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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보로노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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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13대 방공군 참모장 니콜라이 보로노프 Никола́й Во́ронов | Nikolai Voronov | |||
본명 |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보로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Во́ронов Nikolai Nikolaevich Voronov | ||
출생 | 1899년 5월 5일[1]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상트페테르부르크 연방시) | |||
사망 | 1968년 2월 28일 (향년 68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크렘린 벽 묘지 | ||
재임기간 | 제13대 방공군 참모장 | ||
1941년 6월 ~ 7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 아버지 니콜라이 테렌티예비치 보로노프 어머니 발렌티나 안드레예브나 보로노바 | |
형제자매 | 자매 바르바라, 발레리아 | ||
배우자 | 니나 세르게예브나 보로노바 | ||
자녀 | 아들 블라디미르 | ||
학력 | M.V.프룬제 군사대학 | ||
복무 | 노농적군 | ||
1918년 ~ 1946년 | |||
소비에트 지상군 | |||
1946년 ~ 1968년 | |||
최종 계급 | 포병상원수 (소비에트 지상군) | ||
병과 | 포병 | ||
주요 참전 | 러시아 내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스페인 내전 할힌골 전투 겨울전쟁 독소전쟁 | ||
주요 서훈 | 10월 혁명 훈장 레닌훈장 (6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수보로프 훈장 1등급 (3회) 적기훈장 (4회) 적성훈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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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군인.2. 생애
사립 초등학교에 다니다 가정 형편 문제로 1914년 자퇴했다. 1915년부터 변호사의 비서로 일하다 아버지의 징집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가족 부양을 책임지게 됐다. 10월 혁명 이후 은행원으로 일했다.2.1. 러시아 내전
1918년 3월, 페트로그라드 사령부 직할 제2포병사관학교에 입학해 동년 가을부터 페트로그라드 예비박격포사단 제2포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됐다. 프스코프에서 니콜라이 유데니치의 부대를 상대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이후 1919년 마트베이 자하로프를 비롯한 사령관들의 추천으로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2.1.1.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1920년 4월부터 제16군 제10보병사단 제83보병연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유제포프 마을에서 교전 도중 심한 뇌진탕으로 기절했다. 보로노프가 눈을 떴을 땐 이미 폴란드군이 코앞에 다다른 뒤였다. 아군의 지원을 받아 도주할 수 있었으나 말을 몰 수 없을 정도로 다친 상태라 적진에 들어가버려 그대로 포로가 됐다. 단독, 폐렴, 발진티푸스를 앓다 후유증으로 다리가 마비됐다. 1921년 4월이 되어서야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22년 여름, 제27옴스크소총사단 곡사포대장으로 복무했다.2.2. 스페인 내전
1926년 여름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추천을 받아 프룬제 군사대학 입학 시험을 치게 됐다. 이탈리아 파견 복무 당시 내전 발발과 동시에 스페인에서 포병 고문으로 임명돼 훈련, 보급을 지휘했다. 1937년 6월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1937년 9월 10일 투하쳅스키 처형 사건에 휘말려 같이 처형된 니콜라이 로고프스키를 대신해 노농적군 포병 총사령관으로 임명됐다.2.3. 제2차 세계 대전
2.3.1. 할힌골 전투
극동 군관구 주둔 부대 훈련을 감독한 뒤 제1군단 포병대를 훌륭하게 지휘한 공로로 적기훈장을 받았다.2.3.2. 폴란드 침공
1939년 가을, 벨로루시 군관구 포병부대를 지휘하다 교통사고로 사망 직전까지 갔다. 가슴에 박힌 금속 조각이 가까스로 심장을 비껴 가긴 했지만 뇌진탕, 갈비뼈 4개 골절,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오랫동안 입원했다. 11월에 퇴원한 보로노프는 겨울전쟁을 위해 다시 복직했다.2.3.3. 겨울전쟁
레닌그라드 군관구를 지휘하며 만네르헤임선을 돌파하는 제7군을 지원한 공로로 레닌훈장을 받았다. 1940년 6월 4일 노농적군에 장군 계급이 도입되자 포병상장으로 진급하며 키예프 특수군관구 포병부대를 지휘했다.2.3.4. 독소전쟁
독일 육군 기갑부대를 상대하기 위해 레오니트 고보로프와 함께 새로운 포병 교리를 구상했다. 그들의 연구 결과는 바로 스타프카에 전달됐으며, 보로노프는 소련 국방인민위원회 위원으로 복무했다. 모스크바 예비전선군을 이끌어 레닌그라드 전선군을 지원한 뒤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소련 방공망의 문제점을 직접 보고했다. 1942년 6월 2일 국방인민위원부 명령에 따라 최전방 전선의 모든 방공부대를 보로노프가 총괄하게 됐다.8월 중순 윈스턴 처칠이 소련군과의 협상을 위해 모스크바 방문하자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보리스 샤포시니코프와 함께 소련 대표단으로 나서게 됐다. 9월부터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와 남서부전선, 스탈린그라드 전선을 둘러보며 천왕성 작전을 준비했다. 최종 정찰을 끝낸 뒤 12월부터 본격적으로 교전을 지휘했다. 독일 국방군을 성공적으로 궤멸시키자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 데미얀스크 전투, 쿠르스크 전투, 스몰렌스크 전투에 참전했다. 1944년 초 건강 문제로 최전방 사령관직을 사임한 뒤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2.4. 전후
1958년 10월부터 소련 국방부 감찰관 고문을 역임하다 1965년 5월 7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법령에 따라 레닌훈장,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8년 2월 23일 암 수술을 받았으나 28일까지 깨어나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후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됐다.3. 진급 이력
4. 평가
포병에 대해 저명한 전문가였다. 보로노프의 조언과 지식은 항상 유용했다.
키릴 메레츠코프
키릴 메레츠코프
스탈린이 보로노프를 주요 군사 전문가로 여기며 신뢰했다. 그는 화포를 비롯한 여러 신규 무기 개발에 힘을 써줬다. 보로노프를 아는 모든 군인들이 그를 존경했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5. 여담
- 매년 11월 19일 '로켓군과 포병의 날'[2]이 오면 러시아 전략로켓군 병사들과 퇴역 군인들은 보로노프의 묘소를 찾아가 참배한다.
- 축구에 대한 애정이 대단해 1920년대부터 모스크바 지상군 축구 아카데미에서 골키퍼로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