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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d700> | |||
본명 |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몰로토프 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Мо́лотов Vyacheslav Mikhaylovich Molotov | ||
출생 | 1890년 3월 9일 | ||
러시아 제국 뱟카현 야란스키구 쿠카르카 (現 러시아 볼가 연방관구 키로프주 소베츠크) | |||
사망 | 1986년 11월 8일 (향년 96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노보데비치 묘지 | ||
재임기간 | 제3대 인민위원장 | ||
1930년 12월 19일 ~ 1941년 5월 6일 | |||
제3대 외무인민위원 | |||
1939년 5월 3일 ~ 1946년 3월 15일 | |||
초대 외무장관 | |||
1946년 3월 19일 ~ 1949년 3월 4일 | |||
제3대 외무장관 | |||
1953년 3월 5일 ~ 1956년 6월 1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d0000><colcolor=#ffd700> 본명 |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스크랴빈 (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Скря́бин) | |
부모 | 아버지 미하일 프로크호로비치 스크랴빈 어머니 안나 야코블레브나 네보바티코바 | ||
형제자매[1] | 형 미하일, 빅토르, 니콜라이,[2] 블라디미르 누나 지다니아 남동생 세르게이 | ||
배우자 | 폴리나 젬추지나 | ||
자녀 | 딸 스베틀라나 | ||
학력 | 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교 (경제학) | ||
종교 | 무종교 (무신론) | ||
소속 정당 | [[소련 공산당|]] | ||
주요 서훈 | 레닌훈장 (4회) 사회주의노력영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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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언론인 출신 혁명가, 정치가, 외교관. 소련의 인민위원회 의장(총리), 외무인민위원(외무상)을 역임했다.이오시프 스탈린의 핵심 측근 중 한 사람이었으며, 스탈린 시대 소련의 외무상을 역임하며 1930년대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쳐 냉전 초기까지 소련의 외교를 총괄했다. 스탈린의 호전적 외교 정책의 전면에 나선 실행자였으나, 전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스탈린의 신임을 잃었다. 스탈린 사후 집단지도체제의 일원이 되었지만 반흐루쇼프의 선봉에 섰다가 니키타 흐루쇼프의 반격으로 실각한 후 한직에 있다가 은퇴했다.
2. 생애
2.1. 초창기
본명은 뱌체슬라프 스크랴빈(Вячеслав Скрябин)이지만 다른 볼셰비키 지도부와 마찬가지로 가명을 만들어 썼다. 몰로토프(Молотов)라는 가명은 '망치(молот)'에서 따왔다. 당시 혁명가들이 다들 그렇듯 가명을 썼고 몰로토프라는 가명이 실제 성보다 더 유명해졌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중산층 지식인 집안이면서 동시에 할아버지 대부터 러시아 제국 차르 전제군주제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혹은 인민주의 성향 반정부 운동가를 배출하여 나름 명망이 있는 집안이었다. 그 역시 반정부 운동에 뛰어들어 1906년부터 볼셰비키 당의 당원이자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1909년과 1915년에 체포되어 시베리아에 유배되었으나 당시 러시아 제국의 허술했던 유배 특성상 금방 탈옥한 후 은신하여 볼셰비키의 기관지인 프라우다의 편집장이 되었는데 이때 스탈린과 인연을 만들게 된다.러시아 혁명 이후로는 우크라이나 당조직에서 활동했고 1921년, 10차 당대회에 정치국 후보위원 및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그는 단정하게 정돈된 양복을 입고 회의장에 나오는 등 관료적인 성격이 강한 인물이었다. 관료적이라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변화를 싫어하고, 책임 소재를 따지며 모험적인 일을 회피하는 것인데 이런 성격은 변화를 추구하는 혁명가들이 대체로 혐오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관료주의라는 말은 공산국가에서는 좋지 못한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어쨌든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관료나 관료주의적인 성향의 인물이 필요하고 심지어 혁명가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그는 볼셰비키 내에서도 이런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다.
