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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08:55:07

레닌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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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레닌의영묘.jpg
Мавзоле́й Ле́нина

1. 개요2. 레닌의 건강악화 및 사망 3. 스탈린의 보존 결정4. 영묘 건립5. 유해 보존6. 러시아 연방의 이장 논란
6.1. 옐친 시대6.2. 푸틴 시대
7. 관람8.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소련국부 블라디미르 레닌방부처리시신이 안치된 영묘.

바로 뒷편에 크렘린 벽 묘지가 있다.

2. 레닌의 건강악화 및 사망

레닌은 1917년에 비교적 젊은 나이인 47세에 10월 혁명을 성공시켜 러시아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으나 1918년 8월 암살 시도로 총알을 세 발이나 맞았고 건강이 상당히 악화되었다. 더구나 한 발은 폐에 그대로 박혀 있었으나 정국이 매우 급박하게 변했기 때문에 미처 빼내지도 못하고 러시아 내전 및 여러 혁명 업무의 격무에 시달렸다. 그 결과 51세인 1921년부터는 정무를 관장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1922년 4월 몸에 박힌 탄환을 제거하기 위한 수술을 받았으나 수술 직후인 1922년 5월 뇌졸중을 일으켜 몸의 상당 부분이 마비되었다. 7월에 일단 회복되었으나 12월 두번째 뇌졸중을 일으켰고 이후에는 정상적인 출근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지속적으로 정무에 관심을 보였다. 이때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맡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레닌의 부재를 틈타 여러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했는데 레닌은 스탈린이 자신의 뜻에 반해 일을 처리한다는 것을 알고 매우 스트레스를 받았고 병세는 계속 악화되었다. 레닌은 자신이 회복하지 못할 것을 직감해 인지능력이 남아 있을 때인 1923년 1월경 유언장[1]의 작성을 마치고 자신이 죽은 후에 개봉하도록 봉인했다.

1923년 3월 레닌은 세번째 뇌졸중을 일으켰고 그때부터는 실어증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언어기능은 조금씩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으나 레닌의 건강은 회복하지 못하고 1924년 1월 사망했다.

3. 스탈린의 보존 결정

파일:external/static.guim.co.uk/Lenins-embalmed-corpse-007.jpg
레닌의 유해
1924년 1월 21일 레닌이 사망하자 그의 유해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수많은 추모의 물결이 몇 주 동안 한겨울의 추위를 뚫고 몰려왔다. 장례식이 치러진 때가 겨울이었기 때문에 시신이 부패하지 않았다. 레닌이 죽자 그의 시신을 보존해서 죽은 자를 후대에 부활시켜야 한다는 전보가 소련 정부에 쇄도했다.

여기에 영감을 받은 후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다른 혁명동지들, 레닌의 아내이자 혁명 영웅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엠버밍을 결정했다. 한술 더 떠 레프 트로츠키나 다른 고참 볼셰비키들도 대부분 레닌의 엠버밍을 반대했다. 특히 기독교(러시아 정교회)의 전통이 강한 러시아에서는 성당에 안치된 성인이나 성자의 유해가 숭배의 대상이 되었는데 트로츠키는 레닌의 유해를 보존하면 이런 미신적인 관습이 과학을 표방하는 마르크스주의 국가에서 재연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전직 신부 지망생이었던 스탈린은 대중이 숭배 대상을 찾는 경향을 잘 알고 있었고 레닌을 우상화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레닌의 제자를 자처한 자신의 집권 기반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2] 그리하여 레닌을 존경하는 일반 대중의 여론을 핑계로 레닌 유해 영구 보존을 결정했다.

시진 보존 작업을 주도한 사람들은 모스크바 대학교 생화학연구가 일리야 즈바르스키와 우크라이나 하리코프 의대의 해부학자 블라디미르 비오로비요프였다.

