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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95년 10월 25일 | ||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 |||
사망 | 1861년 1월 2일 (향년 65세) | ||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 | |||
재위기간 | 프로이센 국왕 | ||
1840년 6월 7일 ~ 1861년 1월 2일 (20년 6개월 3주 5일, 7,514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어머니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 |
배우자 |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1823년 결혼) | ||
자녀 | 없음 | ||
형제자매 | 첫째 남동생 빌헬름 1세, 첫째 여동생 샤를로테, 둘째 여동생 프리데리케, 둘째 남동생 카를, 셋째 여동생 알렉산드리네, 셋째 남동생 페르디난트, 막내 여동생 루이제, 막내 남동생 알브레히트 | ||
가문 | 호엔촐레른 가문 | ||
종교 | 칼뱅파 (프로이센 교회 연합)[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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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이센 왕국의 제6대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의 맏이이다. 빌헬름 1세의 형. 프리드리히 3세의 큰아버지이다. 또한 빌헬름 2세의 큰할아버지이기도 하다.2. 생애
어린시절 어머니 루이제 왕비, 남동생 빌헬름(왼쪽)과 함께 산책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맏아들로 아버지가 치세 말기엔 보수꼴통으로 오랫동안 다스렸기에 자유주의자들의 기대를 받으며 즉위하였다. 자유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그는 왕좌 위의 로맨티시스트로 불렸다.
풍부한 재능과 높은 교양을 갖추었기에 시민계층이 기대를 모았으나 사실 그는 낭만주의자라기보단 그냥 오래 된 것이라면 모든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었다. 루터파 개신교도[2]였지만 종교적으로 관대한 데다가 오래된 건축물을 좋아해서 쾰른 대성당 건축을 후원했고, 가톨릭 신자를 총리로 임명할 정도였다. 영국의 성공회와 루터파 합동 관구로 예루살렘 교회 설립을 지원하기도 했다.
1848년 혁명 시기에는 베를린에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것 같더니 어느새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독일 국기[3]를 두르고 "이제 프로이센은 독일에 통합되었다"고까지 말하면서 자유주의적 개혁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암마인 국민 의회에서 독일 제국의 황제로 추대받자, 독일 연방의 군주들이 추대한 왕관이라면 받겠지만 감희 너희 아랫것들(?) 한테선 받지 않겠다며 거부하고 혁명도 진압하였다. 실상은 다른게 혁명이 터지자 당시 군대들은 야전훈련이나 받지, 진압 훈련을 받은 것이 아니라서[4] 도시에서 시민 봉기가 일어나자 일부 부대는 어버버하고 또다른 일부 부대는 충분히 통제가 가능한 상황에서도 발포하다가 70여명의 시민이 사망해버렸다. 피를 본 시민들은 과격해졌고 국왕은 그만 베를린 거주지에 포로처럼 잡혀버린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 상황에서 '강경 진압'과 '근위 연대가 있는 포츠담으로 도망' 이라는 두 선택지 중에서 강경진압은 성향이 아니고.., 도망치는 것도 치욕감 때문에 선택하지 못할 정도로 우유부단했다. 결국 시위대의 희생자 추모제에 참석하여 고개를 숙이게 된다.
초기 시민군에게 베를린이 장악되었을 때 유혈사태 이후 강경 진압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보수 반동 세력에 무지하게 까였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시민 의회가 나가리되고 진압하자 이번엔 시민 계층에 욕을 먹었다. 그러나 둘 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성향은 아니었다.[5] 혁명 와중에 "프로이센은 독일에 통합되었다" 드립을 친 건 왕이 거의 포로나 다름없이 붙잡혀서 혁명을 상징하는 모자를 쓰고 시민군 희생자 추모회에 반강제로 참석할 정도로 지위가 불안했기 때문이었지, 특별히 자유주의나 민족주의 관심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리고 이후 각국에서 반동으로 혁명이 진압당하고 프로이센도 군대가 정비되어 반격을 시도해서 혁명은 이미 거의 나가리 된 상황이긴 했다. 왕관을 실제로 받았다면 오스트리아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전쟁을 선포하고 쳐들어 올게 뻔했기 때문에 만약에 원했다고 해도 받을 수도 없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왕이 자신의 편이라 착각한 것이지, 애초에 자유주의 성향이 아니었다는 것. 애초에 왕세자 시절부터 전통적인 보수적인 교육을 받았고 교류한 사람들도 보수적 문필가, 정치가, 철학자들이었다. 물론 건축과 조경에 관심이 있어서 조각가 크리스티안 다릴 라우흐와 건축가이며 도시 계획가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을 후원하긴 했다. 전임 국왕들과 성향이 달라 자유주의자들이 덜컥 착각한 것이지, 정치적 성향은 이전 국왕들과 똑같았다. 물론 정치적 관심사보다 문화 유산에 관심이 많고 성격도 독재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쨌건 권력은 위에서 나온다는 왕권신수설을 진지하게 믿었고, 19세기 정치사상이나 프랑스 혁명의 유산에는 단연코 반대했다.