평소 독설가로 이름이 높았던 레프 트로츠키는 이런 점을 들어 몰로토프를 자주 질책하고 모욕을 주었다고 한다. 심지어 어느 날은 트로츠키가 너무 심하게 조롱하자 분노에 몸을 떨면서 "모든 사람이 트로츠키 동지처럼 똑똑할 수는 없소" 같은 말까지 했다.[3] 레닌도 몰로토프의 지나친 관료주의적인 성향 및 융통성 없음을 지적하고 비판할 정도였다. 하지만 비슷하게 관료주의적인 성향이 있던 스탈린과는 코드가 잘 맞는 편이었고, 이것은 스탈린 치하에서 그를 출세로 이끈다.
이런 그가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 사후 권력투쟁 과정에서 트로츠키와 권력을 두고 경쟁했던 이오시프 스탈린을 지지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다만 스탈린에 대한 비판은 삼가지 않았으며, 스탈린 집권 초반까지만 해도 몰로토프는 충복이라기보다는 스탈린의 동맹자였다. 하지만 스탈린이 절대권력을 손에 넣자 몰로토프는 스탈린의 명령을 기계적으로 실행하는 부하로 전락한다.
2.2. 전성기
이처럼 레닌 사후 권력투쟁에서 스탈린을 지지한 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중앙정계에서 빠르게 승진한다. 1926년에는 정치국원으로 승진해 모스크바 지구당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1930년에는 부하린파였던 전임자 리코프가 실각하며 공석이 된 소련 인민위원장(소비에트 연방의 행정수반)에 올랐으며 이에 따라 1930년 12월 전원회의에서 서기에서 소환되었다. 소브나르콤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대숙청에도 적극 관여하였는데 니콜라이 예조프가 처형당한 정치범들의 아내들을 모스크바에서 추방할 것을 건의하자 몰로토프는 연좌제를 적용하여 모두 처형하라고 지시했다.[4] 1939년 4월 영불소 3각 동맹 구축을 통해 나치 독일을 견제하고자 했던 친서방 성향인 막심 리트비노프를 대체하여 외무인민위원에 임명되었다.물론 서방과의 접촉 역시 계속되어서 리트비노프가 해임된 후에도 한참 뒤인 8월 20일까지는 폴란드 침공을 대비해 영불소 삼각회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소극적인 태도와 더불어 나치 독일로부터 동유럽 분할을 제안받은 스탈린은 결국 8월 23일 나치 독일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1939년 12월 2일 모스크바에서 핀란드 공화국과의 조약을 체결하는 모습[5] |
이때 몰로토프에게는 소련 인민위원회의 제1부의장 겸 외무인민위원 자리가 유지되면서 소비에트 연방의 2인자임이 공식화되긴 했으나 이후 스탈린은 몰로토프에 대하여 도가 넘는 비난과 공격을 퍼부었고 1941년 5월에는 몰로토프가 마치 적이라도 되는 양 공격하여 몰로토프가 반발하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세간에서는 스탈린이 몰로토프를 1941년에 숙청하려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돌았다.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이 발발한 직후 스탈린은 갑작스런 독일의 공격에 충격받았다. 이에 소련 지도부는 스탈린의 눈 밖에 났던 몰로토프를 2인자로 공식화한 집단지도체제를 통해 스탈린에게 전쟁을 지휘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때 국가계획위원장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는 만약 스탈린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몰로토프를 지도자로 삼아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스탈린은 전쟁을 지휘해달라는 측근들의 요구를 수락하고 다시 일선으로 복귀하여 전쟁 최고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지휘했다. 항간에 나오는 말처럼 이때 소련 지도부가 스탈린에게 전쟁을 지휘해주지 않으면 몰로토프에게 권한을 넘길 것을 요구해야 한다고 합의한 것까진 아니었지만, 이미 스탈린의 눈 밖에 난 몰로토프의 지위를 공식화하고 스탈린에게 스탈린의 의중과 관계없이 합의된 체제를 강요했다는 것 자체가 스탈린의 권위를 크게 침해한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독일군을 물리치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에 스탈린은 이를 묵인했다.
전쟁 기간 중 몰로토프는 국가방위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영국 및 미국과 동맹 체결, UN 총회를 창설한 샌프란시스코 회의(1945), 테헤란 회담(1943), 얄타 회담(1945), 포츠담 회담(1945) 등 연합국의 각종 굵직한 회담에 모두 이름을 내밀었다. 1947년에는 미국의 마셜 플랜에 대항하는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 계획인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1949년 1월부터 이것이 실행되었다.
