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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00:55:57

트루도비키


파일:러시아 제국 국기.svg {{{+1 [[러시아 제국|{{{#000000 러시아 제국}}}]]의 주요 정당}}}
마르크스주의 인민주의 자유주의 자유보수주의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 · 멘셰비키 (국제파 · 주류) ^
사회혁명당
^좌파 · 우파 ( 트루도비키 · 민중사회주의) ^
입헌민주당 진보당 10월 17일 연합
^ 좌파 · 우파[1]^

[1] 입헌민주당, 진보당, 10월당 좌파가 결성한 진보블록에 참여하지 않고 10월당 우파(right-wing of octobrists)라는 이름의 당파를 결성해 독자적으로 선거에 출마했다.
Трудова́я гру́ппа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9e0200> 영어 Labour's group[1]
한글 명칭 사회혁명당 우파(트루도비키)
약칭 트루도비키(한)
SR Right, Trudoviks (영)
당수 알렉세이 알라딘
창당일 1906년
해산일 1921년
이념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2]
인민주의
농본주의
급진주의(일부)
스펙트럼 좌익~중도좌파 (전기)
중도좌파 (후기)
국제조직 제2 인터내셔널 (1889–1916)

1. 개요2. 역사

1. 개요

러시아 제국 말기부터 러시아 혁명시기까지 활동한 정당 사회혁명당의 당내 우파 파벌을 일컫는 말로, 대표적으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 파벌에 속해 있었다. 러시아 임시정부를 주도하는 세력 중 하나였다.

2. 역사

트루도비키라는 파벌을 창립한 것은 알렉세이 알라딘으로, 그는 러시아 제국의 군인이었다. 그러던 그가 1905년에 열린 제1차 국가두마 선거에서 원내 진입에 성공하면서 이 파벌 또한 만들어졌다. 그러나 정작 알라딘 본인은 두마 개원 직후 영국에 보내졌다가 그대로 거기에 정착해 사는 바람에, 그가 이 파벌을 이끈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1차 국가두마 때는 애초에 두마의 영향력이나 권력 자체가 작은데다 입헌민주당이나 진보당같은 자유주의계열 우파 정당들이 두마를 주도했기에 사회혁명당도, 트루도비키도 세력은 크지 않았다.

제2차 국가두마 소집을 위한 선거가 개최되자, 좌파 성향의 사회혁명당, 그리고 극좌인 사회민주노동당이 우파가 진보 블록(Progressive bloc)을 결성한 것에 대항해 좌파 블록(leftists bloc)을 결성해 반우파투쟁이란 기치를 걸고 선거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가끔씩 중도좌파성향을 가진 입헌민주당과 전략적으로 연대하기도 했다. 그 결과 트루도비키는 선거에서 전체 270석 중 104석을 얻으며 원내 제1당으로 올라서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상트페테르부르크 선거에서 참패(...)하기는 했으나 27%를 득표하였고, 무려 트루도비키 그룹 단독으로만 55명의 의원을 확보했다.

총선 직후인 2월 중순, 트루도비키 그룹 제2차 총회가 열렸다. 이 총회는 그들이 2차 두마에서 취할 행동과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 회의 결과 농민조합과 합병하여 의회에서 하나의 '파당'으로서 "노농연맹"(Labour's group and peasant union)을 결성할 것이 결정되었다.

한편 두마 창설 첫날 작년 1차 국가두마때 제안되었다가 너무 급진적이라며 까이고 두마를 해산되게 만들었던 정치범 사면 관련 법률을 약간의 수정을 거친 채로 다시 내밀었으며, 토지개혁의 초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한편, 당시 사회민주노동당은 러시아 제국군의 장병들에게 충성심 저하와 동요를 목적으로 한 공작을 벌이던 중이었는데, 결국 이런 사보타주에 보다못한 제국 정부가 사회민주노동당 소속 의원 55명을 두마에 넘기라고 요구했으나 당시 사회민주당과 같이 협력중이던 사회혁명당은 물론이고 우파까지 가세해 여기에 반대하며 시간을 질질 끌기 시작했다. 그러자 격분한 총리 스톨리핀은 두마의 완전한 해체를 니콜라이 2세에게 주장했으나 두마를 해체했다간 분노한 대중들에 의해 자기도 같이 해체되리라 생각했던 그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두마를 해산한 후 선거법을 바꿔서 다시 총선을 치르는 것을 고려했다. 이에 스톨리핀의 주도로 전체 사회의 극소수를 차지하는 지주와 귀족들에게 전체 선거인단의 무려 60%를 몰아주고 소작농과 프롤레타리아는 합쳐서 겨우 25%밖에 배당해주지 않는 선거법을 새로 마련했고, 두마를 해산하고는 그해 10월에 다시 총선을 치렀다. 거의 친위 쿠데타에 가까운 이 조치에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의원들이 항의했으나 법을 고치는 것부터 두마를 해산하는 것까지 모조리 합법적인 영역에서 전개되었기에 차르를 어떻게 옭아맬 수 있는 여지는 없었고, 하루아침에 다수당에서 내쫒기게 생긴 사회혁명당에서는 한동안 자제했던 적색 테러를 통한 혁명활동을 재개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자면 테러행위의 양 자체는 오히려 이전보다도 줄어들었는데, 이는 니콜라이 2세의 이 조치가 1905년의 혁명의 결과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며, 상류층에게 표를 몰아주긴 했으나 하위계급의 정치참여를 완전히 배제하지도 않은것 때문이었다.

이후 1907년 10월, 3차 국가두마 구성을 위한 총선이 치러졌다. 결과적으로 누구나의 예상대로 사회민주노동당과 사회혁명당으로 이루어진 좌파연합은 참패를 당했고, 10월당-입헌민주당-진보당으로 이어지는 우파들의 진보 블록이 전체 442석 중 무려 350석 가까이를 자치하며 압승을 거두었고, 트루도비키는 심지어 사회민주노동당의 17석보다도 적은 불과 13석을 차지하며 원내 제5당으로 쫒겨났다. 이후 트루도비키는 물론이고 사회혁명당은 3차 국가두마가 열리는 기간 내내 별 존재감을 드러내질 못했다.[3]

이후 1912년에 치러진 4차 국가두마 총선에서는 이전보다도 더 적은 10석을 얻으며 여전히 원내 제5당에 머물러야 했으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트루도비키 소속으로 원내에 입성하였다.

적백내전 시기 백군에 주로 가담한 진보당[4]보수주의 정당과 달리 케렌스키부터 중립에 가까웠고, 일부 당원들은 입헌민주당처럼 백군과 적군에 개별적으로 가담하기도 하였다. 다만 입헌민주당처럼 초기 백색 운동과 협력한 경우가 더 많았으며, 그 이후에도 일부 인사들은 보수주의를 받아들여서 전향하기도 했다.
[1] 단체명칭인 트루도비키를 영어화하면 trudoviks인데, 저 트루도비키라는 말 자체를 해석하면 이렇게 된다.[2] 요즘 쓰이는 사회민주주의적 민주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주적 사회주의란 뜻이다.[3] 아이러니하게도 스톨리핀은 자기가 다시 구성해 귀족들에게 힘을 몰아준 3차 두마에서 개혁정책을 지지해줄 세력을 스스로 몰아내는 바람에 그가 기획한 개혁정책 거의 대다수를 통과시키지 못했다.[4] 이름과 달리 우파 자유주의 정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