또한 보수적인 기독교 가치에 강하게 얽메여있었고, 기독교적 가치로 새로운 근대화 질서를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신권주의 정치를 망상하기도 했다. 사상적으로도 프리드리히 슐레겔에 동조했는데, 그 내용인즉 유일하고 가장 좋은 헌법이 바로 신분 기반 군주제라는 것이었다. 1848년 혁명 신권 애당초 삼색기를 두르고 대중 앞에서 쇼맨쉽을 보여줘놓고도 동생인 빌헬름 1세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어쩔 수 없이 잠깐 이렇게 됐을 뿐이고, 좀 진정되면 다시 내려놓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래서 현대 역사학자들은 처음부터 국면 전환용으로 자유주의자들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었을 뿐이고,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바로 반동으로 뒤엎을 심산이었다고 본다. 실제로 헌법 인정 이후 왕권은 되려 안정화 되었다. 일단 헌법부터가 국왕이 의회를 거의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인 권력을 허용하고 있었다. 사실상 허울만 입헌인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 도입을 앞두고 종이 한장 따위로 백성과 자신 사이를 막을 수 없다는 괴랄한 드립을 쳐댔으니 성향적으로 완전히 꼴통 반동이었음에는 틀림없었다.
대체로 당시의 자유주의자들은 시대에 따라 정치 발전이 점차 정치에 참여하는 계층이 넓어진다고 주장하면서 우선 귀족을 포함한 상류계층의 자유와 특권을 인정할 것을 주장했다. 반대로 프리드리히 빌헬를 4세를 비롯하여 보수주의자들은 귀족의 자유를 제한하고 엄격한 장교단 복무를 강제하는 대신, 그 보상으로 일정 권리을 보장하여 타 신분들과 차별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시절부터의 프로이센식 상호 의무 개념을 주장했다. 물론 인사들마다 달라지지만 어쨌든 국가는 사회계층의 위치와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공권력을 가지는 것으로 발전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되어야 한다는 경향이 당시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있었는데 여기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인물들이 로렌츠 폰 슈타인[6]과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레오폴트 폰 랑케이다.[7] 이러한 기류는 후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어받으며, 후의 마르크스주의적 사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후 1849년에는 소위 "3계급 투표제"로 알려진 과세에 따른 투표권을 용인해주기도 하였으나 자유주의에 공감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자기 편에 서줄 보수적인 부르주아 계층을 위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민주주의를 항해서 한발 다가간 셈이었긴 했다. 완전 듣보잡 시골 촌구석 융커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벼락 출세 시켜서 프랑크푸르트의 독일 연방 의회 대사로 임명하기도 했다. 독일의 산업 발전에도 나름 업적을 남겼다. 당시에는 산업 혁명이 가속화되던 시기였고, 산업화를 위해 철도 개설은 필연적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이 중요성에 공감하였고 철도에 상당히 열정을 쏟아부었는데, 베를린부터 쾨니히스베르크를 잇는 동부철도를 놓도록 했고, 그외에도 채권을 통한 수익으로 각지 철도 산업을 발전시켰다. 본인이 기차 탑승을 애용하기도 했으며, 기관차 공장에 방문하고 상수시 궁전에 증기 기관으로 돌아가는 분수대를 놓기도 하는 등 기술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도 컸다. 1845년에는 "프로이센 산업법"을 발표했는데, 반동주의자답게 파업 조장자에 최대 1년형을 선고하는 등 파업에 대해 강경한 대응이 포함되어있었다. 그런 동시에 1844년에 노동 계급 복지 협회에 1만 5천 탈러를 쾌척하기도 했다.[8]
소독일주의에 기반해서 프로이센 중심으로 독일 국가들을 결집시키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는데, 1849년 프로이센-작센-하노버 3국 간에 맺어진 소위 "에르푸르트 연합"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바이에른 왕국과 뷔르템베르크 왕국이 이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연합의 존속을 둘러싼 내각 관료들의 정쟁은 안 그래도 우유부단했던 프리드리히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를 궤뚫어본 오스트리아가 헤센에 주둔해있던 프로이센 군대를 철수하라며 압박을 넣었는데, 웬일인지 그답지 않게 프리드리히는 동원령을 선포하는 배짱을 부렸고 내각 내 다수파는 국왕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게 만들었다며 정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가 최후 통첩을 날리고 왕비이자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고모인 엘리자베트 루도비카가 물러설 것을 종용하자 결국 포기하였고, 올뮈츠 협약을 맺는 수 밖에 없었다. 프로이센의 독일 통일 대소동은 그렇게 해프닝으로 끝나게 되었는가... 싶었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죽고 불과 5년 뒤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완패시켜버리고 하노버 왕국 합병 및 북독일 연방 성립을 이루어내면서 한을 풀게 되었고, 또 4년 뒤에는 마지막 방해물까지 개박살내버리며 독일 통일을 이루게 된다.