4. 영묘 건립

파일:lenin-mausoleum-plan-01.jpg
레닌 영묘 설계도
첫번째 영묘는 레닌이 사망한 직후 크렘린 벽에 맞닿은 붉은 광장 옆에 건립되었으나 이것이 너무 작다고 판단한 소련 당국은 다시 짓기 시작했다. 1924년에 목재로 된 두번째 레닌 영묘가 완공되어 레닌 유해가 대중에 공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25년에 목조 건물 내부에서 곰팡이가 발견되자 소련 당국은 온도와 습기조절 갖춘 현대식 건물을 지을 것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석재 (반암, 대리석, 석영)를 사용한 영묘 공사가 시작되었고 1930년에 완공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전에는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엠버밍된 레닌의 시신을 공개했으나 1930년부터는 상시로 대중에 공개되기 시작되었다.

독소전쟁 발발 직후 모스크바가 공격받을 위기에 처하자 레닌의 유해를 잠시 쿠이비셰프로 이전했다가 이후 원래 자리에 안치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에는 스탈린도 방부처리되어 생전의 잠자는 듯한 모습으로 레닌 곁에 합장되어 방문객의 관람 대상이 되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영묘 입구에도 레닌과 스탈린의 이름이 동시에 적혀 있었다. 그러다가 흐루쇼프 시대에 스탈린이 격하되면서 뒷편 벽 묘지로 이장됐다.

레닌이 신처럼 추앙되던 소련 시절에도 시신에게 해를 가하려는 시도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5. 유해 보존

레닌의 영구보존 임무를 수행하는 곳은 '생물보존연구센터'인데 체계상으로는 러시아 의학아카데미 산하 전러시아 약용방향식물연구소(VILAR)의 관할이다. 소련 시절에는 기관의 존재가 비밀에 부쳐진 터라 소련 붕괴 전까지는 관람객들 사이에선 모형이란 소문이 돌았다가 소련 붕괴 후에 실물로 밝혀졌다.(NK조선 기사)

보존팀은 시신의 장기 보존을 위해서 이집트 미라와 비슷한 절차로 레닌의 시신을 처리했다.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방부기술이나 약품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3] 시신의 복부 부분을 절제하여 부패하기 쉬운 내부 장기를 모두 제거했다. 뒤통수 부분도 절제하여 두뇌도 적출했는데 이것은 연구용으로 연구기관에 넘겨졌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방부만 될 뿐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이 수면을 취하는 듯한 모습은 유지되기 어려웠다. 당장 부패는 막더라도 시신이 건조해지면 피부의 탄성이 없어지거나 주름이 생기며 미관상 좋지 않다.[4] 그리하여 의학-생화학 전문가들이 여러명 참여했던 보존팀은 이를 위한 여러 기술을 개발했다. 일단 시신 처리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얼굴에 사반(死瘢 시신에 생기는 검푸른 반점)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는데 연구 끝에 아세트산에탄올을 섞은 용액으로 제거하는 방법도 개발하였다. 그리고 각종 변색은 과산화수소로 표백했다. 피부의 탄성을 유지하기 위해 몇주에 한번씩 글리세롤과 아세트산 칼륨을 섞은 용액으로 시신 전체를 목욕시켰다.

시신 보존을 위해 영묘 내에 실험실과 처리실이 갖춰져 있으며 소련 시절에 유해 보존과 관리를 담당하던 연구팀은 소련 붕괴 후 정부의 지원이 끊기자 어려움을 겪었으나 회사를 만들고 세계 각국에서 고객을 유치하는 식으로 살아남았다.

6. 러시아 연방의 이장 논란

6.1. 옐친 시대

소련 시절에는 국부의 능으로 추앙받은 곳이지만 소련 말기의 혼란과 소련 붕괴를 거쳐 러시아 연방으로 체제가 전환되면서 그에 대한 존경심이 점차 식어 가자 레닌을 이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소련을 악마화하고 부정하려던 보리스 옐친은 레닌 영묘를 없애고 싶어해 집권 직후인 1991년에 보존 및 관리를 위한 정부 예산 지원을 중단했고 소련 시절 최고지도자들이 레닌 영묘에 올라 승리의 날 기념식에서 열병식 사열을 받는 전통도 한사코 거부하다가 1995년에야 레닌이라는 이름을 가리고 올랐다.

