, 오스트리아군은 이 공세를 겨우 막아내는데 힘을 다 써버려서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마크도날은 바그람 전투의 승전에 일조했다. 그 동안 부하들이 벌인 삽질행보에 질려있었던 나폴레옹은 마크도날의 활약이 마음에 들었는지 직접 찾아가 그를 끌어안으며 그 자리에서 원수로 임명시켜 주었고, 나폴리의 타란토 공작 작위까지 주었다.

1810년 마크도날은 반도전쟁에서 군대를 지휘했고, 1812년에는 대육군의 좌익을 맡아 러시아로 진군했다. 1813년에는 뤼첸과 바우첸 전투에서 일익을 담당했으며, 슐레지엔으로 쳐들어 갈 것을 명령받았다. 마크도날은 명령을 수행하여 슐레지엔으로 쳐들어갔고, 거기서 증오스러운 프랑스 원쑤들을 기다리던 블뤼허에게 걸려서 1만5천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다.(카츠바흐 전투)

같은 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그는 리베르트볼크비츠에서 요한 폰 클레나우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 제4군단에게 공격받자, 마을을 거점으로 삼아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다음날 오스트리아 주력부대의 측면을 공격하려는 시도를 눈치챈 클레나우에게 걸려서 역관광당했다. 라이프치히 전투가 끝난 뒤,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원수와 함께 철수하는 아군을 방어할 것을 명령받았다. 마크도날과 포니아토프스키는 적의 추격을 막기 위해 다리위에서 전투를 개시했고, 결국 패배하자 둘은 강으로 뛰어들어 헤엄쳐 가려 했다. 마크도날은 살아 남아 엘스터까지 헤엄치는데 성공했으나 포니아토프스키는 그대로 물에 빠져 죽었다.

1814년 나폴레옹이 최후의 시도로 프랑스 방어전을 펼칠 때였다. 그러나 마크도날도 지속되는 전쟁에 지쳤는지 제대로 실력발휘를 하지 못했고, 분노한 나폴레옹은 그를 좌천시켰으나 그가 직접 황제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폐하, 전 저의 오랜 직업을 잊지 않았습니다. 총을 잡겠습니다. 근위대의 서열에서 폐하를 지키겠습니다" 이에 감동받은 나폴레옹은 그에게 근위대를 맡겼고 마크도날은 드디어 제정신을 차리고 실력발휘를 하였으나... 이미 기운 대세를 뒤집을 순 없었다. 나중에 마르몽를 위시한 다른 원수들이 나폴레옹을 배신하고 윽박지를 때도 마크도날은 나폴레옹의 곁을 지켰으며 나폴레옹이 퇴위되었을 때 나폴레옹은 마크도날에게 그의 퇴위 소식을 파리로 전하는 역할을 맡겼다. 그는 나폴레옹으로부터 자신의 충성을 부르봉 왕가에 바칠 것을 명령받았고, 또, 여태까지의 충성심을 인정받아 무라드 베이의 사브르를 선물 받았다.

2.3.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왕정복고가 일어난 뒤, 마크도날은 프랑스 귀족사회의 일원이 되었고, 생 루이 왕립기사단의 기사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815년의 백일천하 때는 나폴레옹으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그는 그것을 1831년까지 달고 있었다. 1816년 근위대의 소장이 되었고, 1814년의 헌장으로 그는 귀족원의 일원이 되었다.

1830년 이후로는 은퇴하여 쿠르셀레슬-루아 혹은 센-에토와즈[10]에서 쭉 살았으며, 1840년 9월 7일 7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1]그랑테스트 레지옹[2] 후에 마크 도날, 그러니까 맥도날드(!)가 된다.[3] 마지막이자 가장 격렬했던 제5차 재커바이트 반란을 실패하고 헤브리디즈 제도로 도망친 찰스 에드워드를 프랑스로 도망시키는데 많은 도움을 준 여성이다.[4] 그게 그럴 수밖에 없는게, 자기 아내될 사람의 아버님으로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장인은 열렬한 혁명파였다고.[5] 다비드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무대가 된,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가 행군한 길이 바로 이 생 베르나르의 길이다.[6] 바르텔레미 카트린 주베르(1769 ~ 1799).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았지만, 1799년 노비전투에서 러시아의 수보로프를 상대하다 전사했다.[7] 나중에 나폴레옹의 세인트헬레나 유배를 따라간 몽톨롱 장군의 누나이기도 했다.[8] 이 사람은 이탈리아 왕국의 부왕이 되었다.[9] 이때 워낙 급하게 오는 바람에 군복도 없어서 옛날 국민군 시절 입었던 군복을 입고 와야만 했다. 금술과 치렁치렁한 장식들로 치장된 제복을 입은 다른 장군들 사이에서 낡고 수수한 차림을 한 그의 모습은 유독 눈에 띄었다고 한다.[10] 지금의 볼리외 쉬르 루아르Beaulieu-sur-Loire로 추정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