2.3. 2차대전 이후
종전 이후 런던 회담 등에서 미국과 각을 세우면서 동유럽과 일본의 분할 문제를 놓고 대립했고[6] 이때 서방에 보인 여러 태도가 트집잡혀 스탈린에게 맹비난을 당해야 했다. 게다가 스탈린은 자신들의 측근들이 자신에게 요구를 강요했던 일을 잊지 않았고, 여기에 전후 서구 언론에서 스탈린의 후계자는 몰로토프가 틀림없다, 몰로토프와 주코프가 스탈린의 후계 자리를 놓고 다툰다 등의 기사를 보도하는 동시에 몰로토프가 서구 언론인들에게 검열 완화를 약속했다는 정보까지 나오면서[7] 스탈린은 몰로토프가 자신을 대체할 '합리적 지도자'라는 것을 서방에 보여주려고 한다고 몰로토프를 맹비난하면서 그를 숙청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에 측근들은 몰로토프가 별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걸 알고 그를 변호했으나 그들의 어설픈 옹호 때문에 스탈린이 오히려 더 길길이 날뛰자 즉각 침묵했다. 이때 몰로토프가 눈물을 흘리며 "당신의 신뢰야말로 당의 신뢰"라고 싹싹 빌고 다른 측근들도 스탈린이 지시하는 대로 몰로토프를 벌주었다고 달래자 화를 누그러뜨려 근신 정도로 처벌을 완화했다.일단 위기를 넘긴 몰로토프였지만 스탈린은 런던 회담 등에서 몰로토프가 서방에게 합리적인 협상조건을 제시하자 몰로토프를 대서방 유화주의자, 서방과 결탁한 음모가로 의심하게 되었다. 거기에 유대인인 몰로토프의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 역시 말년에 유대인들이 소련보다 시온주의에 충성한다고 의심했다.[8] 결국 1948년 12월에 폴리나 젬추지나가 이스라엘이 건국되었을 때 "드디어 우리에게 조국이 생겼다"라는 발언으로 인해 체포되었고, 1949년 3월에는 외무장관 직을 사임하고 대숙청 시기 모스크바 재판을 지휘했던 검사총장 안드레이 비신스키로 교체된다.[9] 다만 다른 측근들의 배려를 통해 완전히 숙청되거나 쫓겨나진 않았으나 스탈린은 몰로토프를 끝까지 냉대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몰로토프도 자신의 전임자였던 막심 리트비노프를 스탈린이 불신하는 점을 이용해 외무장관직을 획득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몰로토프 자신마저도 스탈린의 불신으로 인해 몰락하게 된 셈이다.
1952년 19차 당대회에서 몰로토프는 정치국에서 개편된 간부회 위원으로는 재선되었으나, 간부회의 핵심인 사무국에는 탈락하는 굴욕을 맛보았다. 여러 학자들은 10여명의 작은 정치국에서 한명을 숙청하는 것은 눈치가 보이지만 30명 규모의 거대한 간부회에서 한명이 숙청하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 덜하므로 이것이 몰로토프와 아나스타스 미코얀에 대한 숙청의 사전포석으로 보기도 한다.
2.4. 흐루쇼프 집권기 및 출당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자 다시 복귀하였고, 체포된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도 석방되었다. 스탈린 이후에 여러 고만고만한 경쟁자들은 합의로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이끄는 집단지도체제를 이끌었는데, 몰로토프도 여기에 참여하였다.몰로토프는 니키타 흐루쇼프와 짜고 서방에 매우 전향적인 유화정책을 제시한 라브렌티 베리야를 반역자로 몰아 숙청, 처형하는데 한 몫 했으나[10], 흐루쇼프의 반스탈린 정책이 시작되자 그와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1957년 6월, 흐루쇼프 제거 음모를 이끌어 정치국 투표에서 찬성 7표, 반대 4표로 그를 몰아내는데 성공한 듯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국방장관 게오르기 주코프와 짜고 계략을 써서 이 결정이 효력화되는 것을 막고, 그 사이에 정치국에 밀려 상징적이던 기관인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하는 것으로 반격했다.[11] 흐루쇼프는 1957년 9월 중앙위원들이 전원 참석한 회의에서 중앙위원들을 동원하여 반격하였고 전원회의는 몰로토프, 흐루쇼프 및 모든 고참 공산당원들이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진흙탕 싸움이 되었으나 흐루쇼프는 스탈린 사후인 1954년부터 권력투쟁에 대비하여 당 곳곳에 자기사람을 계속 심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전원회의 투표에서 머리수로 이겨버렸다. 그 결과 몰로토프는 정치국과 장관회의에서 쫓겨나서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몰로토프는 외교일선의 한직으로 복귀하여 몽골 대사(1957~1960년), 국제원자력기구 (IAEA) 상임대표(1960~1961년)를 역임한 후 1962년에 은퇴했다. 빈에 있던 시절인 1962년에 흐루쇼프가 축출되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접하고 아내 폴리나와 함께 관저에서 춤을 춘 일화가 남아있다. 몰로토프는 은퇴 직후 크렘린 근교의 고급 간부 아파트에서 계속 거주하는 것을 허락받아 남은 시간의 대부분을 레닌 도서관[12]에서 독서를 하면서 보냈다.