소련 몰락 이후 주류 종교로 자리잡은 러시아 정교회도 시신을 전시하는 것이 교리에 어긋나므로 레닌을 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단 레닌은 유아세례를 받았으니 나중에 냉담자가 되었다고 해도 러시아 정교회 신자라고 주장할 수 있었고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시신 매장만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한창 매장 여론이 강했을 때는 러시아 연방 산하지만 불교가 국교인 칼미키야 공화국에서 레닌의 친할머니가 칼미크인이라는 점을 들어 레닌을 땅 속에 묻느니 레닌 묘를 자국으로 옮기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 레닌은 위인을 꼽으려면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물이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에서도 이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영묘에 대한 예산 지원이 끊겼을 때도 오직 민간의 기부금만으로 유지비를 모두 충당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레닌을 당의 시조로 삼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 영묘를 랜드마크로 삼는 관광업계, 그리고 레닌을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선전해 세계 각지의 고객을 끌어모으던 시신 보존 업체의 반대도 만만찮았다. 소련 시절부터 이미 관광 명소가 되었고 현재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데다 시신을 보존하는 전문 업체의 입장에서는 시신을 보존하는 기술이 어떤지에 대한 광고도 되기 때문에[5] 관광업계와 시신 보존 업체에서 레닌의 이장을 반대했다.

여담으로 옐친이나 반공주의적인 러시아인들은 레닌이 어머니 묘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유언장의 내용[6]은 공개되어 있으며(영어 번역판) 정치적 내용만 있을 뿐 자신의 장례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다.

6.2. 푸틴 시대

우리나라는 70년동안 소련 공산당의 영도하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 시기를 살아간 모든 세대의 유산입니다. 레닌을 땅 속에 묻는다는 것은 이 시기가 잘못되었으며 이 시기를 살아간 사람들이 헛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행동은 이미 우리가 겪었던 많은 혼란으로 다시 이어질 것입니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2001년 연설 출처[7]
소련 시절을 부정하던 옐친이 물러나고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하자 레닌을 이장하자는 소리가 쏙 들어갔다. 푸틴은 옐친으로부터 거의 대권을 물려받았지만 소련을 그리워하는 여론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이용해 지지기반을 확장했다.[8]

2016년 푸틴 정부는 1991년 이래 중단되었던 레닌 영묘에 대한 정부 지원을 25년만에 재개하였다. 이때 레닌 영묘 관리비가 처음으로 공개되었는데 한화로 연간 약 16억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일부 러시아 의회 의원들이 레닌 매장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으나 결국 통과되지 못했다.

또 옐친 집권기 이후 여론조사를 보면 소련 시절이 그립거나 소련 붕괴를 아쉬운 일로 보는 응답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통합 러시아 지지자들도 이런 여론은 다르지 않다. 2009년에 러시아 하원에서도 거론됐으나 결정을 못 내렸다. 이외에도 전시에 반대하는 러시아 정치인들은 가끔씩 레닌의 시신을 매장하자거나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대로 시신을 매장하되 현재의 영묘에는 밀랍 인형을 놓자는 식의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은 레닌 영묘에 손대는 것을 매우 민감하게 여기기 때문에 실행되지 않고 있다.
파일:129479_900.jpg
영화 ''을 패러디한 관련 만평[9]

7. 관람

파일:10714885936.jpg

레닌 묘는 수리 보수를 위해 정기적으로 문을 닫는다. 이 기간에는 이렇게 묘를 보이지 않게 가리므로 참고하자. 1년에 두 번 2개월씩 문을 닫는다.

넓은 붉은 광장 가운데 가장자리에 있어 쉽게 눈에 띈다. 입장료는 무료이고 내부 촬영은 아주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큰 짐은 근처 보관소에 맡겨야 한다. 묘지 입구와 내부는 러시아군의 경비가 아주 삼엄하므로 일반 박물관 등의 분위기를 생각하고 금지된 행위(사진촬영 등)를 몰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큰 오산이다. 애초에 누군가의 시신을 허락 없이 사진찍는 것 자체가 큰 실례이며 레닌은 소련 시절처럼 신격화되지는 않지만 현 러시아에서도 위인으로 보는 여론이 상당히 강하기 때문에 참배객들에게도 예의를 갖출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입장시 모자를 쓰고 있거나 복장이 참배에 부적절한 경우 경비가 제지하며 복장을 어느 정도 단정하게 한 뒤 입장할 수 있다. 관람 가능 시간이 화, 수, 목, 토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로 제한적이기 때문에 기왕 붉은 광장에 가는데 레닌을 만나고 싶으면 해당 요일 아침에 맞춰 가면 된다.