1853년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중립을 지켰다. 러시아 제국과 신성 동맹의 멤버이자 같은 반동주의 동지로써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긴 했지만, 동시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1857년부터는 정신병 발작으로 왕세제 빌헬름이 섭정을 맡았다. 정신이 오락가락 했지만 간혹 멀쩡할 때가 있었는데, 유언장에는 후대왕들에게 절대로 헌법에 대한 맹세를 하지 말라고 비밀리에 써놨었다.(...)[9]
3. 기타
사진을 최초로 찍은 독일의 국가원수다. 1847년 찍었다. 최초로 사진을 찍은 국가원수는 프랑스의 루이필리프 1세(1842년 촬영)였고, 미국의 존 퀸시 애덤스(1843년 촬영),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1844년 촬영)이 그 뒤를 따랐다.
역대 프로이센 국왕 중 주요 작위를 2개 이상 겸하지 않은 유일한 왕이다. 초대 국왕인 프리드리히 1세부터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까지는 선조들이 세습해온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겸했고, 동생 빌헬름 1세부터 마지막 왕인 조카손자 빌헬름 2세까지는 독일 황제를 겸했다.
4. 가족관계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 1801년 11월 13일 ~ 1873년 12월 14일
1832년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루도비카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초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와 바이에른란츠후트의 엘리자베트 이후 약 420여 년 만에 이루어진 호엔촐레른 가문과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통혼이었다.[10] 부부간의 사이는 좋았지만 자식이 없었고, 자연스레 둘째 동생 빌헬름이 왕세제가 되었다.
[1]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법령에 따라 루터파와 칼뱅파가 혼합된 종교로, 현재 EKD와 같이 연합교회 형태라고 보면 된다.[2] 호엔촐레른 가문은 1555년 요아힘 2세 대에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교회로 공식적으로 개종한 이후 1613년 요한 지기스문트 대에 칼뱅교회로, 1817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대에 루터교회와 칼뱅교회를 혼합한 프로이센 연합교회를 창설해 루터교회에 가까워졌다.[3] 오늘날의 흑적황 독일 국기.[4] 1795년 영국에선 군경이 분리되었는데 아직 다른 나라들은 그렇지 못 했다.[5] 왕세제 빌헬름 왕자는 혁명 세력에 살해당할까 봐 영국으로 도망갈 정도였다.[6] 사실 슈타인이나 기타 당대 유럽 보수주의자들의 견해야 말로 오늘날의 측면에서는 당대 자유주의자들보다 더 자유주의적인 면이 있다. 단지 법적 자유는 국가가 특수 이익의 지배권을 해체하고 이익추구의 보편적 권리를 보장할 때 가능하며, 정치적 자유는 특정 사회계급이 국가에 대한 통치권을 배타적으로 보유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대의제나 헌법은 국가적 과제나 계급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여겼기에 반대한 것이다. 때문에 당시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보수주의자들은 영국식 모델로는 자국이 발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반대했다.[7] 거시적인 시대 및 국가 발전과 공권력의 영향을 지나치게 강조했고 미시사를 무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는 점에서 거의 유사한 관점을 가진 러시아 제국의 국가학파의 영향을 진하게 받은 역사학자들과 일치한다.[8] 당시 노동자의 하루 평균 임금이 1/2 탈러에서 1탈러 정도였고 1탈러를 현대 가치로 추산하면 5만원이 좀 덜 되므로 7억원 정도를 투척한 셈이다. 국왕이 쾌척했다기엔 좀 짠돌이 같아 보이지만 이 시기의 국왕이 사비로 이 정도를 노동자 협회에 주는 게 당연한 일은 아니었다.[9] 당연하지만 위헌이다.[10] 종교 개혁 이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루터교회 개신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한동안 양측의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