하지만 1963년 흐루쇼프의 평화 공존 정책을 비판하는 논문을 작성해 1964년 6월에 당중앙위원회 총회에서 해당(害黨) 행위자로 찍혀 비판받아 소련 공산당에서 출당되었다.
2.5. 은퇴 생활
몰로토프는 흐루쇼프를 비판해서 당과 공직에서 쫓겨났지만, 전임공직자로서 연금을 받는 야인으로 지냈다. 이후 도서관에 드나들면서 독서와 연구로 소일했다.본인은 흐루쇼프 이후 소련의 최고지도자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콘스탄틴 체르넨코는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유리 안드로포프는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이후 지속적으로 자신의 복권을 당에 요청하였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남편과 달리 당에서 추방당하지 않았던 아내 폴리나도 흐루쇼프를 찾아가 남편을 복권시켜 달라고 청하였지만, 흐루쇼프는 대답 대신 몰로토프가 예조프시나 당시 연좌제로 처형을 지시했던 정치범들의 아내들의 명단을 보여주며 애둘러 거절했다.
흐루쇼프가 실각한 후 브레즈네프 시절인 1968년에 부분적으로 복권되었고, 그의 업적이 소련의 공식적인 백과사전인 소련 대백과사전에 재수록되었다. 어쨌든 2차대전 이후의 세계 질서 재편에서 소련의 입장을 적극 주장해 관철시킨 공이 있기 때문에 흐루쇼프 시절 실각한 말렌코프나 카가노비치와는 달리 기록말살형에는 처해지지 않았으며 10월 혁명과 2차 대전 당시를 묘사한 소련 영화에 계속 등장했다. 하지만 당적은 1980년대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1970년 폴리나가 사망했을 때 브레즈네프는 몰로토프가 장례식에서 최후의 공개연설을 하는 것을 허락했다.
정작 몰로토프가 욕했던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집권한 후에는 상황이 좀 달라졌다. 몰로토프가 다시 복권과 사면을 요청하자 체르넨코는 문서고에서 몰로토프에 관련된 자료를 가져올 것을 지시하여 이를 면밀히 검토하였고 1984년 7월 정치국 회의에서 몰로토프의 복권을 제안했다. 이는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체르넨코가 직접 몰로토프를 불러 2분간의 면담을 가지고 그의 사면을 알려주었다. 몰로토프는 자신이 어째서 출당되었는지 이해 못하겠다고 투덜대면서도 "동지는 옳은 일을 하셨습니다. 덕분에 동지는 인민의 지지를 받을 것입니다."라며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뻐했다.
마침내 명예를 회복하여 다시 당원이 된 그는 2년 후인 1986년 11월 8일에 96세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최고령 당원이었다고 한다. 딱 5년만 더 살았으면 소련 건국을 지켜본 이 늙은 볼셰비키가 소련 망국까지도 볼 수 있었다. 말년에는 치매 증상으로 인하여 정신이 오락가락한 모습을 보였으나 카가노비치처럼 정신줄을 아주 놓아 버리진 않았다고 한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로 인해 사망 5개월 전인 6월 18일에 희생자들을 위해 100루블을 기부하였다.