레닌 영묘가 있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은 러시아 내부는 물론 세계 각지에서 오는 참배객[10]이 몰리기 때문에 크게 시간을 뺏기지 않고 보려면 이른 시간부터 눈치 있게 줄을 서야 한다. 대기 시간은 매우 긴 편이지만 내부에서 오래 있고 싶다고 해도 오래 있을 수 없고 군인들의 통제하에 줄줄이 서서 한바퀴 빙 돌고 나오기 때문에 1-2분 내외만 관람하게 되므로 참고하자.

2024년 1월은 레닌의 사망 100주기가 되는 시기였다.

8. 매체에서



[1] 유언장의 내용은 알려졌으나 공개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실존 여부엔 논란이 있다.[2] 스탈린이 어렸을 때 배운 신학적 지식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독교식으로 교리화했다는 것은 여러 연구에서 지적된다.[3] 현재는 굳이 장기를 제거하지 않아도 시신에서 혈액을 빼내고 대체 약품을 주입하는 방법으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시신을 보존할 수 있다. 인체의 신비전이 좋은 예다.[4] 이 대표적인 예가 제러미 벤담. 생전 공리주의를 주장했던 그답게 유서에서 본인 사후에 시신을 방부처리한 후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전시하라는 말을 남겼으나, 머리가 보존처리에 실패해(…) 꽤나 혐오스러운 모습이 되어버렸다. 이 머리는 현재까지도 남아 간간히 전시되고, 구글에 찾아보면 사진도 나오나 별로 추천하지는 않는다.[5] 실제로 이나 베트남 등지의 엠버밍을 연간 15억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받으면서 진행하는 러시아 엠버밍 회사 입장에선 아주 쏠쏠한 사업이다.[6] 다만 원본은 공개되지 않았다.[7] 푸틴은 2013, 2019년에도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하여 레닌 매장 반대를 거듭 재확인했다.[8] 푸틴은 대체로 레닌을 긍정적으로 언급했지만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에는 레닌의 민족자결주의는 부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레닌은 민족자결주의의 관점에서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인정했고 우크라이나 SSR러시아 SFSR과 동일한 자격으로 소련에 가입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평등한 자격으로 연방에 가입시킨 레닌을 비난한 것이다. 다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입장에서는 레닌도 러시아 제국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멸망시키고 다시 소련이라는 속박에 구속시킨 사람이므로 좋게 보기 힘들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발발하자 남아 있던 레닌 동상을 모두 철거했다.[9] 레닌이 "реставрация(레스따브라치야)"야말로 볼셰비키가 바로 원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단어에는 '수리' 또는 '복원'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공산당 지지자들은 레닌 영묘를 '수리'하자고 말하고 반공주의자들은 레닌 영묘를 철거해 크렘린을 "복원"하자고 주장하는데 두 세력이 같은 단어로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상황을 풍자한 것이다.
출처
[10] 특히 중국인 참배객들이 많이 오는데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 사상을 사실상의 국교로 삼고 있다. 현대 중국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국가가 소련이며 중국과 소련은 1960년대 이후에는 원수지간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국부 레닌의 지위는 중국에서 격하되지 않았다. 문화대혁명 당시 레닌 숭배 포스터 및 삽화 거의 자본주의화된 현대 중국에서도 초중고 대학 교육과정에서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 사상 과목은 반드시 들어가며 공무원 시험에서도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과목인데 한국으로 치면 과거의 "국민윤리" 과목의 위치에 있다.[11] 참고로 붉은 라인은 이 역을 원래 굴라크로 쓰고 있었다(...)[12] EBS 더빙판에서는 "자본주의를 쳐부수자!"라는 위엄(?) 넘치는 대사로 번역되었다.