몰로토프 본인은 매우 청렴한 사람이었다. 사망한 후 재산을 정리한 결과 겨우 500루블이 남아 있었는데[13] 대부분 몰로토프의 장례식을 치르는데 쓰였다. 소련 관영언론은 몰로토프의 죽음에 대해서 비중 있게 다루지 않고, 짤막한 부고기사를 내는데 그쳤다. 200명 정도의 관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이 열렸고 민간인 추모객은 참석이 금지되었다. 그의 시신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먼저 사망한 아내 폴리나와 함께 합장되었다.
3. 여담
- 주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윗사람이 무엇이든 시키면 토를 달지 않고 어떻게든 해내면서도 자신의 색깔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는 흔히 볼 수 있는 2인자형 모습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가 관료 생활을 하면서 정면으로 상관의 결정을 거스르고 이의를 제기한 건 딱 한 번밖에 없었는데, 볼쇼이 극장 운영 문제로 레닌에게 이의를 제기했던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 한편으로 기계와 같이 철저한 업무 능력을 자랑하는 관료였다. 그의 하급자 겸 후임자가 되는 안드레이 그로미코의 증언에 따르면, 수많은 서류를 들여다 보면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부하들에게 "옆방에 가서 13분만 쉬고 오겠네."라고 말하고서는 옆방에 가서 정확하게 13분 쉬고 다시 업무 현장으로 돌아왔다는 일화도 있었다.
- 그가 일하는 방식을 지켜본 윈스턴 처칠은 그에 대해서, "로봇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몰로토프일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 다만, 그를 완전히 무색무취한 성격에 상급자에게 절대 복종하는 관료로 보는 것은 그에 대한 잘못된 평가일 수 있다. 몰로토프는 대서방 강경파로서 리트비노프와 대립했고, 공업화 정책에 있어서도 온건파였던 세르고 오르조니키제와 대립하며 급진적인 공업화 정책을 주장했으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자신의 상급자인 스탈린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원래 '통설'대로라면 스탈린은 몰로토프를 제지해야 맞겠지만, 스탈린은 양자 사이를 중재하며 타협안을 제시했고 몰로토프와 각료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스탈린이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를 위시한 각료들을 좌지우지하고 경제 정책을 집행한 것은 2차 5개년 계획 시기가 되어서부터였다.
몰로토프는 스탈린의 대숙청에 적극 동조했다. 그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무고한 인민들의 처형 명령서에 서명했다. 보로실로프, 카가노비치, 미코얀 등이 부하린을 비롯한 옛 볼셰비키들에게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이들에 대한 숙청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때에도 몰로토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 화염병을 뜻하는 은어인 몰로토프 칵테일은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 소련과 핀란드 사이에서 벌어진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이 핀란드에 폭격을 퍼붓고 있을 때 몰로토프가 선전방송으로 "우리 군은 핀란드 인민에게 빵을 공수하고 있다."라는 망언을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기만성 발언에 빡친 핀란드 측에서는 소련군의 폭격기와 그 폭격기에서 투하된 집속탄[14] 등의 폭탄을 각각 "몰로토프 아저씨" 및 "몰로토프의 빵바구니"라고 조롱했으며, 핀란드인들이 답례로 "너네 소련한테 빵을 받았으니까 그 보답으로 너네도 우리 핀란드가 주는 술도 한 잔 마셔야지? 이거나 먹어라! 빵값이다!"라면서 화염병에 "몰로토프에게 보내는 칵테일"이라는 이름을 붙여가며 소련군 전차로 투척한 것이 어원이라고 한다.[15][16] 사실 영어권에선 아예 화염병을 Molotov라고 지칭하는데, 이는 몰로토프 칵테일이 유명해지기 전에 영어권에 화염병을 뜻하는 단어가 없었던 탓도 있다. 원재료에서 따와 Petrol bomb(휘발유 폭탄)이라고 불렀지만[17] 전자가 어감이 더 깔끔한데, 약간 다르지만 개틀링과 비슷한 경우이다.
- 전간기까지만 해도 몰로토프의 공적은 공히 인정되어 1938년에는 키로프급 순양함 중 하나가 몰로토프라는 함명을 받았다. 그러나 1957년 흐루쇼프에 대한 쿠데타 실패로 그의 이미지가 실추되고 제명되기에 이르자 같은 해에는 순양함 몰로토프도 영광을 뜻하는 "슬라바(Слава)"로 개명되었다.[18]
- 소련에서 1930년대에 생선 통조림의 생산을 시작했는데 원래 러시아에서 금육일이라고 해서 수요일과 금요일에 생선을 먹는 것이 전통이기는 했지만 생선 통조림이 낯설었던지라 재고로 쌓여 있는 경우가 많아서 골칫덩어리였다. 그러다가 몰로토프가 당회의에서 밀수꾼이 생선 통조림에 보석을 넣어 해외로 유출시키려교 한 사건과 그 전말에 대해 직접 발표하자 보석을 구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생선 통조림의 인기가 폭증하여 순식간에 매진되었고, 그날부로 생선통조림이 소련인들의 일상식이 되었다.
- 사후 구술회고록이 출간되었다. 정확히는 언론인 펠릭스 추예프가 몰로토프와 17년간 140회 인터뷰하면서 주고받은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흔치 않은 원로 볼셰비키의 직접 증언이어서 1차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다만 스탈린 숭배라던가, 자기 과오를 덮는 것을 어느 정도 걸러 들을 필요는 있다. 대표적으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서 영토 분할 같은 비열한 이중 합의가 없었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한다던가...
4. 매체에서
- 1991년작 이너 써클에서는 빅토르 발라바노프가 분했다. 위의 사진에서 맨 오른쪽 인물.
- HBO에서 제작한 스탈린 전기영화에서는 영국 배우 클라이브 메리슨이 분했다.
* 스탈린의 죽음과 후계자들의 암투를 다룬 블랙코미디 영화 《스탈린의 죽음》에서 몬티 파이선의 멤버 마이클 페일린[19]이 분했다. 애처가지만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가 시오니즘 연루 의혹으로 스탈린의 미움을 받아 감금된 상태였다. 더욱이 스탈린의 별장에서 열린 모임 이후 헤어지기 직전 베리야가 말렌코프와 흐루쇼프에게 몰로토프가 곧 숙청될 것임을 암시한다.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 베리야는 권력투쟁에서 몰로토프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죽은 걸로 알려진 젬추지나를 석방한다. 하지만 베리야가 정치국 관료들이 서명한 숙청자 리스트를 들이대며 협박하는 모습을 본 몰로토프는 베리야를 위험한 인물이라 판단하고, 이후 흐루쇼프와 함께 베리야를 숙청하는데 동의한다.
- 소련 NKVD의 카틴 학살을 주 배경으로 한 2007년의 폴란드 영화 카틴에서 등장한다. 작중 독소 폴란드 점령으로 나치와 함께 독일은 서부, 소련은 동부 지역을 점령한 상황인데, 교회의 라디오 방송에서 폴란드 정부가 바르샤바의 함락 소식을 전한다. 이때 몰로토프의 "이제 더 이상 폴란드의 수도는 바르샤바가 아니다"라는 연설이 함께 섞여나오는 방송을 폴란드군들이 청취하는데, 음성이 섞여나와 군인들이 "누구의 목소리지?" 하며 궁금해하자 교회의 목사가 "소련의 외무장관, 몰로토프요."라고 몰로토프를 언급한다.
-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독소전쟁이 터진 후 스탈린에게 매일같이 갈굼받고 영국과 미국에게 연료를 구걸하는 처지로 전락해버린다. 이후 독일에게 평화협상을 시도하지만 결렬되는데, 막상 협상이 결렬되었음에도 히틀러에게 환대를 받고 고급 시계까지 선물받는다. 사실 이것은 히틀러가 스탈린의 의심병을 키워 스탈린이 직접 몰로토프를 숙청하게 만들기 위한 수작이었고, 이후 아내 폴리나가 유대인 박해가 심해져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한 것과 카가노비치와 술을 마시며 독일과 강화를 맺어야 한다고 한 것이 NKVD의 귀에 들어가며 숙청되어 버린다.
5. 참고문헌
- 브리태니커
- 두산백과사전
- 스탈린 평전, 올레크 흘레브뉴크, 삼인.
- 스탈린 평전, 로버트 서비스, 교양인.
- 스탈린 평전,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세경사.
- 제2차 세계대전, 앤터니 비버, 글항아리.
- 실패한 제국 1권, 블라디슬라프 주보크, 아카넷.
- 냉전의 역사, 존 루이스 개디스, 에코리브르.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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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래 10남매였으나 자매 세 명이 요절하면서 사실상 7남매라 봐도 무방하다.[2] 음악가, 니콜라이 놀린스키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3] 트로츠키는 이미 러시아 10월 혁명 전부터 몰로토프를 싫어했는데 몰로토프에게서는 몰로토프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명민함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4] 스탈린 사후 관련 문서들을 읽은 흐루쇼프는 전율을 금치 못했다고 회고했다.[5] 뒤에 선 인물들은 왼쪽부터 안드레이 즈다노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이오시프 스탈린, 오토 빌레 쿠시넨[6] 이는 스탈린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몰로토프는 외교관이라는 배경을 생각하면 당연하지만 스탈린보다는 훨씬 서방에 유화적인 인물이었다. 예컨대 스탈린의 리비아 위임통치령 요구를 몰로토프는 터무니없는 요구라고 봤고 동유럽 분할에 있어서도 서방과 협조할 용의가 있었다.[7] 서방 언론은 몰로토프가 서방 언론인들과 타협을 시도했다고 보도했으나 몰로토프는 서방 기자들이 송고하는 기사들에서 쓸데없는 편집이 이뤄지는 것을 제지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8] 실제로 스탈린은 말년에 편집증적인 증세가 더욱 심해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의심이 극에 달해 주치의나 경비병마저 신뢰하지 않으며 사람들을 멀리했는데, 이런 편집증적인 의심은 자신의 죽음마저 앞당긴 원인이 되었다.[9] 여기에는 몰로토프가 미국에서 기차를 탄 이야기가 스탈린의 의심을 부추긴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에는 몰로토프가 기차로 이동하는 도중에 미국에서 관광하느라 일부러 시간을 때웠다는 미국 외교관의 농담에서 시작되었고, 이 때는 스탈린이 그냥 웃어 넘겼으나 이 일을 결코 잊지 않았고, 흐루쇼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말년에 스탈린은 미국에서 몰로토프가 기차를 타고 이동한 것은 몰로토프의 개인 기차가 미국에 있다는 증거이며 몰로토프가 미국으로부터 개인 기차를 받을 만큼 미국에 충성하는 스파이라고 증거라고 여겼다고 한다.[10] 나중에 몰로토프는 재밌는 회고를 하는데 베리야도 흐루쇼프가 자신을 회치려는 것을 눈치채고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에 몰로토프는 "내가 동지의 편이 되는게 아니라 동지가 '우리 편'이 되는 것이 나을 것이오."라고 대답했는데 베리야 평전의 저자 에이미 나이트는 이것이 대서방정책에 있어서 막가나는 유화정책을 더 펼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어쨌거나 베리야는 몰로토프를 회유하는데 실패했다.[11] 공산당에서 최고 지도기관은 당대회이고, 당대회와 당대회 사이를 당중앙위원회가,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와 전원회의 사이를 정치국이 주관하고, 레닌 말기, 스탈린 시절부터 정치국 내부의 최고 핵심들이 쑥덕거려 처리하는 체제가 완성되면서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정기적으로 소집은 되어도 의미 없는 상징적 의결기구로 전락한지 오래였다.[12] 오늘날 러시아 국가 도서관[13] 당시 소련 기준으로 2~3달치 급여에 해당되는 돈이었다.[14] RRAB-1/2/3 집속탄.[15] 참조.[16] 당시 소련군 전차는 연료가 휘발유였기 때문에 잘 터져나가자 경유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전차가 디젤 엔진을 사용하게 만들도록 기여한 일등공신인 셈이다.[17] 영국에서는 저 "Petrol Bomb"이 화염병을 지칭하는 정식 명칭으로 쓰인다.[18] 이 와중에도 몰로토프는 "그 함은 처음엔 내 성을 따 가더니 이젠 내 이름을 따 갔다" 라는 농담을 남겼다. 슬라바는 남자 이름 뱌체슬라프의 애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농담을 할 정도로 스탈린 사후 불과 4년 사이에 살벌했던 정계 분위기가 완화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19] 그 유명한 농노 데니스다.
분류
- 소련 총리
- 소련 제1부총리
- 소련 외무장관
- 소련 노력국방위원장
- 소련 공산당 모스크바 제1서기
-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상무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1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2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3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4기 연방평의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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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 대표/러시아
-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자
- 키로프주 출신 인물
- 사회주의노력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